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76강(사40:3-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2월 3일(목)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히스기야와 같은 삶인가? 아니면 아브라함과 같은 삶인가? (창12:1-4, 사40:3-5)
주전 701년 히스기야 왕 14년에 메소포타미아의 패권국 앗수르 제국의 황제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유다 왕국을 침입해오자 다윗 왕조는 멸망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은 졸지에 예루살렘 성에 갇힌 채 국면의 전환을 위하여 애굽에 원군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산헤립 황제의 뛰어난 지략과 용맹 앞에 애굽의 군대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절망에 사로잡힙니다. 예루살렘 성과 선민의 멸망을 직감하면서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께 매어 달립니다(사37:14-20). 그러자 놀라운 기적이 발생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구원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사37:34-37).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갑자기 히스기야 왕이 중병에 걸리고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운명이 다 되었다고 예고를 해주시고 있습니다(사38:1). 보통사람 같으면 조용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앗수르의 대군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 성을 구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력을 경험한 바가 있는 히스기야입니다. 따라서 바랄 수 없는 소원을 통곡으로 아뢰게 됩니다. 죽을 병에서 낫게 해주시고 목숨을 연장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이치와 운명의 법칙을 어겨가면서까지 히스기야 왕의 기도에 긍정적으로 응답해주십니다(사38:4-5)
그 두 가지 놀라운 간구와 기적을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바라본 선지자 이사야는 가슴이 뛰고 있습니다. 혹시 히스기야 왕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놀랄 정도입니다(요1:19-20). 하지만 그 다음 덤으로 15년을 더 살게 되는 히스기야 왕의 행동은 이사야를 너무나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생활태도이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남은 인생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의 태도가 전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정반대입니다. 그는 자신이 죽기살기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왔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또 기도하면 나라의 구원과 백성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엄청난 착각입니다. 주인을 종으로 취급하고 어느 사이에 자신이 하나님을 하인으로 부리고 있는 주인인 셈입니다. 요컨대,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기도나 들어주는 하나의 우상으로 여기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상문화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평생 청지기의 입장에서 하나님신앙의 모범을 보여야만 하는 제사장나라의 왕 히스기야가 남은 인생 가운데 자신의 사명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를 살려주고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을 구해주었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잊어버리고서 제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히스기야는 그저 남은 인생 가운데 예루살렘 성에서 나라를 구한 왕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세상적인 영광을 실컷 누리고 가면 그만이라고 하는 지극히 현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신앙인의 모습만을 이사야에게 보여주고 마는 것입니다(사39:8).
이에 따라 절망에 사로잡힌 이사야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히스기야 왕을 비롯한 자신의 동족들을 구원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그의 간구에 대한 응답이(사40:1) 본문을 비롯한 제40장이하의 기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그와 같은 관점에서 각 구절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b)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c)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40:3); 여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이사야와 같은 하나님의 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사40:3a).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선지자들입니다(사1:2, 6:8-9, 겔2:4-5). 그리고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는 세례 요한입니다(요1:23). 나아가서 신약에서는 메시아와 그의 제자들입니다(마4:17, 행2:14). 그들이 모두 하나님신앙을 올바르게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세상사람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세상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는 말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구절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사40:3b);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자면 우선적으로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1)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먼저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창12:1). 히스기야 왕을 비롯한 예루살렘 성의 주민들은 그들의 도성을 떠나야만 합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천년만년 온갖 종교적인 혜택을 누리며 편안하게 한평생 살고자 하는 생각을 접어야만 합니다.
2) 그래서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로 나왔을 때에(출12:37-51) 비로서 인생과 생활의 절대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출13:20-22).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없으면 먹고 자고 마시고 걷는 그 모든 일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신8:15-16).
3)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켜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우상이 가득한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십니다. 그들의 사명은 그 옛날 아브라함의 사명과 같습니다(창12:1-4). 하나님의 말씀을 원주민들에게 전하고 하나님의 선지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행위’입니다(사40:3b).
(2)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40:3c); 중근동에서 고대문명이 꽃을 피우고 있는 곳은 큰 강의 유역들입니다. 곧 두 강이 만나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애굽의 나일강 삼각주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 두 지역을 잇고 있는 대상들의 길은 사막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막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사막은 물이 적어서 동식물이 살기가 힘든 곳입니다; 그러므로 두 개의 문명권이 서로 교류가 적습니다. 그 결과 서로 좋은 관계가 형성이 되지 않습니다. 혹시 다른 문명권으로 이주를 하게 되면 아예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서로 ‘부정을 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붙어 있는 차별적인 용어가 사실은 ‘히브리인’입니다(창14:13). 히브리인은 떠돌이이며 다른 문명권에서 살 곳을 찾아서 온 이주민입니다. 그들은 열등한 다른 문화와 종교를 지니고 있다고 일단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주민들이 함께 식사를 하거나 상종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잘못된 누룩처럼 오염의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창43:32, 46:34).
2) 사막에서는 사람들이 살기가 힘들어서 남의 것을 서로 약탈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말렉 족속이 대표적입니다(출17:8). 몽골의 유목민들에게서도 약탈식 정복문화가 남아 있음을 역사적으로 엿볼 수가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막은 그러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막을 건너서 다른 나라를 침략합니다. 그것은 침략의 길이 바로 사막이라는 의미입니다.
3) 어떻게 하면 사막을 하나님의 대로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한 마디로, 사막을 건너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는 통로로 삼아야만 합니다. 주후 7세기 이후의 회교도들처럼 칼과 코란을 들고서 정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막을 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십자가와 성경을 들고서 사막을 건너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선함 만으로써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제19장에서 메시아가 오시면 복음의 대로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막에 건설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사19:23-25).
둘째로, “(a)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b)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c)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40:4); 각 구절이 약간씩 다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1)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사40:4a); 예루살렘 성은 천혜적인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왜냐하면, 해발 780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면이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로 둘러싸여있기 때문입니다.
1) 그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지하수로를 건설하여 성 밖의 물을 끌어들인 다음에 오랜 기간 수성(守城)작전을 전개한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적들이 물러가자 다시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 그리고 도성의 백성들은 철옹성 예루살렘 성안에서 안전하고도 행복한 세월을 보내고자 염원하고 있습니다.
2)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그러한 예루살렘 성의 안이하고도 현세적인 신앙생활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유적으로, 골짜기를 높이고 산과 언덕을 깎아서 평탄하게 만들라고 합니다(사40:4a). 그것은 적들의 공격에 매우 취약한 도성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말씀하시는 뜻은 안전한 성에 틀어박혀서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서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을 전하는 자에게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만군의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3) 그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간 선지자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이 살아 있는 그들에게 평생 동안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시기를 너무나 좋아하십니다(출3:15, 마22:32). 물론 하나님의 기업도 그들에게 상속해주시는 것입니다(계21:6-7).
(2)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사40:4b);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는 참으로 고르지 아니한 곳입니다. 그만큼 사회적인 차별과 불공평함이 많습니다. 더구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등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모든 세상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도 선민들의 독점물이 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차별을 철폐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바로 잡으라고 하시는 말씀의 뜻입니다. 그와 같은 이사야의 예언은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더욱 구체적인 가르침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마5:1-20).
(3)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40:4c);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험한 길이고 또 하나는 평탄한 길입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어느 쪽일까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그것은 험한 길이며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마7:14). 그러므로 찾는 자가 적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평생 동안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극소수입니다.
1) 그렇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고 마는 것일까요? 모두가 평탄하고 넓은 길로 다니다가 영생의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일까요?
2) 이사야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험하고 좁은 그 길을 메시아가 끝까지 가게 되고 또 그의 제자들이 그 길을 따라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그 길은 넓어지고 큰 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가면서 생명의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사66:20-21, 계21:24-27).
3)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훗날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0-1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전15:22-23).
셋째로, “(a)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b)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40:5);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나타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사40:5a).
(1) 그것은 종말론적인 심판과 구원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먼 훗날 사도 요한이 마지막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그와 관련된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4-25),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2)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까지 모두 부활시켜서 심판대 앞에 세운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영생이냐 아니면 영벌이냐가 결정이 됩니다. 부활의 몸을 입는다고 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정확히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소멸하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 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받아 불 못 속으로 던져지게 되면 영원히 몸이 타는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눅16:24). 그것은 죽음과 소멸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형벌입니다.
(3) 반대로, 그 부활의 몸을 입고서 심판대를 ‘그대로 통과’(free pass)하여 영생으로 들어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시는 육신의 욕심에 지배를 받아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꺾임을 당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롬7:22-25).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며 섬기고자 하는 그 마음이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육체를 부활의 몸으로 입게 되었으니 그것이 영생의 기쁨입니다.
(4) 그와 같은 새로운 몸을 입고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그 영광을 영원히 찬양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사40:5a). 그것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아들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복음이 하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사40:5b). 창조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씀이므로 생명력과 창조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의 창조를 미리 바라보면서 이 말씀을 동족들에게 힘있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처럼 남은 인생을 안이하게 예루살렘 성에서 종교생활만을 영위하지 말라고 동족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와 사막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훈련을 받고서 살아갔는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평생 동안 이방인 지역을 떠돌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떠한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갔는지를 상기하라고 거듭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 의미를 새겨볼 수가 있습니다.
장차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만의 안전지대에 틀어박혀서 구약시대의 선민들처럼 안이하게 현세적인 복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육신과 공생애 그리고 복음선포의 삶과 대속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부활하여 새로운 육체를 입고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사40:5).
이사야의 예언은 신 구약을 관통하고 있는 놀라운 복음입니다. 메시아의 역할과 제자들의 삶을 미리 말해주고 있는 예언들입니다. 그러므로 차제에 본문의 뜻을 다양하게 음미하시면서 성도로서의 자신의 신앙생활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점검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귀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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