이사야 강해 제191강(사42:18-2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2월 18일(금)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째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가?(사42:18-22)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을 목격하게 됩니다(출19:1-22). 그때부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인 그들을 선택하여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게 됩니다. 그렇게 탄생한 선민의 나라는 하나님의 종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 제국을 건설하고 여호와의 영광을 중근동에 떨치게 됩니다(삼하8:1-15). 그 선민의 나라는 지혜의 왕 솔로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밝은 선견자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들이 많다는 사실을 이방세계에 자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의 자랑에 찬물을 끼얹고 계십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종은 소경이 되어버렸으며 선지자들은 귀머거리가 되어버렸고 제사장들도 맹인이 되어버렸으니 그 나라가 망하지 아니할 도리가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사42:18-22).
그렇다면, 선민들의 지도자들이 왜 그렇게 하나님 경외에서 멀어지게 되고 만 것일까요? 그 질문을 생각하면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제부터 각 구절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그 깊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묵상해봅니다;
첫째로, “(a)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b)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사42:18); 하나님말씀의 뜻을 못 알아 듣는 자들과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사42:18a); 귀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소리를 듣는 기능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능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너희 못 듣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후자의 기능이 상실된 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답답하여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그 작업을 수 차례 진행시켰습니다. 그러나 성과가 별로입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메시아를 보내어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2)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사42:18b); 일반사람들은 피조세계만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신앙을 가진 자들은 피조세계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보는 눈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그 영적인 세계를 전혀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안타까워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시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로, “(a)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b)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c) 누가 내게 충성된 자같이 맹인이겠느냐? (d) 누가 여호와의 종같이 맹인이겠느냐?”(사42:19); 사람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신앙에 대해서 자신하고 있습니다. 자신만은 의롭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계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의 종과 사자와 충성하는 자들부터 모두 신앙적으로 귀머거리가 되고 소경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평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1)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사42:19a);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들었던 왕이 다윗입니다(삼상16:7, 12-13, 행13: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 다윗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얻도록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1) 그러나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그는 출전하지를 않습니다. 자신을 대신하여 조카 요압으로 하여금 암몬의 수도를 점령하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삼하11:1). 그때에 그가 실족을 합니다. 간음죄와 살인죄를 연달아 범하기 때문입니다.
2) 그러면서도 다윗 대왕은 그것이 십계명을 어기고 있는 심각한 범죄인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종이지만 그만 승승장구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보는 눈이 소경이 되어버린 자와 같습니다(사42:19a). 얼마 후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로써 전해주자(삼하12:1-9) 비로서 그 눈에서 꺼풀이 떨어지고 자신의 엄청난 범죄를 깨닫고 있습니다(삼하12:13).
(2)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사42:19b); 역시 사례를 중심으로 하여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사자로 선택합니다(출4:13-16). 모세와 아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동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산에까지 이르게 됩니다(출19:1-3).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하여 산에 올라가고 수십 일 동안 하산하지 아니하자 문제가 발생합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신상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아론은 십계명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출20:4-5)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서 그만 애굽에서 보고 배운 그대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신 여호와라고 소개를 하고 맙니다(출32:2-4).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좋아하면서 금송아지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벌이게 됩니다(출32:5-6).
3) 똑 같은 사건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다시 발생합니다.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 여로보암1세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한 것입니다(왕상12:27-33). 그 정책을 북조 이스라엘이 망할 때까지 선민의 왕들이 계속 유지합니다. 그리고 남조 유다 왕국에서는 이사야의 시대에 히스기야 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저 외적을 물리치고 자신의 수명을 늘려주고 현세적인 구원만 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사39:8).
4) 다윗 왕조의 왕인 히스기야가 그 정도의 신앙에 머물고 있으므로 그 백성들도 수준 이하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가 크게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형편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는 예언의 말씀이 바로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사42:19b).
(3) “누가 내게 충성된 자같이 맹인이겠느냐?”(사42:19c); 하나님의 마음에 그토록 들었던 다윗 대왕조차 실족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심각한 범죄행위를 하고서도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있으므로 마치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만 자신의 충성심과 놀라운 성취에 눈이 멀어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동등하다는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을 볼 수 있는 눈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4) “누가 여호와의 종같이 맹인이겠느냐?”(사42:19d); 신정국가인 다윗 왕조의 왕국에 있어서는 세 가지 종류의 여호와의 종이 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입니다. 그들이 정치적 지도자이며 동시에 종교적인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모두 선민의 우월성과 현세적인 축복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백성들을 지도하고 여호와의 영광을 대외적으로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a)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b)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 도다”(사42:20);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정말 신앙적으로 꼭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아니하고 꼭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사42:20a);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말씀과 종교생활 가운데 무엇을 유의해야만 할까요?
1) 선민국가에는 지혜자, 선견자, 선지자, 제사장 등 뛰어난 종교적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말씀을 많이 알고 있으며 그것으로 백성들을 교육하고 또 백성들을 위하여 제례의식도 집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수 많은 민족 가운데 그들을 선택하시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말씀과 율법을 많이 암송하고 제례의식에 밝다고 하더라도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2) 예를 들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대접하고 있는 베다니 나사로 집의 풍경과 같습니다;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눅10:38-42).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부엌에서 바쁩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느라고 열심입니다. 혼자서 식사준비에 바쁜 마르다가 예수님께 부탁을 합니다. 마리아를 자신에게 보내어서 일손을 돕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뜻밖입니다.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3)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 우선문제입니다. 그렇게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야 옷을 정확하게 입을 수가 있습니다. 선민들의 지도자들이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민들의 나라가 앞으로 걱정입니다.
(2)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 도다”(사42:20b); 하나님께서 제사장나라로 선택한 백성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암기력이 뛰어나고 종교심이 깊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예민한 귀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적으로 자랑거리가 많아지자 그만 실족을 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고자 합니다;
1) 이방인들이 지혜의 대왕으로 소문이 난 솔로몬을 보고자 많이 찾아오게 되자 그가 실족하게 된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왕상10:1-13, 11:1-13). 자기가 자신의 능력으로 잘난 줄 알게 되자 그만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지혜를 주신 하나님, 지식을 많이 섭렵할 수 있도록 총명함을 주신 하나님, 부귀와 넓은 마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왕상3:9-15)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2) 모든 것을 주신 주인께서 엄연히 살아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제 마음대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요컨대,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a) 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말미암아, (b) 기쁨으로 교훈을 크게 하며, (c) (선민들을) 존귀하게 하려 하셨으나”(사42:21); 선민들이 내세우고 있는 의(義)는 별 볼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가지시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거룩하게 만들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기대 이하입니다. 왜 그럴까요?
(1) “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말미암아”(사42:21a); 하나님신앙을 가지고 종교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의 의가 서로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의 ‘정의’(正義, justice)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公義, righteousness)입니다;
1) 정의는 이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와 너와 우리들이 옳다고 판정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공의는 피조물을 창조주의 입장에서 똑같이 대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너희들과 다른 피조물들까지 전부 돌보고 살리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선민들이 자신들의 정의를 내세우고 종교생활을 율법적으로 영위하고 있습니다. 선민구원과 선민들의 세상적인 영광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다시 일깨워주어야만 합니다. 이방인까지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현세적인 영광이 아니라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추구하라고 가르쳐주어야만 합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시는 이유, 나아가서 메시아를 보내시는 이유가 모두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올바르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2) “기쁨으로 교훈을 크게 하며”(사42:21b); 흔히 ‘하나님의 견인(堅忍)’의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회개하도록 만드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구원하는 죄인이기 때문에 천국에서 잔치가 열리게 됩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이기적인 신앙인들이 정의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방해하고 있지만 다시 한번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계속 선지자들을 보내어 주십니다. 그리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번 강조하여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이며 선지서의 내용입니다.
(3) “(선민들을) 존귀하게 하려 하셨으나”(사42:21c); 하나님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하게 되는 선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일을 행할 때에 그들은 존귀한 하나님의 사자이며 종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회개를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민만의 구원을 고집하며 이방인들의 멸망을 계속 원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문젯거리입니다.
다섯째로, “(a) 이 백성이 도둑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창25:34), (b)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c)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창14:16, 20), (d) 탈취를 당하되, 되돌려주라 말할 자가 없도다(창12:17, 20:6-7)”(사42:22); 선민들이 하나님의 기대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영광과 성공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 결과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과 영은 그 나라를 떠나고 있습니다(창6:3). 그 결과 그들에게 재앙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봅니다;
(1) “이 백성이 도둑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창25:34)”(사42:22a); 선민의 나라가 침략을 당하고 있습니다. 국토가 적에게 유린이 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재물이 약탈을 당하며 장정들이 전쟁포로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2)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사42:22b); 결국에는 선민의 나라가 적의 침입으로 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이 모두 붙잡혀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맙니다.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 이어서 남조 유다 왕국마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100여년 후에 닥칠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멸망을 예지하면서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3)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창14:16, 20)”(사42:22c); 두 가지의 사례를 가지고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아브라함 때의 일이고, 또 하나는 히스기야 왕 때의 일입니다;
1)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가나안 헤브론 땅에 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강대국들이 다국적군을 형성하여 염해 지역 소돔과 고모라 등을 침략합니다(창14:1-2). 소돔과 고모라 등 5도시국가가 맞서지만 패전을 합니다. 그 결과 재물을 노략 당하고 장정들이 끌려가게 됩니다. 그 가운데 아브라함의 장조카 롯의 가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창14:12).
2) 그때 가나안 땅에서는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세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브라함이 가나안 세력을 이끌고 출전하여 기적적인 승리를 하게 됩니다(창14:13-16). 그 대목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14:18-20).
3) 주전 701년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산헤립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침략을 했습니다. 수도인 예루살렘을 제외하고 전국의 주요 성읍들이 적에게 점령이 되고 맙니다; 적들의 노략이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도 급해서 종주국 애굽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애굽의 원군들이 힘을 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산헤립 황제의 지략 때문에 패전을 하고 맙니다(사37:8-9). 세상적으로 구원의 방법이 사라집니다.
4) 오직 구원주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실제로,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사37:34-37). 그 깨달음을 영원히 잊어버리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은 너무나 빨리 그 사실을 다시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사39:1-8).
(4) “탈취를 당하되, 되돌려주라 말할 자가 없도다(창12:17, 20:6-7)”(사42:22d); 역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의 기록을 가지고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가뭄을 피하여 다른 나라로 이주한 적이 두 번 있습니다(창12:10, 20:1). 애굽과 블레셋입니다;
1) 그때마다 그는 미인인 아내 사라 때문에 걱정이 태산입니다. 자신을 죽이고 아내를 뺏어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두 번 모두 자신의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 결과 애굽의 황제인 바로의 후궁으로 끌려갑니다(창12:15).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바로가 잘못을 깨닫고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되돌려줍니다(창12:17-20).
2) 또한 블레셋의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후궁으로 끌려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당장 되돌려주라고 왕을 강압한 것입니다(창20:3-7). 말로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랄 왕궁 모든 여자의 태를 닫아버리시고 있습니다(창20:18). 무사히 사라가 아브라함의 품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창20:14-16).
3) 그와 같은 하나님의 개입이 선민들의 나라에도 계속 나타날 수가 있을까요?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의 때를 지나고 나면 그러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끝까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마치 우상을 섬기듯이 그렇게 현세구복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유대인들의 종교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너무나 실망하셨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종은 주인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엉뚱한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만약 구체적인 경우에 주인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 때에는 다시 물어보아야만 합니다. 성도의 경우에는 하나님에게 기도함으로써 그 답을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맡기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만 할지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에게 요청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방법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사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방법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인생을 살아가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은혜입니다. 마치 눈으로 본 듯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그 실천의 방법이 귀로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메시아의 오심으로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메시아가 오시기 전 700년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는 참으로 답답합니다. 그래서 선민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있는 그의 예언은 자꾸만 강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의 내용이 그러합니다; “선민의 나라에 있어서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마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와 같은 맹인들과 귀머거리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는 메시아가 오셔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가 들리도록 해주시는 그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사42:18-22).
그리스도가 오신지 2천년 후를 저희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생을 훤히 복음서를 통하여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합당한 방법을 선택하여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참으로 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예수님의 일생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 발자취를 따라서 살아가는 귀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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