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장로 야고보의 체험적인 깨달음 3가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10. 16:36

제목; “장로 야고보의 체험적인 깨달음 3가지”(2:5-10, 20-26)

설교일; 주후 2021815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810일 화요일 작성)

 

장로 야고보는 나사렛 예수의 바로 아래 남동생입니다(6:3);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이 처녀 마리아에게 임하여 인간으로 태어난 특이한 출생의 비밀을 지니고 있습니다(1:26-38).

마리아의 정혼자인 목수 요셉은 이웃에 살고 있는 마리아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고서 고민합니다. 아직 합방도 하지 아니하였는데 어떻게 마리아가 임신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정조를 지키지 못한 사건이므로 율법에 따르면 죽음의 처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38:24, 22:22-24).

더구나 요셉 자신은 비록 갈릴리의 산골에 숨어서 지내고 있지만 위대한 다윗대왕의 후손이고(1:6-16) 마리아는 그 옛날 초대 대제사장인 아론의 자손입니다(1:5, 36, 39-42, 56). 뼈대가 있는 명문가의 가문에서는 결코 발생해서 아니되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후손인 목수 요셉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살리고 싶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파혼하고자 결심합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에게 임하여 사정설명을 합니다(1:20).

남녀사이의 불륜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메시아가 탄생하게 되는 과정이므로 조용히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고 아들 예수의 탄생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1:21-25). 그 말씀에 순종하여 목수 요셉은 배가 불러오는 마리아를 은밀하게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다음에 요셉은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서 갓 태어난 예수를 자신의 호적에 장남으로 등재합니다(2:1-7);

 그렇게 요셉과 마리아 만이 알고 있는 집안의 비밀을 훗날 차남으로 태어난 야고보가 알게 됩니다. 부모님의 은밀한 대화를 그가 우연히 엿듣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부터 다윗의 자손 목수 요셉의 진짜 혈통인 야고보는 고민하게 됩니다. 부친 요셉의 핏줄이 아닌 형 예수가 장남 구실을 하고 있는 집안에서 그가 차남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고민을 야고보는 똑똑한 동생 유다와 공유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일찍 돌아가신 부친을 대신하여 형 예수가 나사렛에서 계속 목수일을 하여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에 두사람은 집안의 비밀을 그냥 덮어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 예수가 나이 30이 가까워지자 갑자기 고향을 떠나겠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있습니다(3:23).

그는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의 대도시 가버나움으로 가서 그곳의 큰 회당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나중에는 선지자와 메시아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결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동생들은 큰 혼란에 빠지고 그때부터 형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한마디로, 가난한 산골마을 나사렛에서 목수일로 생계를 꾸려간다고 하는 것은 대대로 빈곤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 일을 그만두고 장남이 도시로 떠나버린다고 하는 것은 이기적인 배신 행위입니다. 그래서 장남의 뒤를 이어 집안의 목수일을 떠맡게 된 차남 야고보는 형 예수를 마음속으로 엄청 원망하게 됩니다;

다른 동생들도 장자인 예수의 배신에 대하여 그 시선이 결코 곱지가 않습니다. 다만 모친 마리아만은 그 옛날 천사장 가브리엘이 전해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있기에 집을 떠나는 장남 예수의 장래 일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따름입니다(1:26-33).

그와 같은 마리아 집안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도가 야고보와 요한 형제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이모 마리아의 조카들이기 때문입니다(19:26-27). 더구나 공생애를 준비하고 있는 예수가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부자이며 지방 유지인 이모부 세베대의 집에 상당기간 머물면서 이종 동생인 야고보 및 요한과 친하게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18:15-16).

그래서 훗날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나사렛 예수의 이모라고 은근히 알려주고 있습니다(19:25). 그 점을 먼저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27:55-56),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15:40-41);

그리고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남동생들이 형 예수의 공생애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그의 복음서에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7:1-5).  

형 예수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 야고보의 생각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고향 나사렛이 있는 갈릴리 지역에서 선지자이며 메시아 행세를 하고 있는 형 예수를 불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 예수는 다윗의 혈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짜 메시아인 형 예수가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살고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아니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동생들에게 집안의 생계인 목수일을 맡겨 놓고 혼자서 대도시로 가버린 형 예수가 여전히 원망스러운 것입니다. 모친과 동생들 곧 가족의 생계를 돌보지 아니하면서 혼자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영 이상한 것입니다. 똑똑한 동생 야고보와 유다의 생각으로는 형 예수의 선택은 매우 이기적이며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와 달리 나사렛 예수의 출생의 비밀을 잘 모르고 있는 친가와 외가의 어른들은 목수 요셉의 장자인 예수가 공생애에 나서자 그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그 점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가버나움의 유지인 이모부 세베대는 자신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선지자 예수의 제자로 보내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 살로메를 통하여 예수의 공생애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20:20-21).

둘째,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80리 정도 떨어진 동네 아리마대에 다윗의 자손인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곳의 촌장이 부자 요셉인데 그는 산헤드린 대공회에 참여하고 있는 종교적인 실력자입니다(23:50-51). 그는 개인적으로 다윗의 자손인 목수 요셉의 가까운 친척으로 보입니다. 그가 메시아의 길을 가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눈여겨보고 있으며 훗날 골고다에서는 예수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있는 것입니다(19:38-42);

셋째, 부활하신 예수님이 모든 사도와 제자들을 제쳐 두고 가장 먼저 원로인 엠마오 사람 글로바와 그의 아들인 시므온에게 나타나십니다(24:13-27).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글로바가 목수 요셉의 동생이며 나사렛 예수의 숙부이기 때문입니다(19:25). 그래서 그런지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총회장의 자리를 사도 베드로와 장로 야고보 다음에 사촌동생인 시므온이 계승하고 있습니다(15:7, 13, 14).

위와 같은 사실을 종합하여 보면 예수님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야고보가 체험하고 있는 3가지 영적인 깨달음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경제적인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공생애입니다.

둘째, 다윗의 자손으로서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는 일도 좋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셋째,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속에서 3일만에 부활하여 승천함으로써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남은 평생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부활과 영생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자가 개인적으로 부활과 영생의 상급을 얻게 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22:28-30);

그와 같은 장로 야고보의 깨달음이 어떻게 진술되고 있는지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2:5-7);

(1)  장로 야고보는 수석사도인 베드로에 이어서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총회장을 역임하게 됩니다. 그는 총회장의 직분을 감당한 다음에 노인이 되어서 그의 서신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교계의 지도자이며 원로인 야고보는 여기서 먼저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다정하게 부르고 있습니다(2:5a). 교회내에서는 성도 간에 서로 주님의 제자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평등사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희생의 보혈로 칭의를 받은 자들이며 거듭난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2:5c).

(2)  하나님께서는 장로 야고보의 경험에 따르면 자신과 같이 세상적으로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의 자리에 초대하여 주셨으며 더구나 교계의 지도자로 세우기까지 하셨습니다(2:5b). 그리스도 예수를 가난한 목수 요셉의 집에 태어나게 하시고 30세 가까이 될 때까지 육체적인 노동을 감당하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경력의 소유자이시니 성도들이 교회에서 가난한 성도들을 차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빈익빈 부익부의 사상이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교회에 침투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3)  오랜 세월 산골 마을 나사렛에서 가난한 목수로 살아온 장로 야고보이기에 부자의 횡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진술하고 있는 부자의 횡포가 다음과 같이 3가지입니다(2:6); 첫째, 가난한 자를 업신여깁니다. 둘째, 돈이 곧 힘이 되는 사회이기에 돈으로 가난한 약자를 억압합니다. 셋째, 부자의 편을 들어주는 법정으로 끌고가면 가난한 자는 패소하고 많은 소송비용을 물게 되어 완전히 파산하게 됩니다. 요컨대, 주후 1세기 초대교회 시대에도 법정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장로 야고보는 메시아인 형 예수를 유대교지도자들이 어떻게 가혹하게 다루었는지를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대공회의 인물들이 예수님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로마총독의 힘을 빌려서 십자가에 처형하고 만 것입니다(2:6). 그러나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섭리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무덤에서 부활시켰으며 영생의 하나님나라를 상속하게 하셨습니다(2:5).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이제부터 하나님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결단하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아름다운 이름을 주셨습니다(2:5, 7). 그러므로 교회에서 부자들이 가난한 성도들을 차별해서는 결코 아니되는 것입니다.   

둘째로,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법한 자가 되나니”(2:8-10);

(1)  장로 야고보가 이 글을 작성하고 있던 당시의 성경은 히브리경전을 말하고 있습니다(2:8a). 모세오경 중 레위기 제19장에서 율법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2:8b);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9:18). 그 율법의 해석을 유대인들은 선민사회 내에서의 이웃사랑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 사회내에서 약자인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선민사회내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5:43-45);

(3)  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섭리는 진작에 선민사회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만민을 구원하며 모두에게 부활과 영생의 복을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19:22-25, 6:39). 그와 같은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사랑과 영생구원의 뜻을 복음으로 선포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대속의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로 바치십니다. 그 결과 무덤속에서 부활하여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2:31-33).

(4)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체험적으로 철저하게 깨닫고 있는 장로 야고보가 본문에서 3가지를 주의하라고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방인을 차별하지 마세요. 둘째, 가난한 자를 억압하지 마세요(이상은2:9절의 내용임). 셋째,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산 생명들을 차별하고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2:10).   

셋째로,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20-24);

(1)  장로 야고보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는 그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인 야곱의 자손들이 선민사상에 젖어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의 믿음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선민만의 구원사상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유대인들은 선민에게 대대로 전수되고 있는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면서 예루살렘성전에서 매년 속죄의 제사를 드리면 그것으로 육체에 할례를 받고 있는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한 전통적인 선민사상이 다윗의 이스라엘제국을 재건하여 주는 메시아의 오심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대물림이 되고 있습니다;

(2)  그와 같은 메시아사상 곧 다윗대왕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나타나서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는 과업이 그 옛날 야고보의 집안에 있었던 야망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선민사상과 메시아사상을 찾고 있던 유대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과 무덤 속 부활로 말미암아 헛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로 야고보가 탄성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20, ). 그러므로 이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다시금 묵상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장로 야고보는 이스라엘 야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행함이 있는 믿음의 선례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3)  그 옛날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자가 아브라함입니다(21:33).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아브라함이 창조주 하나님을 찾으면서 부디 영생의 구원을 달라고 하는 기도가 브엘세바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 옛날 아담부부의 아들인 이 아들의 이름을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 에노스라고 부르면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부디 영생을 달라고 간구하던 그 놀라운 신앙이 아브라함에 의하여 다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4:26, 21:33).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영생구원을 원하는 소망이 이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우월한 것인지를 알고자 그를 시험하십니다(22:1).

(4)  여호와의 명령으로 진작 자신의 육체 중요부분에 할례를 행하고 있는 자가 아브라함입니다(17:9-11, 24). 그런데 그 할례의 정확한 의미를 그가 영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일까요? 남자의 생식기의 표피 일부를 잘라낸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자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한 깊은 의미를 아브라함은 진작에 깨닫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100세에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이 그들 부부의 능력으로 얻은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89세의 불임여성 사라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회춘하고 불임이 치유되어서 99세의 남편 아브라함과 합방하여 이삭을 생산한 것입니다(18:10-14, 21:1-7).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5)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이 주신 아들 이삭을 아까워하지 말고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22:2). 아브라함은 그 뜻에 순종하고 있습니다(2:21).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이삭을 주셨으니 다시 셋과 같은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11:18-20). 창조주의 능력을 믿는 그 신앙이 아브라함의 순종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창조주 여호와 앞에 아낌없이 바치는 온전한 믿음입니다(삼상2:29-30);

 그것을 장로 야고보는 본문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2:22). 마치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동일한 맥락입니다(4:16).

(6)  23,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하는 말씀은 창세기 제156절 말씀 및 제2212절 말씀을 합한 것과 같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벗이 될 수가 있습니다(8:35-36).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은 창조주의 능력으로 반드시 성취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5:6). 그것이 한마디로 헤세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7)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는 장로 야고보의 말은 그의 생애를 둘로 가르고 있는 것입니다; 선민의 할례, 모세의 율법, 성전의 제사의 효력을 믿으면서 유대인만의 구원과 다윗제국의 재건을 소망하던 그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이제 선민만의 구원을 희구하던 믿음, 메시아가 다윗의 제국을 재건한다고 하는 헛된 믿음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대신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생이 새로운 소망으로 장로 야고보에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8)  따라서 야고보는 선민의 자랑과 다윗가문의 후계자라는 자부심을 던져버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제국을 재건하여 약소국의 설움과 오랜 가난을 벗어나고자 시도하는 다윗가문의 소명도 벗어버리고 있습니다. 이제 장로 야고보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부활하여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와 같은 소망을 가지고 복음을 실천하는 삶이 바로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5-26);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던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면서 집안의 구원을 부탁합니다(2:6-14). 신실한 다윗의 조상 살몬이 여호수아에게 보고하여 그 부탁을 들어줍니다(6:25);

 그리고 살몬은 라합과 결혼하여 아들 보아스를 생산합니다(1:5). 보아스가 바로 다윗왕의 부친 이새의 조부입니다.

본문에서 장로 야고보가 기생 라합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의도는 동족과 조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생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2:25). 유한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영생의 천국을 소망해야 합니다. 세상의 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생 라합이 모범을 보이고 있는 소위 선택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삶입니다. 따라서 장로 야고보는 영생의 천국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있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2:26).

결론적으로, 야고보는 친형 예수가 식구들을 돌보지 아니하고 출가를 하고 나자 그를 원망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부친 요셉의 혈통이 아닌 예수가 다윗왕의 자손이 아니므로 결코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형보다는 오히려 야고보 자신이 메시아로는 적격입니다. 다윗의 자손인 목수 요셉의 혈통이며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제국을 재건하여야 약소국의 설움을 벗고 대를 이어오고 있는 가난을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처형이 된 형 예수가 3일만에 부활하여 고향을 방문하였을 때에 야고보와 동생 유다는 경악을 금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던 유대교의 기초인 선민구원사상과 메시아사상이 틀렸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하게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야고보와 유다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예루살렘에 초대교회를 세우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생애를 살아가게 됩니다. 그와 같은 삶의 변화와 가치의 선택을 장로 야고보는 본문에서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사실 장로 야고보의 체험적인 간증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그의 글을 자세하게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깊은 영적인 깨달음과 결단력 있는 실천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