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75강(사40: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2월 2일(수)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와 같은 이기적인 신앙인이 겪고 있는 삼중고(三重苦, 노역과 죄와 벌)가 장차 하나님의 은혜로 끝나게 되는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알고서 미리 동족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다(사40:1-2).
이사야의 기록인 그의 선지서 제36-39장은 역사서 특히 열왕기하 제18장 제13절부터 제20장 제19절까지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그것은 다같이 히스기야 왕 시절의 국난과 그 극복과정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다음에 바로 오늘의 본문말씀 제40장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그와 같은 순서로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먼저 알아보고서 그 다음에 본문말씀의 뜻을 풀이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사야는 선지자로 활동을 하면서 계속 한 가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처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자신에게 계시하신 그 이상한 말씀의 의미입니다(사6:9-13). 그 뜻을 이사야는 국난을 극복하고 또한 그 다음에 타락하고 있는 히스기야 왕의 변화무쌍한 신앙태도의 변화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깨닫고 있습니다;
(1) 이사야는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사람이며 그의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하도록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인물입니다(사1:1, 2:1, 6:8-9). 그가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예언의 말씀을 위탁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참으로 이상한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그가 전하게 되는 말씀을 동족들인 선민들이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사6:9-10).
(2) 그렇다면 메시아의 오심과 관련이 되어 있는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사7:14, 9:6-7, 11:1-12, 19:20-25, 35:5-10, 42:1-4, 53:2-12, 61:1-6) 선민 유대인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배척을 하게 된다는 결론입니다. 그것은 영생의 구원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때가 되어야 유대인들이 하나님말씀의 정확한 뜻을 깨닫고서 메시아의 나라에 참여를 하게 된다는 것일까요?”(사6:11). 그것은 한 마디로, 그들의 나라가 망하고 유민이 되어 온 세상에 떠돌다가 그 가운데 일부 남은 자들이 메시아의 복음 가운데서 하나님신앙의 뿌리를 다시 발견하게 되는 때라고 계시가 되고 있습니다(사6:11-13).
(3) 참고로, 사도 바울의 기록에 따르게 되면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배척하게 됨으로써 복음사상이 이방 땅으로 넘어가게 됩니다(롬11:11). 이방인들이 회개하고서 그리스도에게 먼저 돌아오고 나서 나중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롬11:12, 25-27). 그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비로소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건설이 되는 메시아의 나라가 훗날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고전15:24).
(4) 이사야는 주전 701년경 히스기야 왕 14년에 예루살렘 성에서 발생하고 있는 기이한 일을 통하여 그가 묵상하고 있는 바 하나님의 이상한 계시의 말씀에 대한 해답을 다음과 같이 어느 정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 앗수르 황제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유다 왕국으로 쳐들어 왔을 때 히스기야 왕은 온갖 세상적인 방법과 지혜로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맙니다. 완전한 절망에 빠진 히스기야 왕이 성전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욕보이고 있는 산헤립 황제를 징계하시고 부디 예루살렘 성을 구원해달라는 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늦은 기도에도 긍정적으로 응답해주십니다(사37:34-37).
2) 그리고 히스기야 왕이 갑자기 중병이 들어서 임종상태에 들어갑니다. 이사야를 통하여 히스기야 왕의 운명이 다했다고 하는 예언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그때 병상에서 몸을 일으키고 히스기야 왕이 벽을 향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사38:1-3).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일찍이 예루살렘 성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자신을 버리지 마시고 부디 살려달라는 간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지 히스기야의 운명을 바꾸어서 15년을 더 살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십니다(사38:5-6).
3) 그 두 가지의 기적을 바라본 이사야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의 법칙을 깨어가면서까지(사38:8) 두 차례나 왕의 생명과 그 나라를 구해주었으니 히스기야 왕이야 말로 이제부터 위대한 하나님신앙을 보여줄 군주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마도 히스기야 왕이 그 옛날 다윗 대왕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지 않을까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4) 그러나 현실을 그렇지가 못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기대는 철저하게 배신을 당하고 맙니다. 히스기야 왕이 너무나 쉽게 하나님말씀을 버리고 또한 너무나 빠르게 하나님신앙을 떠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는 멀리 바벨론에서 온 친선사절을 접대하면서 유다 왕국의 재력과 군사력을 자랑하기에 바쁩니다(사39:2).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루살렘 성이 구원을 받고 유다 왕국이 재건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모든 것이 자신의 공로라고 선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실망한 이사야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심각하게 히스기야 왕에게 전달을 해줍니다; “머지않아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그의 자손들이 강대국의 환관이 되고 말 것이라고 상세하게 말해줍니다”(사39:7). 하지만 히스기야 왕은 요지부동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거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무병장수할 수 있다는 그 생각에 만족을 하고 맙니다(사39:8).
(5)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현세적인 구원과 이기적인 기복신앙에 함몰이 되어버린 히스기야 왕을 바라보고서 더 이상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역사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중단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다른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은 죽을 병에서 나음을 입고 15년 수명연장을 얻게 된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에 대하여 찬양을 하고 있는 깨달음의 노래입니다(사38:9-20).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잊어버렸지만 과거 그의 깨달음의 노래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가지고 이제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6)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큰 고통 다음에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사38:17a). 둘째, 주님께서 내 모든 죄를 사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사38:17b). 셋째,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영생을 주시는 그 구원에 대하여 찬양할 따름입니다(사38:20)”. 이 세 가지가 제40장 본문에서 용어를 달리 사용하여 다시 등장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7) 따라서 이사야는 이제 오로지 메시아의 오심과 장차 메시아가 선포할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메시아가 건설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 가운데 자신의 동족인 선민들이 참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사야의 소원이 제40장 첫머리에서부터 진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의 신앙의 태도를 바라보고서 그것이 바로 유다 왕국 신하들과 백성들의 하나님신앙의 모습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백성들은 착하고 의로운데 최고권력자가 잘못되어 있거나 부족하기 짝이 없다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또는 힘없는 대중들은 억울하게 항상 착취를 당하고 살고 있으며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가지기 위하여 부정부패와 강압을 일삼고 있다고 쉽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사회적인 의식과 문화 그리고 제도운영의 측면을 다 함께 고려해서 생각을 해본다면 그것은 앞뒤가 덜 맞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한 마디로, 사회적으로 국민들의 수준이 곧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지도자의 수준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두들 비슷한 수준에서 그와 같은 문화를 가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히스기야 시대 유대 백성들의 하나님신앙의 현주소가 바로 히스기야 왕의 신앙행태와 같다고 충분히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예루살렘 성의 백성들에게 외치고 있는 말씀은 그 자체 히스기야 왕을 포함하는 모든 선민들에게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적용의 폭을 넓혀보자면,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나 신앙심을 별로 찾아볼 수가 없는 이방인들에게도 장차 적용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에 의하여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이제부터 그 깊은 의미를 각 구절을 살피면서 묵상을 통하여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셋째로,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여기서 ‘위로’라고 하는 것은 큰 슬픔을 당한 자의 마음을 달래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큰 슬픔을 당하게 될 것임을 먼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슬픔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멀리 가서 찾아보지 아니해도 됩니다. 바로 앞장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가 되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모든 것이 약탈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인질로 끌려가고 왕의 자손이라고 하더라도 장차 이국 땅에서 원수의 종으로 살게 될 것이다”(사39:6-7 의역).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히스기야 왕이 두 번이나 자신과 나라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서도 배은망덕하게 남은 인생을 타락된 모습으로 살게 될 때에 그 자손들과 그의 백성들이 훗날에 당하게 되는 고통과 슬픔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배은망덕(背恩忘德, 은혜를 저버리고 베풀어준 구원의 사실조차 잊어버림)한 인생을 살게 되면 장차 그러한 슬픔을 당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스스로 위로함을 얻고 또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가 있을 것임을 전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얻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사40:1). 도대체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다음 제2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a)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b)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c)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사40:2); 장차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오는 크신 위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원수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운명을 해방과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구주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실 것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사9:6-7, 11:1-16). 그와 같은 의미에서 각 구절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사40:2a); 참된 구원이란 마음속에서부터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구원이란 마음속에서부터 확신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확신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어느 민족보다도 자신의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이 먼저 회개하고 구원을 얻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백성들의) 마음’(사40:2a)이라고 먼저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사40:2b); 힘든 노예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때가 되었으며 죄인의 신분에서도 벗어나게 된다고 하는 좋은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의 기쁜 소식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게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조금 더 살펴봅니다;
1) 선민들의 입장에서는 유다 왕국이 망하고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 이방 땅에서 살게 되는 그것이 노역의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시고 해방을 시켜줍니다. 그러면 고국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고 다시 믿음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세상에서 육체 가운데 갇혀서 육신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자체가 노역의 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 가운데 구원주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 노역의 때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이 세상의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3) 죄의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해방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죄의 결과가 사망이기 때문에 죄에서 사함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은 사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메시아가 대속의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입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죄 사함입니다.
(3)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사40:2c); 벌을 배나 받게 되었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1) 그것은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두 사람이 벌을 받았다고 하는 의미와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나 자신이 고통 가운데서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께서 또 나의 죄를 지시고 그 벌을 대신 받고 있습니다.
2) 하나님 앞에 죄를 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 죄를 바로 회개하고 벌을 청하면 그 한번으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한번 용서를 받고 나서도 또 재범을 합니다. 그러면 가중처벌이 됩니다. 그렇게 잘못을 반복하여 짓고 있는 자들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온전히 구원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그 비상한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요?
3) 그것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메시아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을 얻게 함으로써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도록 만드는 방법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메시아의 운명과 성도의 운명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작업입니다. 스승과 제자 그리고 주인과 종을 하나로 묶고 공동운명체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4) 참고로 그 대목을 적어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4-5).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동족인 유대인들이나 히스기야 왕의 하나님신앙의 현주소를 쳐다볼 때에는 가슴이 답답하고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급하게 되어 다 죽게 되면 그때서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매어 달립니다. 그러나 막상 목숨을 구해주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입니다. 또 남은 세월을 제 마음대로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단의 조치를 앙망하고 있습니다. 장차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게 되면 예루살렘 백성들을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제멋대로 살 수 없도록 아예 메시아와 공동운명체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세상의 노예로 살고 있는 그 현장에 메시아께서 들어가셔서 노역이 끝났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운신을 못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그 죄가 메시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충분한 벌을 배나 받게 되었다고 가르쳐줄 것입니다. 종의 벌을 주인이 함께 받고 있으니 배나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그 은혜가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사야가 그의 동족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안주하여 살고 있는 죄인들이 징벌의 슬픔에서 벗어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복된 소식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이 세상에서 죄와 사망에 종 노릇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위로 곧 진정한 해방의 메시지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의 소망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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