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어떻게 나 먼저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울 것인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7. 21. 11:00

제목; “어떻게 나 먼저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울 것인가?”(15:1-10)

설교일; 주후 2021725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721일 작성)

 

먼저 오늘의 성경말씀 로마서 제15장의 해당 구절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을 이루고 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69:9).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18:49).

10.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32:43),

 

저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강해 설교하기 위하여 편의상 그 제목을 제2절에서 따오고 싶습니다. 그래서 강해설교의 제목이 어떻게 나 먼저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울 것인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로마서는 총 16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 결론은 제15장입니다. 그 이유는 제16장이 작별인사와 더불어 사도 바울이 그의 여러 동역자들을 로마시의 성도들에게 전부 소개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강해설교의 제목, “어떻게 나 먼저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 해답을 찾게 되면 그것은 사실상 로마서 전체의 결론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의 구절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저는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의 의미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상대적인 선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선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 점을 젊은 부자관리와의 대화에서 뚜렷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부자관리인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의 구원을 얻는 방법을 묻고자 할 때에 먼저 선한 선생님이여라로 말문을 열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만이 선하시고 자신은 선하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의 뜻은 육신을 가진 인간은 선한 존재가 아니며 절대적인 선은 오직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가지신 속성이라는 가르침입니다”(눅18:18-19의역);

그렇다면 그 절대적인 선의 개념이 무엇일까요? 그 점이 바리새인들과의 대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3:2-4).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한마디로, 율법이나 안식일 규정을 만드신 아버지 하나님의 취지가 피조물의 생명을 전부 구원하고자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선의 개념이고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며 나아가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다수를 위하여 소수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타국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 또는 다른 집단을 외면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만의 구원과 영생을 추구하는 것 등은 모두 절대선을 추구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5:43-48). 요컨대, 아무리 고상한 명분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행동은 악한 사상에 따른 것입니다.

둘째로, 덕에 대해서는 그 개념이 사도 바울의 글 고린도전서 제14장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14:1-5);

()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크게 베푼다고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덕이란 그 유익함이 널리 퍼지며 많은 사람의 이익을 도모하게 됩니다. 그 반대의 개념이 자신의 이익만을 얻거나 자기 집단만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비록 방언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좋은 영적인 기도의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통역이 되지 아니하면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4:4-5).

이상 설명한 선과 덕의 개념이 그리스도의 복음 곧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개념을 가지고 당시 초대교회 내에서 율법과 할례의 유용성을 주장하면서 선민우월사상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는 이기적인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과 개념을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 각 구절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을 이루고 을 세우도록 할지니라(2. καστος μν τ πλησίον ρεσκέτω ες τ γαθν πρς οκοδομήν)”; 크게 보아 교회의 구성원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가,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또 하나가, 믿음이 약한 자입니다. 만약 믿음이 강한 자가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면서 믿음이 약한 자를 얕본다고 하면 그것은 만민구원의 복음에서 어긋나는 행동입니다(15:1);

그러므로 진실로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를 성숙한 신앙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많은 생명을 구하는 복음사역에 가장 요긴한 일입니다. 교회 내에서부터 자신의 큰 믿음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모두의 신앙성숙을 위하여 노력할 때에 교회는 지역사회를 구원하는 큰 덕을 베풀며 더 많은 생명을 영생으로 구원하는 하나님의 절대선을 행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15:2).

참고로, 별명을 예수사랑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이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는 주석을 보게 되면 다음과 같이 선과 덕의 개념을 잘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 말씀은 단순히 남의 기분을 맞추라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남이 원하는 바를 맹목적으로 좇는 일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Hodge). 이는 타인의 영적 각성에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필요를 채워주라는 의미이다. 성도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가능한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모든 유익을 구하지 않고 그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바울의 삶이기도 하였다(고전 9:19-23).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 타인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이루어야 목표는 ''() 이루고 ''() 세우는 이다. '선을 이루고' 헬라어 '에이스 토 아가돈'(ες τ γαθν) 내적 가치, 특히 도덕적 목적을 나타내는 말로서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는 행위' 말한다(Murray). 성도들이 약한 형제들의 약점을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면서 살아야 원칙을 말씀한 이다. 또한 '덕을 세우도록'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 오이코도멘'(πρς οκοδομήν) '집을 세우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여기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지혜와 사랑, 은혜와 거룩에 이르도록 믿음의 성장을 촉진케 하는 행동 가리킨다. 전자가 내적 목적이나 가치를 지향하는 반면 후자는 외적 목적을 지향한다(Bengel). 결국 이것은 사람들의 인기나 기분을 맞추기 위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유익을 위하라는 의미이다(Robertson)”(15:2절에 대한 주석임);

둘째로,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68:9).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경우에는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부활과 영광을 제자들이 맛볼 수가 있습니다(16:24, 22:28-30). 여기서 성도들의 영광은 미래적인 것입니다. 반면에 당장 세상살이 가운데 성도들은 억울한 비방과 엄청난 환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구원하기 위하여 성도들은 어떠한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그 정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실현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선민구원과 현세구원을 주장하고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온갖 비방을 당하셨으며(69:9) 결국에는 억울하게 처형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선례가 바로 제자들이 뒤따라가야만 하는 모범사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15:3).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15: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확장하면 히브리정경의 기록이 벌써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4:44-45).   

셋째로,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이 대목은 사도 바울의 교회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도 바울의 로마서 제3장과 제7장의 기록을 참조하면 피조물인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들입니다(3:9-12, 7:22-24).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을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한 자들은 성도가 되고 영생의 구원에 참여하게 됩니다(8:1-2, 15). 그것이 교회론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시고자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그 결과 죄인인 우리들이 성도가 되고 영생의 구원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성도들이 교회 내에서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제멋대로 살고 있는 세상사람들을 모두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15:7). 요컨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성도의 삶이며 교회의 역할인 것입니다(15:5-6).  

넷째로,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18:49). 10.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32:43)”; 사도 바울은 그가 개척한 이방인 교회에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바울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하면서 율법과 할례를 받아야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이방인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현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외침이 초대교회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시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자생교회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에서 육신적인 할례보다 마음속 할례가 중요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율법을 완성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2:28-29, 3:19-24, 8:1-2);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따라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습니다(15:8a, 2:21). 그것은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있는 할례제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17:9-11, 15:8b).

더구나 신명기 제10장과 제30장에 기록되어 있는 마음의 할례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10:16, 30:6). 왜냐하면, “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는 구절이 곧바로 뒤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15:9a);

또한 예수님께서는 여러 백성들과 더불어 세례 요한으로부터 회개의 물세례를 받았으며(3:21-22) 히브리정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그대로 감당하셨습니다(24:44-45). 예수님께서 그와 같이 그 옛날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일생을 살아가신 이유가 히브리정경에 내포되어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의 뜻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이 세상에 밝히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15:8-9).

그와 같은 사실을 이방인선교에 있어서 사도 바울과 동행한 의사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24:44-49);

누가의 복음서 위의 구절을 참조하면 모든 열방과 족속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즐거워해야 하는(15:10)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구원과 영생의 복음이 만방에 그리고 만민에게 전파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약속하신 진리의 성령님을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즐거워하는 이방인과 같이 이제는 선민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의 구원을 기뻐해야 합니다(18:49, 32:43).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파수하고 있는 히브리정경에서부터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복음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민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따라 할례를 받으시고 그 말씀의 본래의 뜻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에 유대인들은 감사해야 합니다. 더 이상 이기적인 마음으로 율법과 할례를 독점하고 있는 선민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강변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 믿음이 강한 성도들이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비방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으로 얻은 귀한 생명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에 유념하여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선례를 쫓아 어떻게 나 먼저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울 것인가?”(15:1-10)를 진지하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는 말씀을 헬라어로 에이스 토 아가돈, 프로스 오이코도멘(ες τ γαθν πρς οκοδομήν)”이라고 읽으시면서 그 뜻을 깊이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많은 영적인 깨달음과 실천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