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71강(사38:9-2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1월 28일(토)
하나님의 역사로 죽을 병이 낫게 된 히스기야 왕이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가?(사38:9-20)
가장 중요한 히스기야 왕의 영적인 깨달음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번 강해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그가 노래하고 있는 내용전체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각 구절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묵상을 통하여 그 의미를 풀이해봅니다;
첫째로, “(9)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그의 병이 나은 때에 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10) 내가 말하기를 나의 중년에 스올의 문에 들어가고 나의 여생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사38:9-10); 먼저 이 글은 히스기야의 일종의 간증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을 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나음을 입고서 감사의 마음으로 이 글을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감사만이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깨닫게 된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치 오도송(悟道頌)과 같습니다.
여기서 히스기야는 흔한 병이 나음을 입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중병이 걸렸는데 그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이사야를 통하여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사38:1). 당시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의 위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경험한 하나의 사건 때문입니다; “먼저 산헤립 황제를 벌하고 침략군 앗수르 군대를 물러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에 따라 천사가 나타나서 하룻밤 사이에 적군 18만 5천 명을 몰살시키고 말았습니다”(사37:34-36).
그와 같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언에 따라 히스기야 왕은 그 병으로 말미암아 곧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죽는다고 하는 그 병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을 운명이 사는 운명으로 바뀐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새로운 창조와 같은 것입니다.
이제 그 사유를 당사자 히스기야 왕이 진술하고 있습니다(사38:9).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진리를 신하와 백성들에게 전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히스기야의 뜻을 이해하고서 그의 오도송과 같은 간증문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선지자 이사야입니다. 반면에, 선민들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사관이나 학자들은 히스기야 왕의 간증문을 싣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바라본 그대로 과연 어떠한 신앙적인 차원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이제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히스기야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그 중병으로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이사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아직 40도 못된 중년의 나이에 스올 곧 음부의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하니 남아 있는 인생을 모두 박탈당하는 것과 같은 허탈감이 밀려오고 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사38:10 의역). 한 마디로, 하나님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누려야 할 향년을 다 누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억울하다는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진술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둘째로, “(11)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12)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겨졌고,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같이 내가 내 생명을 말았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사38:11-12); 히스기야 왕의 신앙이 현세적인 것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죽고 나면 모든 것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 있어야 하나님도 볼 수가 있고 이웃도 볼 수가 있다는 진술입니다(사38:11). 그것은 영생을 추구하고 있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히스기야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버리실 것입니다(사38:12a). 그리고 조만간 육신의 틀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실 것입니다(사38:12b). 그리하시면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 나고 맙니다. 다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으며 이웃과 정을 나눌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신앙도 제사장나라도 모두 필요가 없는 무용지물이라는 히스기야의 진술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 완전한 소멸의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 히스기야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째로, “(13)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주께서 사자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14)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사38:13-14); 그래서 히스기야는 죽기 싫어서 열심히 호흡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꾸만 몸이 아파서 감기고 있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서 어두움의 시간이 물러가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바로 “아침까지 견디었다”는 것입니다(사38:13a). 그렇지만 그의 인위적인 노력은 곧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육신을 꺾어버리시고 영혼을 빼내어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38:13b).
그래서 히스기야는 절망 가운데 부르짖고 있습니다; “내가 젊어서는 제비같이 날아 다녔으며, 25세부터는 왕좌에 앉아서 고귀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40도 안된 중년의 나이에 중병에 걸려서 비둘기같이 슬퍼하고 있다.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오직 소원이 하나밖에 없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의 압제로부터 저를 해방시켜주십시오. 저는 죄와 죽음의 종의 신세를 벗어날 방도가 없으니 하나님께서 저의 중보자가 되어주십시오. 그 정당한 값을 지불해주시고 부디 죽음에서 저를 구해주십시오”(사38:14 의역).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에서 이 세상의 구원주 메시아가 오심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시는 중보자이십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히스기야 왕의 깨달음의 노래가 우연히 그 대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의 노래를 그의 선지서에 이와 같이 싣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15) (a)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b) 내 영혼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신토록 방황하리이다. (16)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주옵소서”(사38:15-16); 히스기야가 잠시 그 해에 발생했던 앗수르 제국 산헤립 황제의 침략사건을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군사대국 앗수르의 황제들이 친히 정복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 앞에 지금까지 무너지지 아니한 왕국이 없습니다.
주전 733년에 시리아의 아람 왕국이 멸망을 당하고 그로부터 11년 후에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정복을 당했습니다. 이제는 남조 유다 왕국의 차례가 맞습니다. 대항을 할 염두가 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전국의 금과 은을 끌어 모아 산헤립에게 바치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하지만 산헤립은 신의도 없이, 회군하는 척 하다가 다르단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곧 바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헤립 황제 자신은 친위군을 이끌고 라기스에 주둔하면서 애굽의 원군을 치려고 합니다. 마침내 엘라 골짜기 립나에서 애굽의 군대를 쳐부수고서 산헤립은 히스기야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항복하라고 친서를 보내온 것입니다(사37:9).
히스기야 왕은 현명한 신하들과 더불어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화해정책도 추진하고 애굽의 원군도 비밀리에 요청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중보기도도 부탁했습니다(사37:2-3). 하지만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자신의 영혼만 절망 가운데 방황하고 있을 뿐입니다(사38:15b).
그런데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나자 모든 것이 달라져버립니다(사37:14-16).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앗수르 군을 쳐부수시고 산헤립으로 하여금 멀리 자기나라로 도망치게 만드신 것입니다(사37:34-37). 그래서 이사야가 결론적으로 한 가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사38:15a).
죽고 사는 모든 주권에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았다는 히스기야 왕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이 애처롭습니다. 그리고 아직 병에서 나음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자신의 영혼이 불쌍할 따름입니다(사38:15b). 그러므로 부디 불쌍히 여기시고 생명과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료하여주시고 살려달라는 간구입니다(사38:16).
다섯째로, “(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38:17); 전무후무(前無後無,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음)한 하나님의 은혜를 히스기야 왕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줄 것이라고 새로운 예언의 말씀을 전해주셨기 때문입니다(사38:5). 그 말씀 그대로 병석에서 일어났으며 다시 왕좌에 앉아서 정무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히스기야 왕은 승리의 개가를 다음과 같이 부르고 있습니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다음에 바다가 고요하듯이 죽음의 큰 고통이 지나고 나니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그러합니다. 따라서 결과론적으로 나에게 평안의 복을 주기 위하여 큰 고통을 통과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알 것만 같습니다. 주께서는 저의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저의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저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죽음의 골짜기에서 저를 다시 살려주신 것입니다”(사38:17 의역). 히스기야 왕의 하나님신앙이 현세적인 복에서 영혼구원이라는 내세적인 복까지 나아가고 있음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는 귀한 대목입니다.
여섯째로, “(18)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19)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38:18-19); 죽을 병이 낫게 된 것뿐만이 아닙니다. 사실은 죽음이 물러가고 새로운 생명이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 의미를 히스기야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죽음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영혼이 방황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면 죄와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사라지고, 찬양이 사라지며, 반드시 말씀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그 결과 그 인생은 영원히 사망하며 음부의 세계로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사38:18).
(2) 반대로 그 영혼이 구원을 받은 자는 영원히 생명의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남은 인생 동안 주께 감사하며 히스기야처럼 반드시 언약과 예언의 말씀대로 성취하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하나님신앙으로 후대에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사38:19).
일곱째로, “(a)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b)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c)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사38:20); 15년 목숨연장을 받게 된 히스기야가 더 큰 소원을 말하면서 그의 깨달음의 노래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목숨연장은 하나의 예표(豫表, 미리 보여주는 징조나 선례)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15년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살려주시는 은혜가 이 세상에 임할 것이라는 놀라운 간증입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사38:20a); 미래적인 표현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목숨연장을 받은 15년 세월을 모두 지낸 다음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의 하나님을 자신의 신앙으로 노래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깨달음(창21:33, 22:12)과 같은 대목입니다.
1) 예를 들면, 730년 후의 베다니의 나사로의 모습을 미리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나사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친구로 불리고 있습니다(요11:11). 그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무덤에서 살아나온 사람입니다(요11:42-44).
2) 그 다음에 나사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바라보고 믿게 됩니다(고전15:6, 눅24:49-53). 마침내 나사로는 그리스도와 같은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자신도 완전한 부활과 영생을 얻게 될 것임을 하나님신앙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에 전하는 성도가 되고 있습니다(행1:15, 2:1-4).
3) 그와 같은 부활과 영생의 믿음을 여기서 히스기야 왕의 깨달음의 노래를 통하여 미리 만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히스기야의 간증의 노래는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선지서에 수록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사38:20b); 더 정확한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세월 동안 히스기야는 신하들 및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하늘 여호와의 보좌 앞에서 지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3)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사38:20c); 히스기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서 노래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수금의 반주에 맞추어서 자신이 경험한 사실과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의미가 있고 힘이 있는 찬양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노래로 부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요즈음 음악오디션에서도 자기 나름의 음악성과 깨달음의 노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천국에서야 오죽이나 그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의 인생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구원의 깨달음을 자신의 노래로 간증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천국에서 기쁨으로 부를 수 있는 자신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히스기야는 현세적인 구원과 기쁨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구원과 영생을 믿고서 그 기쁨을 이 세상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의 간증문에 나타나고 있는 깨달음의 노래를 분석해보면 분명히 후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세월 동안 그만 히스기야가 다시 타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깨달음을 실천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얻는데 신경을 쓰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 평소에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신하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며 말씀을 묵상하기를 좋아했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사장나라 유다 왕국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씀을 온 세상에 전하며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이른 바 하나님나라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을 생략했기에 다시 비극이 발생하고 맙니다. 멀지 아니하여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의 대군을 물리친 것이 자신의 기도의 능력 때문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다 왕국의 세상적인 번영의 모습을 먼 나라의 사절에게 자랑하게 됩니다. 더구나 기고만장해져서 그만 늦게 태어난 왕자 므낫세의 교육에도 실패하게 됩니다(왕하21:1-2). 히스기야가 하나님신앙의 참된 모습을 왕자에게 전혀 보여주지를 못했기에 역사상 가장 악한 왕 므낫세가 사후에 등장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왕하21:10-13). 그것이 치유할 수 없는 히스기야의 비극입니다.
오늘 날 기독교인의 모습이 병이 낫고 난 이후의 히스기야의 모습과 닮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참된 하나님신앙의 모습을 후세에 보여주지를 못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어찌하면 될까요? 다시 죽을 병이 들기 전에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복음에 대한 깨달음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생활화하는데 역점을 두어야만 합니다. 한 마디로, 작은 그리스도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조율해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쪼록 그렇게 변화를 받을 수 있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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