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98강(사43:18-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2월 25일(금)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 대하여(사43:18-21)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운영이 되어나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그러하지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면서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거짓말을 했던 역사가 블레셋 땅 그랄에서 다시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창12:11-15, 20:2). 마찬가지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1) 출애굽의 기적과 광야생활 40년의 훈련과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타락하고 있습니다(신8:12-20). 영생의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섬기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현세적인 복만을 추구하고자 합니다(왕상11:2-13, 12:27-33). 하나님신앙을 이방세계에 전하고 이방인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장나라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하는데 그 뜻을 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출19:5-6, 욘1:2, 3:1-4, 4:11).
(2)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계속 보내셔서 선민들의 이기적인 신앙을 바로잡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변화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정의로 하나님의 공의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의로움만을 내세우면서 이방인들의 처벌만을 하나님께 계속 요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사37:14-20, 38:2-3). 그 결과 선민의 나라의 멸망과 세상제국에서의 노예생활이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사39:5-8).
(3) 출애굽의 역사에 이어서 다시 출바벨론의 역사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해방을 맞이하고 일부 유대인들이 고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믿음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이제는 과거의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모습의 하나님신앙을 청산할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훗날 유대인들을 그들의 땅에 오신 구원자 메시아를 배척하게 됩니다.
(4) 이사야는 절망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의 힘과 능력으로써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신앙의 모습을 되찾지를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유다 왕국, 특히 히스기야 왕 때의 백성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신위적인 능력으로 앗수르의 대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 성을 구원해주었지만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민구원의 뜻을 곧 잊어버립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의롭고 올바른 신앙을 파수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대상이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사39:1-8).
(5) 그 어느 구석에도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실현이 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선지자 요나처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하고서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고 있습니다(욘4:1-5).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도 그러한데 이방인들의 죄와 잘못은 논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의 능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자 하십니다. 그 세상은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 일에 앞장을 서는 분이 바로 메시아입니다(사9:6-7, 11:1-12).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직접 임재하여 성도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영적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사42:1, 욜2:28-32). 그렇다면 짧은 본문 가운데에는 그러한 내용이 어떻게 반영이 되어 있을까요? 이제부터 각 구절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사43:18); 사람은 과거를 기억하고 장래를 생각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더 나은 장래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과거의 기억을 정리하고 그 가운데서 교훈을 얻어서 그것을 가지고 현재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애를 쓰며 살아왔는데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한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해결하시려고 하시는지 짧게 살펴봅니다;
(1) 선민 이스라엘의 오래된 기억은 출애굽과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입니다. 그것이 율법국가의 시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세상나라 애굽을 강하게 징계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켜버렸습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으며 적으로부터 승리를 얻게 해주셨습니다(출16:4, 17:6, 11).
(2) 그 다음에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해주시고 다윗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 제국의 영광을 온 세상에 떨치게 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세상나라 이방민족에 대해서는 징계하시고 선민을 항상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시대 예루살렘 성을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주신 은혜도 그러합니다(사37:34-36).
(3) 그와 같은 선민 이스라엘의 기억은 하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민을 보호하고 구원하시지만 이방인들의 세상나라는 항상 징계하시고 멸망시켜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민에게는 구원, 이방인에게는 멸망이라고 하는 인위적인 이분법을 성립시키고 있습니다.
(4)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과 기억을 지워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사43:18).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민과 이방인 모두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보호와 구원의 대상입니다. 다만 선민과 이방인의 구별이 있다고 한다면 선민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맡고 있다는 것입니다(출19:6).
(5) 제사장의 직분은 자신을 먼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하고 그 다음에는 죄인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주는 일입니다(출29:37-46, 레16:29-34). 따라서 선민들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장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 목적은 이방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여 창조주 앞에 구원받은 자의 모습으로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사66:20-21).
둘째로, “(a)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b)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43:19);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신다면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창조하시는 것일까요? 이사야의 예언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1)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43:19a); ‘새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선을 보인 적이 없는 일을 말합니다. 창조주가 새로이 창조하는 일이기에 그것은 사탄이나 우상 또는 피조물이 만들어 보일 수 있는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고 막상 그 일이 개방이 될 때까지는 아무도 눈치를 챌 수가 없으며 짐작도 할 수가 없는 ‘경천동지’(驚天動地,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집어짐)의 일입니다. 그 정도로 무시무시한 일이 이제 막 모습을 나타낼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개봉박두’(開封迫頭, 봉투를 뜯고 곧 내용물을 공개할 것임)입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들과 사람들이 이제부터 숨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눈여겨보아야만 합니다.
(2)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43:19b); 영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육체를 가진 인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이 익숙한 세상적인 모습에 비유를 하여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념적으로는 추상적이지만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는 구체적입니다;
1)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이사야가 이미 여러 번 변죽을 울린 적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동안 이사야의 예언을 묵상해보면 충분히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람이 살기 힘든 지역이 광야입니다. 사람들은 광야가 아니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는 성읍에 살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성읍들은 넓은 광야를 사이에 두고서 서로 뚝뚝 떨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선민의 성읍과 이방인의 성읍이 서로 교류가 없이 광야를 사이에 두고서 서로 떨어져 지내고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광야에 길을 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선민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허물겠다고 하시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이미 제19장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다음 내용과 같습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리라”(사19:23).
3)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사막입니다. 사막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사막 가운데 신기루처럼 생겨있는 오아시스입니다. 그 신기루와 같은 오아시스를 만들어 아예 사막을 뒤덮어버리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새 세상창조의 모습입니다.
4) 그것은 사막에 강을 내는 일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막과 같이 삭막한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생수의 강물이 터져 나오도록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요4:14). 그 일은 인간의 회개 정도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그 마음속에 흡족하게 내려주셔야만 합니다(욜2:23).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주시고 보여주시는 메시아의 오심과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공급해주시는 성령님의 내주와 역사하심이 필요합니다. 장차 그 두 가지의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임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셋째로, “(a)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b)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43:20); 들짐승은 이방인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가운데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실 것입니다. 상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사43:20a); 들짐승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족속들이 이방인들입니다. 선민들이 사람취급을 하지 아니하고 있는 그들 이방인들이 사실 남이 아닙니다;
1) 예를 들면, 이삭의 이복 형 이스마엘이 ‘야인’(野人, 들 사람)입니다;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하갈의)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창16:11-12).
2) 그리고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도 그러합니다(창25:27). 나아가서 아브라함의 장조차 롯의 두 아들이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창19:37-38). 따라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구원의 대상입니다. 본문은 그들을 구원하는 시대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예언입니다.
(2)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43:20b); 앞 구절에서 이방인들을 들짐승으로 비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승냥이 또는 타조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승냥이는 남을 해치고 먹을 것을 얻습니다. 타조는 야생의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들이 더 이상 야성으로 또한 남을 해치면서 살아가지 아니해도 되도록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주신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뜻입니다. 그것은 광야를 비옥한 땅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을 오아시스로 만들어준다고 하는 자연과 환경의 변화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그들 이방인들의 마음 속에 남을 죽이고 해치는 것이 아니고 살리고 돌볼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주겠다고 하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야성으로 저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방인들을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세상의 창조입니다.
넷째로, “(a)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b)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하나님께서는 새 세상에서 창조주를 찬송할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사43:21a); 이 백성은 과거의 선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방인 가운데서 새로이 선택이 된 백성들을 전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사66:21). 이제는 승냥이나 타조와 같은 삶을 청산하고 모든 생명을 살리고 함께 돌보며 살고자 하는 자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며 함께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본래 그 일을 담당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위하여 그들을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사43:21a).
(2)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b); 구원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만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몸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창조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영원히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계15:2-4).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1:12-13).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기업을 얻을 것입니다(롬8:17). 그리고 영원히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경영하는 청지기의 일을 감당해나갈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잃어버린 동산 에덴의 회복을 선지자 이사야가 내다보고서 본문의 예언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선지자 이사야는 예루살렘 성 유다 왕국의 회복만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선민들의 신앙행태만으로써는 이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온 세상구원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탄생을 희구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장차 메시아가 유대인의 사회에 오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능력과 신앙행태로써는 메시아를 본받아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일을 온전히 이루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역사의 창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에게 임재하신 바 있는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내주하여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세상이 창조가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새로운 세상에서는 이방인들도 더 이상 승냥이와 같이 남을 해치고 자기만 살겠다고 하는 백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타조와 같이 광야를 질주하며 혼자서만 살겠다고 하지를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피조물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며 함께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창조주 하나님과 메시아에게 돌리게 될 것입니다(계5:13). 그와 같은 놀라운 세상을 이사야가 본문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사야가 바라보고 있는 그 세상을 함께 바라보시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영을 가진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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