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73강(사39: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1월 30일(월)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은 누구이며 왜 유다 왕 히스기야에서 호의를 보이고 있는가?(사37:8, 38:6, 39:1-2)
첫째로, 앗수르 제국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시기에 본문에서 느닷없이 바벨론 왕국의 친선사절이 독자적으로 유다 왕국을 방문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사39:1-2). 그 당시 히스기야의 유다 왕국은 앗수르 제국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앗수르 제국의 영향하에 있는 바벨론 왕국에서 히스기야 왕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절을 파견할 수가 있을까요? 그 역사적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하여 먼저 당시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왕국 사이의 국제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주전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 황제가 예루살렘 성에서 많은 군사를 잃어버리고 왕도 니느웨로 되돌아갑니다(사37:36-37). 그러자 앗수르 제국의 군사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는 갈대아 인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갈대아 족속의 새 지도자 무셰지브 말둑이 바벨론을 점령합니다.
(2) 주전 689년 산헤립 황제가 바벨론을 포위 공격하여 탈환할 때까지 바벨론 왕국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전 686년에 서거하게 되는 히스기야 왕의 재임기간 중에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의 친선사절이 유다 왕국을 방문할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사39:1).
(3) 산헤립 황제가 바벨론을 다시 점령하기 위하여 9개월 동안 치열하게 전투를 벌입니다. 그는 그 보복으로 바벨론 갈대아 인들의 신전을 파괴하고 그들의 주신 말둑의 신상까지 부수어버립니다. 그때부터 갈대아 인들은 바벨론을 되찾고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칼을 갈게 됩니다. 그 결과 주전 612년 갈대아 왕조의 신바벨론에 의하여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가 점령을 당하고 7년 후에 완전히 제국이 사라지게 됩니다.
둘째로, 산헤립 황제가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잠시 앗수르 제국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바벨론을 점령하고 있는 갈대아 인들의 왕조는 무척 불안합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힘이 미치지 아니하고 있는 여러 왕국에 친선사절을 많이 파견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남조 유다 왕국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곧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딘의 사절입니다(사39:1, 왕하20:12-13).
그 사절의 공식적인 목적은 유다 왕 히스기야가 중병이 들었다고 하므로 병문안을 온 것입니다. 그냥 오지를 아니하고 바벨론 왕이 위로의 친서와 함께 예물을 챙겨서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군사력이 증강이 되면 자연히 이웃해있는 바벨론 왕국 그리고 크게 한이 맺혀있는 유다 왕국을 다시 침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전에 양국간에 친선을 강화하고 앗수르 제국의 예상되는 침략에 대하여 공동으로 대응하자는 것입니다.
셋째로, 히스기야 왕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매우 흡족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호의적입니다. 바벨론 왕의 사자들에 대하여 극진한 대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 하나 감추지 아니하고 국가의 기밀까지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국의 무기고에 비치가 되어 있는 병기들 그리고 심지어는 나라의 보물창고까지 공개하여 보여준 것입니다(사39:2, 왕하20:13). 그 뜻은 좋게 생각하자면 그 만큼 국가적인 기밀까지 공개하고 공유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국간에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일종의 제안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1) 첫째, 히스기야 왕이 바벨론 왕의 사절을 예루살렘에 보내주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와 그 의도를 전혀 살피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던 앗수르 군 18만 5천 명을 쳐부순 바가 있습니다(사37:36). 그리고 다시는 그들이 유다 왕국을 침략할 수 없도록 역사를 섭리하시겠다고 이사야를 통하여 히스기야 왕에게 예언의 말씀을 전해준 바가 있습니다(사38:6). 그러므로 바벨론 왕의 친선사절이 유다에 온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일환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히스기야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 다시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에 관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서 바벨론 사절들을 접대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어떠한 절차도 밟지 아니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아무리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기밀에 대해서 함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굉장히 경솔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는 국가의 재력이나 무력으로 국가의 안전보장을 충분히 유지할 수가 있다고 하는 자만심이 그 속에 숨어 있습니다. 보통의 일반국가들이 세상적인 안목에서 그렇게 처신할 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나라의 주인이며 안보의 근본으로 모시고 있는 제사장나라에서는 그것은 크게 불경스러운 사상의 발로입니다. 요컨대, 히스기야가 다시 세상적인 함정에 빠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제38장과 제39장의 차이를 가지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큰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죽음의 골짜기에 내던져진 히스기야 왕이 벽을 향하고 앉아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장면이 제38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죽을 병이 낫고 15년 목숨연장을 얻게 된 히스기야 왕이 제39장에 들어서게 되면 다시 옛날의 세상적인 왕으로 처신을 하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살피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강대국 앗수르의 재침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지를 예언의 말씀과 관련하여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한다면 히스기야 왕이 바벨론 왕의 사절을 접대하는 스타일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국가안보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서 그 사실을 먼저 사절들에게 전하면서 양국간의 친선관계를 돈독히 하자고 제의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에게서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차제에 바벨론의 사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유다 왕국의 부와 국방력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히스기야 왕 자신의 위신을 한껏 높여놓고서 바벨론과의 동맹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합니다. 그와 같은 자랑과 허세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입니다. 훗날 바벨론이 제국이 되는 날 그들의 침략만 초래할 뿐입니다(왕하25:1-7). 따라서 허세와 자랑이라는 거품을 빼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이 요청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신앙생활에 전념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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