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데살로니가 교회에 두번째 편지를 보내면서(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3. 15:03

제목; “데살로니가 교회에 두번째 편지를 보내면서”(살후1:1-9)

설교일; 주후 202188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83일 화요일 작성)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는 사도 바울의 서신서입니다. 신약성경에 수록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글 13편 가운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고 있는 두 편의 편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그 서신서가 주후 51-52년경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16개월간 체류하는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서인 사도행전의 기록을 참조하면 사도 바울과 실라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대도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특이한 두가지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귀부인을 포함한 헬라인 큰 무리 곧 이방인들이 놀랍게도 바울과 실라가 전파하는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17:4). 또 하나는, 그곳에 살고 있는 유대인 교포들이 바울과 실라를 배척하고 내쫓았다는 것입니다(17:5-8).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방인 헬라인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전통적으로 산술적인 한 분 여호와 하나님만을 창조주로 섬기고 있는 유대인 회당의 교포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사도 바울 일행을 이단으로 몰아 배척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세운 데살로니가 교회마저 핍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환난을 피하여 데살로니가를 떠나 이웃 지역 뵈뢰아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지만 그곳까지 따라온 유대인 교포들이 소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17:10-13). 따라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마케도니아에 남겨두고서 홀로 남하하여 아덴과 고린도에서 복음전파를 하게 됩니다(17:14-17, 18:1-4);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나중에 데살로니가를 거쳐 마케도니아에서 남하한 실라와 디모데를 만나고 그들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을 듣게 됩니다(8:5, 살전3:6). 여전히 유대교에 철저한 교포 유대인들이 현지의 헬라인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게 걱정이 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그 믿음을 굳게 하고자 데살로니가 전서를 기록하여 디모데 편으로 보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살전1:1-10, 3:2). 그때가 주후 51년경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디모데로부터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미선교회의 상세한 보고를 듣고서 재차 편지를 작성하여 현지로 보내게 됩니다(살후1:1-2, 2:2). 그것이 이름하여 데살로니가 후서입니다. 그 시기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16개월 동안 성경공부반을 운영하고 있던 주후 52년경으로 보입니다(18:11).

그와 같이 때와 시기에 대한 추정이 가능한 이유는 바울이 갈리오(Gallio)가 아가야(Achaia) 총독으로 부임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소송에 휘말려서 마침내 고린도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의사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8:12-18).

아울러 역사학자들이 그 시기를  주후 52년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고린도 북쪽 델포이(또는 델피 Delphi) 신전에서 발견한 비문에 의하면 갈리오가 주후 51-52년경 아가야의 총독으로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걱정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후1:1-2);

(1)  사도 바울과 실라는 마케도니아 지방에 있는 빌립보에서 선교한 다음에 그 지방의 대도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적이 있습니다(16:12-15, 25, 17:1-4);

 그런데 디모데는 그 당시 두사람과 함께 행동한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 로마 식 이름이 실루아노인 실라와 더불어 자신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를 모두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요?(살후1:1a) 그 이유는 디모데가 실루아노와 더불어 마케도니아 지방에 머물고 있을 때에 벌써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여 그곳의 성도들과 친분을 쌓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17:13-14);

(2)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후서의 저자라고 하는 사실은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살후3:17)는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째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살후1:1b)라고 특이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대도시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는 헬라인과 교포 유대인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용어로 보입니다.

(3)  당시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의 큰 회당이 있으며 많은 교포 유대인들이 현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만의 폐쇄된 사회생활에 익숙하므로 일반적으로 데살로니가인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로,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가 데살로니가인데 전체 그리스 반도에 있어서는 두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물론 남쪽 아가야에 있는 고린도가 가장 큰 도시입니다. 따라서 로마시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가 아니라 고린도에서 많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18:1-4).

(4)  사도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을 때에 귀부인을 비롯한 이방인 헬라인들이 그들을 영접한 반면 현지의 교포 유대인들은 두사람을 배척했습니다(17:4-5). 더구나 유대교를 철저하게 믿고 있는 유대인 교포들은 이방인들이 세운 데살로니가 교회를 핍박하고 있습니다(살후1:4). 뿐만 아니라 믿음의 뿌리가 약한 헬라인 성도들에게 일부 종말론자들이 접근하여 바울의 가르침이라고 거짓말하면서 다미선교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살후1:8-10, 2:2-3). 그와 같은 현실을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디모데로부터  듣고서 다시금 서신서를 작성하고 있는 것입니다(딤전3:2, 6, 살후3:14-17).

(5)  사도 바울이 은혜와 평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살후1:2). 은혜와 평강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은혜는 고대사회에서 왕으로부터 제후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왕이 제후들에게 작위와 그에 합당한 재물 및 토지를 먼저 분배하여 주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십자가 대속의 희생제물이 되시고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의 모든 권한을 얻고 있습니다(28:18). 이제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 권한을 배분하여 주십니다(28:19-20).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헬라어로는 카리스 (χάρις)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남은 인생을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12:1-2, 고전6:19-20);

 

(6)  둘째, 평강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용어 살롬’(שָׁלוֹם)입니다. 그것을 헬라어에서는 에이레네(εἰρήνη)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평강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가 없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안식 곧 히브리어로는 שַׁבָּת(사바), 헬라어로는 카타파우신(καταπαυσιν)에 속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고 있을 때에 비로소 맛볼 수가 있는 안식은 거룩한 마음속 평안의 회복이며 영육 간의 복된 치유하심입니다(2:1-3). 그것은 성도들이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안식의 복을 자신의 교훈과 생애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날 성도들이 누리고 있는 안식의 주인이 되시고 있습니다(2:28, 3:4).

둘째로,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가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1:3-4);

(1)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인의 교회 성도들에게 믿음과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믿음이란 씨앗과 같아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살후1:3a). 그리고 그 열매가 풍성한 형제사랑과 이웃사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살후1:3b). 그러므로 올바른 믿음은 반드시 사랑이라고 하는 좋은 열매 곧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선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과 사랑이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있다는 사실을 디모데가 사도 바울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감격스럽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가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살후1:3).

(2)  믿음의 뿌리가 튼실하고 성도들이 서로 사랑의 열매를 맺고 있을 때에 교회는 세상적인 핍박과 환난을 이기고 크게 성장하며 성도들은 성숙한 신앙인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살후1:4b). 디모데가 그와 같은 모습을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고 바울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먼저 현지의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하여 칭찬하면서 이제는 구체적으로 그들이 인내로서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박해와 환난의 정체에 대하여 그 복음적인 의미를 기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살후1:4a).

셋째로,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들을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살후1:5-7);

(1)  사도 바울은 기본적으로 박해와 환난이 필요한 이유는 교회와 성도들이 그 고난을 이기고 승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6-17);

 그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일찍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밝히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예컨대,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저울에 있어서 한쪽에는 고난의 추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영광의 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5절 말씀의 뜻입니다.

(2)  4절에서 바울은 모든 박해와 환난을 거론하였는데 제6-7절에서는 환난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사실 바울이 현지를 시찰하고 돌아온 디모데로부터 듣고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의 문제점이 두가지입니다; 하나가,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는 교포 유대인들로부터 현지의 헬라인 교회가 받고 있는 여러 가지 박해입니다. 또 하나가, 사도 바울의 이름을 거짓으로 차용하여 시한부 종말사상을 전파하고 있는 일종의 다미선교 이단으로부터 받고 있는 환난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가 주로 전자에 대한 대응책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후서는 후자에 대한 대응책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6절에서 바울은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벌써 모세오경 창세기 제12장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가 되고 있기에 그것은 힘있는 바울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12:3).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종말론과 그리스도의 재림론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첫째, 주님께서는 힘있는 천사들을 이끌고 재림하시는데 그 목적이 종말심판을 위한 것입니다(살후1:7b). 둘째, 환난을 이긴 성도들에게는 구원을 베푸시는데 그 내용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입각한 안식이라는 것입니다(살후1:7a).

(4)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안식의 상급은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성도들이 내세에 얻을 수 있는 상급이므로 현세에서는 그 매력이 덜한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환난을 실제적으로 세상살이 가운데 이길 수 있는 완전한 무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어떠한 보완책이 마련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 점을 사도 바울이 놀랍게도 그의 저작인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1-4).

(5)  한 마디로, 내주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얻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따라 그 제자로 살아가게 되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안식의 복이 현세에서도 영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8:4). 그것으로 모든 세상적인 박해와 환난을 넉넉하게 이기게 됩니다(8:37-39);

 물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심판이 있기 전에 영적으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에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eschatological strain 현세와 종말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관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이슈는 사도 바울의 이름을 도용하여 이상한 종말론과 그리스도의 재림론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전파하고 있는 다미선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입니다. 그 내용이 제8-9절입니다. 

넷째로,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8-9); 사도 바울은 당장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이 세상에 종말심판이 임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당시의 다미선교회 사람들에 대하여 첫째,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며 둘째, 주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7-8). 이 세상의 종말의 시기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는 완벽하게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극비 사항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을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때와 시기를 제멋대로 떠들고 있는 자들은 한마디로, 적 그리스도이며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같이 종말심판의 대상이 되어 영벌에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성도들은 다미선교의 거짓선지자들에게 속아서 환난을 당할 일이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복음전파에 총력을 기울이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 복음의 올바른 전파와 제자로서의 경건한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기성교회를 무너뜨리고 교계의 질서를 대혼란으로 몰고가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8b-9);

결론적으로, 주후 19세기와 20세기에 맹위를 떨친 바가 있는 다미선교의 행태가 초대교회 그것도 사도 바울이 세운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를 환난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 환난을 어떻게 극복하여야 하는지 바울이 성도들에게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설명하고 있는 가르침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 있어서는 일체 방언이나 예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고린도 교회가 오순절의 뜨거운 모습이라고 한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장로교와 같은 경건한 모습이 우세하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차이를 살피시면서 고린도 교회 및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고 있는 바울의 서신을 서로 비교하면서 자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많은 영적인 깨달음과 복음적인 실천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