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69강(사38: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1월 26일(목)
히스기야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난 창조주 하나님의 견인(堅忍, 참고 인내하심)과 구원에 대한 증거들(사38:1-8)
흔히 히스기야(bc715-687)를 유다 왕국의 13번째 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표현은 남조 유다 왕국의 왕들만을 가지고 순서를 말할 때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 다윗 왕조에 있어서 히스기야가 몇 번째 왕이냐고 질문을 한다면 정답은 15번째 왕입니다. 그 이유는 다윗 왕조의 초대 왕인 다윗(bc1,010-970)과 2대 왕인 솔로몬(bc970-930)의 통일왕국시대를 합하여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침입으로 유다 왕국의 운명이 꺼져가는 심지와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갇혀서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에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날아듭니다. 그토록 기대하고 있었던 애굽의 원군이 엘라 골짜기 립나 전투에서 산헤립 황제에게 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에 빠진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눈물로 호소를 합니다. 오만한 적을 쳐부수시고 부디 예루살렘 성을 구원해달라는 것입니다(사37:14-19).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나 그의 신하들을 위하여 구원해주신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오로지 산헤립 황제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그를 처벌하여 수치스럽게 본국으로 물러가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사37:34-35a). 그리고 이스라엘 제국의 대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종으로서의 법도를 지켰던 다윗을 생각하여 이번에 예루살렘 성을 구원해준다는 계시의 말씀입니다(사37:35b).
예언의 말씀이 히스기야의 눈앞에서 바로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의 천사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던 적군 18만 5천명이 전멸을 당한 것입니다(사37:36). 그 소식을 전해 듣자 라기스에 주둔하고 있던 산헤립 황제의 중앙군은 모두 철군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제 크게 두 가지 문제가 남게 됩니다. 하나는 전후의 복구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앗수르가 니느웨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그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라고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3년 만에 국토의 생산력이 정상으로 회복이 되고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도록 해주겠다”(사37:30-32), “오만한 산헤립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예루살렘을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사37:29, 33-34).
그렇지만 전국적으로 전란으로 무너진 성읍을 다시 복구하고 군사시설을 다시 건설한다고 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이 그 일에 전념하고 있을 때에 그만 히스기야 왕이 중병으로 드러눕게 되고 맙니다(사38:1a). 위독한 상태가 되자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다음과 같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너(히스기야)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사38:1b).
일반적으로 유다 왕국의 역사에 있어서 히스기야 왕이 성군의 한 사람이며 하나님신앙을 바로 세운 종교개혁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앗수르의 침략에 대처하고 있는 그의 정책결정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미 여러 번 강해를 통하여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국난을 극복한 왕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모든 방법과 계략이 전부 허사가 되고 나자 비로소 부끄러운 모습으로 하나님께 매어 달린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내하시고 히스기야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극적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히스기야가 앞으로 하나님의 종 다윗처럼 충성할 것으로 믿고서 예루살렘 성을 신위적인 방법으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사37:35-36).
그와 같은 창조주 하나님의 견인(堅忍, 참고 인내하심)과 구원에 대한 열망을 히스기야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인생이지만 마지막으로 소원 하나를 다시 눈물로써 아뢰고 있습니다; “저의 하나님신앙이 부족함을 보시고 이사야를 통하여 제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에 제가 진심으로 백성을 구하고자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던 그 기도를 기억해주십시오. 그리고 제사장나라의 복구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것밖에는 더 내세울 것도 없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사38:3a의역). 그 다음에 터져 나오고 있는 히스기야의 통곡은 죽음을 목전에 둔 죄인의 회개와도 같습니다(사38:3b).
히스기야가 예루살렘 성의 종말과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 두 번 기도하고 있는 그 대목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그것은 별로 내 세울 것이 없는 인생이 마지막으로 창조주의 관용과 자비를 구하고 있는 명장면입니다. 그와 같은 기도와 통곡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습니다(사37:34-35, 38:4-6). 특히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히스기야는 운신하여 성전에도 나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벽을 향하고 앉아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사38:2-3). 그 모습은 제사장나라의 왕의 모습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일개 필부의 모습과 진배가 없습니다.
여기서 히스기야가 ‘선한 행위’(사38:3)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헌신적인 삶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소극적인 의미의 ‘선한 행위’입니다. 구체적으로, 외적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또는 죽을 병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살 길을 열어주실 수 있는 분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심을 고백하면서 매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려주시면 제사장나라를 복구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하는 결심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응답이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다시 전달이 되고 있습니다; “(4)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15년을 더하고, (6)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7)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 (8)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10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10도를 물러 가니라”(사38:4-8).
하나님 답변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지 구절을 세밀하게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사38:4); 눈물로 죽어가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자가 히스기야입니다. 그런데 그 눈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직접 히스기야에게 들려오지를 않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귀에 대신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비록 왕이지만 히스기야를 하나님께서 직접 상대하시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러한 것일까요? 그것은 히스기야가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약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제사장나라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깊이 묵상하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방법에 너무 의존하여 살아가게 되면 히스기야 왕처럼 기도의 응답을 직접 듣지도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와 같이 말씀에 풍성하고 하나님의 영에 민감한 선지자의 존재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15년을 더하고”(사38:5);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임종을 앞두고 하나님께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다시 한번 제사장나라의 재건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매어 달리는 그 기도를 물리치시지 않으신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한 눈물의 기도가 나올 때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신 하나님의 견인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임종을 앞두고 궁중목사를 불러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인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제 마음대로 한 세상을 원 없이 살다가 죽기 얼마 전에 아주 효율적으로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한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경우를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히스기야의 경우에는 죽을 병을 낫게 하고 하나님께서 앞으로 15년을 더 살게 하면서 전후 유다 왕국의 복구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죽게 하는 것보다는 그 정도의 일을 더 하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덤으로 주어지고 있는 그 15년의 세월을 지나온 세월보다 더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히스기야의 경우에는 그러하지를 못하다고 하는 것이 진한 아쉬움으로 훗날 남게 됩니다(사39:8, 바벨론 사절에게 국가기밀을 자랑함, 왕하21:2-13, 아들 므낫세를 잘못 키워 왕국멸망의 원인을 제공함).
셋째로,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사38:6); 산헤립 황제가 혼비백산하여 니느웨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는 군사를 다시 양성하여 유다와 블레셋을 완전 정벌하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은 전후 복구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군비를 확충하고 국방에 만전을 기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작은 나라가 큰 제국 앗수르의 침략을 다시 막아낸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 왕의 대성통곡과 눈물의 기도 가운데에는 앗수르의 재침이 없도록 부디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해주시고 끝까지 유다 왕국을 지켜달라고 하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에 따라 하나님의 응답이 구체적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앗수르가 다시는 유다 왕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조치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사38:6). 그 약속이 역사 가운데 성취가 되고 있습니다.
넷째로,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사38:7); 히스기야 왕의 수명을 15년 연장시켜주고 유다 왕국을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끝까지 보호해주는 것 그 두 가지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뜻 보면,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바로 의지하는 하나님신앙의 핵심입니다.
약간 다른 각도의 질문을 가지고 한번 더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의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다음 두 가지를 위해서라고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첫째, 히스기야처럼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자라고 하더라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며 눈물로써 간구한다면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눈물의 기도를 보시고 살려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참고 기다리시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이 세상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2) 둘째,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유다 왕국을 구원해달라는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끝까지 들어주십니다. 그 후의 앗수르와 유다의 역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약속하신 예언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역사 가운데 그대로 성취하고 계십니다.
(3) 그 약속 덕분에 훗날의 역사 가운데 신기한 일이 발생합니다. 산헤립이 재침을 준비하다가 주전 681년에 어이없이 아들들의 칼에 암살이 되고 맙니다(왕하19:37, 사37:36). 그리고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황제가 되자 주전 671년경 애굽의 절반을 정복하면서도 유다 왕국에 손을 대지 아니한 것입니다. 일설에서는 유다 왕 므낫세를 잡아갔다고도 하지만 신빙성이 거의 없는 설이라고 하겠습니다.
(4) 본문의 예언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유다 왕국이 결코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지 않습니다. 마치 그 옛날 세겜에서 벧엘로 탈출하고 있는 야곱 일행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보호하시므로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전혀 공격을 할 수 없었던 일과 꼭 같습니다(창34:30, 35:5). 역사적으로, 유다 왕국이 망한 것은 히스기야 왕이 기도의 응답을 받은 때로부터 115년이 지난 후입니다. 앗수르 제국이 먼저 망하고 유다 왕국은 그 후 신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황제에 의하여 주전 586년에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10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10도를 물러 가니라”(사38:8). 창조주 하나님께서 천하의 피조물들에게 삶의 주기를 부여하시고 있습니다(창1:14). 그것은 공장에서 제품이 나오게 되면 사용연한이 정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주기와 연한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피조 세계에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출생과 성장 그리고 쇠퇴와 사멸의 과정을 일직선으로 밟고 있습니다. 그 일직선적인 흐름을 시간의 개념으로 측정하며 인식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 자연적인 흐름을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해시계의 바늘을 뒤로 돌린다고 하더라도 그 실체가 되고 있는 자연의 흐름 자체를 시계바늘처럼 변화시키지 아니하면 그것은 눈가림인 허상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자신의 의도와 능력에 의하여 그 자연의 흐름이 잠시 역진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사38:8).
구체적으로, 아하스 왕 때에 만든 해시계를 뒤로 10도 물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그 해시계가 그림자와 더불어 10도 후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자만 뒤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현상과 그 흐름이 역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늙어가던 것이 도리어 젊어지고 있습니다. 죽어가던 것이 오히려 살아나고 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가 회춘하여 이삭을 생산하는 것과 같습니다(창21:1-7).
그것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죽음 다음에 부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시계를 후진시켜서 영원히 살게 하는 세상으로 휴거시킬 수도 있는 능력이 창조주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대목으로 보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을 훗날 그리스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마르다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6).
결론적으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눈물의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다리시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히스기야는 비록 제사장나라의 왕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신앙적인 삶을 일관되게 살아간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앗수르의 침략으로 유다 왕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 세상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얻고자 무척 노력했던 왕입니다. 하지만 크게 의지하고 있었던 애굽의 원군이 산헤립 황제의 뛰어난 전략으로 말미암아 패퇴하게 됩니다. 이제는 예루살렘 성이 멸망을 당할 운명입니다. 그때 가서야 히스기야 왕이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매어 달립니다. 그러나 그 때늦은 기도에도 응답하여 예루살렘 성을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해에 히스기야가 죽을 병이 들었습니다. 마침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예언이 전해져 왔습니다. 유언이나 남기고 평안히 눈을 감으라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히스기야는 일어나 앉아서 벽을 바라보고서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예루살렘 성을 구원해달라고 진심으로 매어 달리고 또 전후 복구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자신을 죽음의 병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간구는 어느 사이에 대성통곡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십니다. 15년 수명 연장과 더불어 유다 왕국에 대한 강력한 보호하심을 약속하십니다. 앗수르가 결코 유다 왕국을 정벌하지 못할 것이라고 언약을 주십니다. 그 말씀 그대로 히스기야가 15년을 더 살게 됩니다. 그리고 유다 왕국보다 역사적으로 앗수르 제국이 더 먼저 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최후의 눈물의 기도와 회개에 맛을 들인 히스기야 왕의 하나님신앙이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덤으로 주신 15년의 세월을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게 사용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구원을 받은 것이 자신의 기도 덕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위업과 왕국의 영광을 바벨론 사절들에게 자랑하다가 그만 무기고와 보물창고까지 공개하는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더 기가 막힌 일은 3년 후에 왕자 므낫세를 얻지만 왕자교육에 실패합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신앙과 선한 청지기 정치의 모범을 전혀 보여주지를 못했기에 므낫세 왕이 훗날 제사장나라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고 맙니다(왕하21:1-16).
그러므로 히스기야 왕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얻는데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기본적으로, 참된 성도는 그리스도처럼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가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거듭난 자이며 또한 성도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마치 히스기야처럼 목숨연장을 덤으로 받아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청지기답게 귀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그 삶이 너무나 보기에 좋아서 하나님께서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더 많은 사역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칭찬을 모두들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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