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94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20. 12:05

이사야 강해 제194(43:4-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221()

 

구속과 파송, 그리고 그 자손을 하나님의 자녀로 땅끝에서부터 불러 모으시는 하나님(43:4-7)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희생을 치르시고 보배롭고 존귀한 성도를 구원하여 만민구원의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43:4). 그 결과 성도들이 하나님신앙을 온 세상에 전하는 선교의 일꾼이 되어 땅끝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장차 그들과 그들의 믿음을 승계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어떠한 은혜가 임하게 될까요? 그 질문에 대하여 본문 제5-7절에서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답변을 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a)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b)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43:4); 성도들이 인생을 살아갈 때에 어떠한 눈을 의식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만 할까요? 이사야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보시기에 보배롭고 존귀한 신앙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사랑하여 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43:4a).

(1)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여기서 다만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그 인생을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보배롭고 존귀한 자입니다.

(2)  그러한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43:4a). 그 사랑의 의미는 모든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구원하여 준다는 것입니다(43:4b).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는 곧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는 것입니다(43:6-7).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부활 승천하여 영생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그 특권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8:35).

(3)  참고로, 성도들이 세상살이를 할 때에 의식하게 되는 눈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의 눈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눈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사람들의 눈을 먼저 의식합니다. 이웃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    예를 들어, 세상사람들이 나를 위대한 선지자이며 하나님의 큰 일꾼으로 여긴다면 그야말로 천하를 얻은 듯이 엄청난 성취감과 인간적인 자부심을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이웃들이 손가락질을 하게 되면 너무나 괴롭습니다.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며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먼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종교생활을 영위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질책을 그토록 받게 되는 외식적인 신앙의 핵심입니다(23).

2)    예수님의 지적 그대로,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의 눈이 아니고 하나님의 눈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눈은 100년 안팎을 살아가는 동안에 그저 존경이냐 멸시냐를 판가름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창조주 하나님의 눈은 영생과 직결이 되고 있는 눈입니다.

3)    따라서 하나님의 눈은 성도의 의도와 행함을 냉철하게 평가하여 영생이냐 아니면 영벌이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그리스도가 오셔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둘째로, “(a) (악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b) 네 자손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를 모을 것이며”(43:5);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으면 그것이 진리이며 의로운 것입니다. 그 일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행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이 이사야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악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43:5a); 악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힘을 공급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왜 필요할까요?

1)    그 이유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세상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보기에 옳은 것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의 입장에서 모든 피조물의 형편을 두루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를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반대입니다. 자신과 자기 집단이 먼저 살고 이익을 크게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것을 약탈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정의입니다.

2)    그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의 명분과 정의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사랑 곧 공의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핍박과 박해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옳게 전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강하게 임재하시고 힘을 보태어 주시는 것입니다.

(2)  네 자손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를 모을 것이며”(43:5b);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도들과 성도들을 끝까지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이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먼저 사도들을 구원해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제1세대를 서쪽에서부터 모으겠다고 하는 표현으로 보아 초대교회시대 복음이 서쪽 로마로 먼저 퍼져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2)    더 세월이 지나면 성도들이 동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적극적으로 전하게 됩니다. 그들도 모두 구원하여 천국으로 모아 들이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셋째로, “(a)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b) 아들들먼 곳에서 이끌며, 딸들땅끝에서 오게 하며”(43:6); 사도 바울의 말 그대로 이 땅에서의 성도의 고난은 장차 얻게 되는 하나님 자녀의 영광과 비교하면 작고도 작은 것입니다(8:18). 그와 같은 취지의 말씀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1)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43:6a);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방 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선지서 이사야 제19장 말미의 말씀을 참조하면, 앗수르와 애굽으로 상징이 되고 있는 땅이 우선적인 선교지역입니다.

1)    선민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바라보면 앗수르는 북쪽으로 가서 동쪽으로 들어가는 지역입니다. 애굽은 남쪽으로 가서 서쪽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을 여기서 이사야가 북쪽과 남쪽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들 이방인들이 순순히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말씀과 신앙을 받아 들일까요? 아닙니다. 자신들의 토속신앙과 우상문화를 지키기 위하여 적대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그 결과 말씀을 전하는 종들이 포로가 되고 옥살이를 하게 될 것입니다.

3)    그러나 너무 염려하거나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종을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는 창조주의 권능이 선교현장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박해의 현장에서 내놓게 만들고 옥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입니다(43:6a).

(2)  아들들먼 곳에서 이끌며, 딸들땅끝에서 오게 하며”(43:6b); 하나님의 자녀를 먼 곳에서부터 그리고 땅끝에서부터 천국으로 불러모으십니다. 재미있는 표현은 아들들이 먼 곳에서 오게 되며, 딸들이 땅끝에서 오게 된다는 대목입니다(43:6b). 아들과 딸 가운데 누가 더 멀리까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무래도 아들보다는 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의 일꾼 가운데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용감하며 적극적인 것으로 짐작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a)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b) 그를 내가 (거듭나게) 지었고, 그를 내가 (사명자로) 만들었느니라”(43:7); 하나님의 종은 평생 동안 누구를 위하여 봉사를 해야만 할까요? 또한 그 일을 끝까지 충실하게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조치를 취해주시고 있는 것일까요?

(1)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43:7a); 하나님의 사자, 그리스도의 제자, 하나님의 선지자, 하나님의 백성 등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지만 결국은 모두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존재이유와 사역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종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곧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2)    종을 두고 있는 이유는 주인이 일을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행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만민과 만물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것입니다. 그 일을 신실하게 행하게 되면 피조물들이 창조주의 영광을 찬양하게 됩니다.

3)    그렇게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신실한 종을 천국으로 불러들이십니다. 천국잔치에 참석하게 하고 기업을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1:12).  

(2) 그를 내가 (거듭나게) 지었고, 그를 내가 (사명자로) 만들었느니라”(43:7b);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종으로 살아가게 되면 장차 어떠한 영광을 얻게 될까요? 세상이 주는 영광이 아니라 창조주로부터 오게 되는 엄청난 영광을 얻게 됩니다.

1)    첫째, 육신적인 삶으로 만족하지 않게 됩니다; 모태에서 육신을 입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생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그 운명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육신적인 삶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영적인 삶이 시작되고 있습니다(8:1-17). 그것이 거듭난 인생이며 하나님의 새로운 운명의 창조입니다.

2)    둘째, 가장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백 년 안팎의 유한한 인생을 사는 동안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인생을 살게 해주시니 그 은혜와 기쁨이 남은 인생 가운데 넘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가 있는 인생으로 창조해주심에 대하여 거듭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짧은 인생살이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것은 유한한 존재가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이 되고 마침내 영생에 참여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5:24, 11:25-26). 그와 같은 의미를 선지자 이사야가 본문에서 이미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는 장차 메시아가 유다 사회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신앙이 땅끝까지 전해지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세상에 전하는 그 일에 성도들이 매진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인생의 창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도록 보호하시고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간구로 그 일에 전념할 따름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아무쪼록 성도님들에게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