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유대인의 유익성 서너 가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7. 14. 11:53

제목;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유대인의 유익성 서너 가지”(3:1-8)

설교일; 주후 2021718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714일 작성)

 

먼저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유대인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바울은 본래 베냐민 지파입니다(3:5). 그런데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22:3).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다윗과 솔로몬의 거대한 이스라엘제국이 주전 930년경 르호보암 왕 때에 남과 북으로 분열된 이후  역사서에서부터 르호보암을 유다 왕으로 그리고 남조 유다 왕국 백성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왕상12:17, 23, 대하11:3, 17).

그런데 남조 유다 왕국에는 다윗 왕가의 유다 지파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외에도 다윗왕조의 정통성을 지지하고 있는 베냐민 지파레위인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대하11:12-13). 그들이 모두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되어 일심동체로 다윗왕조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 유다 왕국의 백성들은 선민 이스라엘의 정통성이 다윗왕조를 섬기고 있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의 출신지파의 개념을 초월하여 스스로 유대인임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22:3).

그와 같은 인식의 일환으로 한때 남조 유다 왕국의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은 선민의 나라가 전부 망한 후에도 북조 이스라엘 왕국 출신의 백성들 곧 이스라엘 10지파의 후손들을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혼혈이 되어버린 자 곧 이방인보다 못한 죄인들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왕하17:22-33, 4:3-4).

그와 같은 차별을 역사적으로 오래 받아온 자들이 이름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 수도가 사마리아였으므로 망국의 백성들을 전부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왕하17:6, 29)

그와 같은 사실을 복음서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에서 북상하고 있던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의 반응이 그러합니다. 그에 대한 사도 요한의 설명이 구체적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4:9);

이스라엘 12지파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모두 같은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은 자신들만이 여호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들은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주장하고 있는 근거가 서너 가지 있습니다; 첫째, 유대교의 중심인 성전이 유다 왕국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둘째, 유대인들은 여전히 할례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셋째, 주전 2세기부터 바리새인들이 히브리경전을 연구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뛰어난 인재들이 랍비가 되어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사전지식을 가지고 본문을 다시 읽어보게 되면 사도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유대인의 유익성 서너 가지가 보다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본문말씀을 한 구절 씩 풀이해가면서 그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1-2);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일까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 가운데 일부가 이방인 출신 성도들에게 한가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민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할례제도를 시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7:10-11);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인 할례제도도 준행하고 있으니 유대인 자신들이야 말로 완벽한 구원을 얻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할례의 유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제2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이 맡아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방인보다 유대인이 낫다고 하는 것은 할례의 유익성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설명을 깊이 생각해보면 그의 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가지 유익성 중의 하나인 할례를 가장 으뜸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세요. 할례의 유익성도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에 비추어볼 때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 점에 유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할례제도는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에서부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육체적 특징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17:9-14, 4:25-26, 12:48).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서자 여호와의 명령으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실시합니다(5:2-8).

그런데 정작 할례의 중요성에 대하여 모세가 신명기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10:16). 육체적인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한 것이기에 신명기 제306절에서 재차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그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2:29);

사도 바울이 자신 있게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고 진술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전력(前歷, 옛날 경력)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교법사로 유명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어릴 때부터 십 수년 간 히브리경전을 공부하여 당당하게 나이 30세에 랍비 시험에 통과한 인재입니다(22:3).

그리고 사울은 훗날 그의 간증에서 엿볼 수 있듯이 유대인들에게 히브리경전과 히브리전승을 가르치는 젊은 랍비로서 그리고 유대교의 젊은 지도자로서 그 열심과 위세가 지나칠 정도로 대단합니다(9:1-2, 7:58, 8:1, 22:3-5).

그러한 경력의 소유자이기에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으로 만나게 되자 그 영적인 체험의 의미를 자신이 오래 공부하고 연구한 히브리경전의 뜻에 비추어 깊이 묵상한 것입니다(9:3-6, 1:17-18, 2:1);

 그 결과 그는 히브리경전에서부터 메시아 사상과 그리스도의 복음의 뜻을 밝혀내어 그것을 굉장히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1:1-7).

그와 같은 체계적인 설명력을 보이고 있는 사도 바울의 장점을 초대교회의 원로인 사도 베드로가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만약 사도 바울에게 물어서 그가 대답하지 못할 것 같으면 더 이상 손을 대지 말라고 친절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벧후3:15-1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이 히브리경전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오늘날 세상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히브리경전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의 완전한 계시자이며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신 예수님의 교훈과 일생에 비추어서 아무쪼록 히브리경전을 이해하고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사도 바울처럼 유대인들의 일부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을 히브리경전에서부터 올바르게 풀이하여 세상사람들에게 가르쳐준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유익성 중의 유익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3:3-4);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안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이방인 출신 성도들 사이에 다툼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자신들은 할례를 받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할례제도를 가지고 있지 아니한 이방인출신 성도들은 이제부터라도 율법과 할례를 지키는 것이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이방인 출신 성도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너희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못 박아 십자가에서 죽게 한 죄인들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강조하고 있는 율법도 할례도 성전도 자랑거리가 되지를 못한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지 못하였으니 형식적인 율법과 할례만을 강조하는 너희 유대인들의 여호와신앙을 따를 수가 없다”.

그와 같은 현실에 직면한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3:3-4a).

바울은 헤세드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들은 신의가 없으며 믿음생활에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고 예언의 말씀 그대로 이 세상의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믿음생활을 다음과 같이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모두 죄인들입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실천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의인인 것입니다(3:4).

둘째, 믿음생활을 올바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칭의의 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51:3-4).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한 성도들을 자녀로 영접하시고 모든 시험과 시비에서부터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3:4b).

셋째로,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3:5-6); 본문의 구절은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재조명할 때에 쉽게 이해가 됩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 그대로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드러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3:20). 그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지키려고 해보면 사람들의 눈 앞에서는 잘 지키는 시늉을 할 수가 있지만 정작 마음속으로는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5:28);

따라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단잠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26:41). 훗날 사도 바울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2-24).

그러므로 율법에 비추어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죄인의 것이라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회개하며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칭의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거듭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복음의 은혜를 모르고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변명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사도 바울이 여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3:5a). 죄수의 수가 많아지면 간수의 수가 많아지듯이 자신들이 불의를 행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의가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하나님께서 더 크신 영광을 얻을 수가 있다고 강변하는 내용입니다;

 과연 그러한 것일까요?  

마치 위서인 유다복음의 주장과 같은 그러한 궤변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통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선민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호와의 뜻이 부디 율법에 비추어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고서 정직하게 여호와 앞에 서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구원과 영생의 길을 그리스도 안에서 열어줄 것인데 그것을 싫어하고 있는 유대인들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유일한 하나님의 선민이며 율법을 가진 의인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선민의식과 의인사상이 지나쳐서 마음속 진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도무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설혹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 세상에 지극히 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내는 계기가 될 따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자신들의 불의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의를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 받고 있으니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허무맹랑한 궤변입니다.  

그와 같은 유대인들의 변명이 전혀 여호와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바울이 명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3:5b-6).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시며 모든 생명을 전부 돌보고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선입니다(3:4). 그러한 절대선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독생자 그리스도께서도 온전히 실천할 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19);

그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각임을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자들의 불의한 행동을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이 세상을 홀로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하나같이 돌보고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소위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인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십니다(11:4-9). 따라서 자신의 불의한 행동을 그와 같이 변명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입니다”(3:5b-6의역).

넷째로,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3:7-8);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과정에서 유대주의자들의 음해로 말미암아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가 두 차례의 세계선교를 통하여 소아시아 갈라디아 지역에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예루살렘에서 북상한 유대주의자들이 그곳 성도들에게 바울의 험담을 늘어놓은 것입니다(1:6-10). 크게 보아 두가지의 비난인데 하나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시비이며 또 하나가, 바울의 복음이 율법에서 어긋난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유대주의자들의 사도 바울에 대한 비난이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시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내면서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3:7-8).

두가지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유대주의자들이 나의 복음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 거짓말이라고 음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거짓말이라고 가리키고 있는 나 바울의 복음이 초대교회 많은 교회들을 튼튼하게 세우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성도들의 지식이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열매를 가지고 평가를 하자면 사도 바울 자신을 결코 죄인 취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3:7).

둘째, 마치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듯이 사도 바울이 거짓말을 하며 악행을 일삼고 있는 그곳에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생겨나고 있다는 궤변적인 비판이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한마디로 그와 같은 말도 되지 아니하는 비방을 일삼는 자들은 하나같이 주님의 정죄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8);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의 말이 역사적인 사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고 그가 거짓복음을 전파하고 있다고 비방하던 유대주의자들이 오늘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도 바울의 글과 주장만이 살아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랍비 사울의 스승인 교법사 가말리엘의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의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5:38-39).

아울러 히브리정경에 대한 깊은 연구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석 위에 세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선민우월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는 물론 육신적인 타락을 합리화시켜주고 있는 영지주의자들의 유혹을 물리치는 비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본문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시면서 성도의 삶에 많은 유익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