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78강(사40:12-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2월 5일(토)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과 그 위상에 대하여 이사야가 선민들에게 다시 설명을 하고 있는 이유(사40:12-17)
본문에서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상에 대하여 상세하게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모세오경에 이미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사야가 아까운 지면을 할애하여 동족들에게 다시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이사야가 메시아의 시대를 내다보면서 하나님과 메시아와의 관계에 대하여 미리 비유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모세오경을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선민들이 불행하게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정확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에 대하여 먼저 설명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가 이렇게 창조주의 위상과 그 권능에 대하여 핵심사항을 동족인 선민들에게 다시 설명해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민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천지만물의 유일한 창조주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서 마치 우상처럼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국의 왕인 히스기야의 신앙부터가 그러합니다.
(2) 유다 왕국의 백성들은 히스기야 왕이 기도하였더니(사37:14-20)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의 대군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 성과 유다 왕국을 구원해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사37:34-37). 또 히스기야 왕이 기도하였더니 불치병에서 고침을 받고 더구나 15년 목숨연장까지 받게 되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사38:1-8). 그러므로 형편이 위급하게 되면 히스기야 왕처럼 기도만 하면 만사가 형통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선민들의 소원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들어주어야만 합니다. 만약 들어주지 아니한다고 하면 이스라엘의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3) 본질적으로 우상이란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면, 그들의 현세적인 소원을 들어주도록 고안이 되어 있는 신적인 존재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그러한 목적으로 만든 도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이란 그를 신으로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항상 세상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적당한 명분을 제공해주고 또한 초월적인 능력으로 신적인 도움을 주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4) 그렇게 사람들의 입맛에 맞도록 형상화 해놓은 신이므로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우상이 별로 쓸모가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은 얼른 그것을 버리고 또 다른 신을 고안하여 만들어 세우고서 제사를 드리고 맙니다. 그렇게 ‘업그레이드’(upgrade)해나갈 수가 있으나 참으로 편리한 도구입니다.
(5) 그런데 문제는 선민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그렇게 하나의 우상으로 대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그리고 지극히 집단이기적인 소원 그것도 당장의 현세적인 이익만을 실현시켜주는 신으로 이해하고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특징이 무엇인지부터 이사야가 다시 설명을 해주지 아니하면 안 되는 실정입니다. 근본적으로 선민들의 하나님인식이 타락하여 비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의 영, 그리고 더불어 의논하고 있는 또 다른 위격을 시사하고 있는 이사야의 신묘한 글(사40:12-17)
이사야가 아까운 지면을 할애하여 동족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과 그 위상에 대하여 다시 설명을 해주고 있는 이유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선민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우상처럼 잘못 섬기고 있으므로 그 점을 바로잡아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사야가 메시아의 시대를 내다보면서 하나님과 메시아와의 관계에 대하여 미리 비유적으로나마 설명을 해주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그 깊은 의미를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b)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c)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d) 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사40:12);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1)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사40:12a); 흔히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 뜻은 사람이 그 작은 손으로 넓은 하늘을 가릴 수가 없듯이 사람의 약은 꾀와 속임수로 광명한 진리를 덮거나 진실을 가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1) 사람이 밀려오는 바닷물을 막기 위하여 그 작은 손바닥으로 밀어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극히 일부분의 파도를 잠시 막을 수 있을 뿐 그 나머지 전부가 넘쳐흘러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그렇게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가리고 또 그 옆을 가려가면서 한번 그 물의 양을 재려고 시도할지라도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손바닥은 결코 창조주가 만든 세계의 광대함을 계측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사40:12b); 사람이 손가락을 활짝 펴서 엄지와 검지로 한 뼘 한 뼘씩 하늘의 크기를 재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늘로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혹시 날개를 만들어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태양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공위성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죽기 전에 도달할 수 있는 하늘이 굉장히 제한적입니다. 전체 하늘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측정은 영이신 하나님만이 가능하십니다.
(3)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사40:12c); 여기서 ‘되’는 부피를 재는 도구입니다. 땅은 수많은 티끌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 부피를 재기 위하여 사람이 ‘되’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티끌을 모두 담아서 잴 수가 없습니다. 티끌의 양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하나님만이 가능한 부피의 측정입니다.
(4) “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사40:12d); 고대사회에서 넓이를 재기 위하여 손바닥, 길이를 재기 위하여 손의 뼘을 사용하고 있음을 위에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부피를 재기 위해서는 ‘되’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무게를 재기 위해서는 ‘저울’을 사용합니다. 그것도 두 가지 종류의 저울을 사용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접시저울과 막대저울입니다. 오늘날에도 그 두 가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1) 접시저울은 접시 위에 물건을 놓고서 그 무게가 얼마나 용수철을 누르는지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용수철이 눌려지는 만큼 저울의 바늘이 움직여지도록 장치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난히 무게를 측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막대저울은 추와 중심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물건을 매달고 다른 쪽에는 추를 매답니다. 그 다음에 그 중간에 줄을 매어서 그것을 사람이 위로 당깁니다. 물론 그 당기고 있는 줄을 막대에 이동을 시키면서 무게중심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심에서 이동한 거리를 가지고 그 무게를 잴 수가 있습니다. 기준이 되는 추의 무게에 이동거리를 곱하게 되면 무난히 물건의 무게가 계산이 되는 것입니다.
(5) 그런데 산과 언덕을 그러한 저울에 도저히 달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큰 저울을 만들 수도 없거니와 그것을 잴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이 애초에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구만큼 큰 인류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잊어먹고 있습니다. 사람의 두뇌와 과학의 힘으로 지구의 무게와 부피 그리고 하늘과 바다의 크기와 용량까지 모두 잴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6) 더구나 계측과 더불어 통제까지 가능하다고 착각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근본적으로, 이사야는 미약한 피조물이 마치 창조주가 된 듯이 뻐기고 있으니 그것이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여기서 창조주의 권능과 그 위대하심을 선민들에게 다시 한번 각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사40:13); 창세기 제1장을 보면, 제1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우주 바깥에 운행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두 구절을 합하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4:24). 그리고 그 역할을 분리해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된 세상을 하나님의 영이 감찰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피조된 세계에는 많은 천체가 운행을 하고 있으며 많은 동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의 영이 일일이 돌보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창조의 이치를 꿰뚫고 있으며 자연의 운행과 역사의 섭리까지 관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창조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에게 그 누가 지도와 편달을 베푼답시고 감히 선생처럼 행동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사40:13) 그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한 마디로 방자한 행동입니다.
셋째로, “(a)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였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b)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c)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사40:14); 여기서는 앞의 절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라는 인칭대명사를 더 자주 사용하고 있으며 ‘의논’, ‘정의’, ‘지식’, ‘통달’이라는 사회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영과는 다른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짐작해볼 수가 있습니다.
이미 선지자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 제7장에서 메시아의 탄생을, 제9장에서 메시아의 통치를, 제11장에서 메시아의 나라의 특징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구절은 선민들에게 메시아가 창조주의 위력을 다음과 같이 보여줄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1)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였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사40:14a); 메시아가 창조주의 신분으로 피조물인 사람들의 사회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사람들과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의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을 실천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그 문제에 관하여 메시아에게 교훈을 베풀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사40:14a).
(2)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사40:14b);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자기들 사회의 전통이나 관념이 옳다고 우기는 그것이 사실은 정의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정의는 아전인수격이며 집단이기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개념의 정의를 하나님의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메시아 앞에서 주장을 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사40:14b).
(3)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사40:14c); 사람들의 지식에 속하는 신학이나 교리로써 메시아가 전해주는 구원의 이치를 대신할 수가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장차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선민들은 그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미리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메시아에게 선민들의 율법적인 지식이나 유대교리에 의한 구원의 길이 더 맞는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사40:14c).
넷째로,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사40:15); 하나님이 만민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시는 메시아의 위상이 창조주의 그것과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앞에 서게 되면 열방이 큰 통속에 가득 담겨 있는 물 가운데 퍼낸 한 방울의 물과 같습니다. 그리고 땅의 모든 티끌을 달고 있는 저울에서 얻어낸 하나의 작은 티끌에 불과합니다. 먼 나라 섬들은 그 작은 티끌에서 흩날리는 먼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참으로 창조주의 권세를 가지신 메시아 앞에서는 티끌과 같은 미물이 바로 피조물인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사40:15).
다섯째로, “(a)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b)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사40:16); 이사야의 비유는 더욱 선민들에게 친근한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예루살렘 성전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지었다고 선민들이 자신들의 헌신과 희생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레바논 자체도 창조주 앞에서는 땔감으로도 부족한 것인데 레바논의 나무로 지었다고 하는 성전의 봉헌이 무슨 큰 생색거리가 될 것인가 하는 관점입니다(사40:16a). 그러므로 예배당이나 성당을 무지하게 화려하게 최상급으로 지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부끄러운 소치라고 하겠습니다.
더 도전적인 표현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가축을 번제로 드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제물로써 부족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사40:16b). 백성들의 죄는 태산과 같은데 기껏 가축의 일부를 드려서 번제를 드린다고 하여 그 죄가 다 사함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하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많은 제물을 바쳤다고 하는 자부심이 아닙니다. 사실은 너무나 부족하지만 부디 용서해달라고 간구하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 어린양을 메시아로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창22:13, 사53:5-7, 요1:29)이라고 미리 이사야가 동족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여섯째로, “(a)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b)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사40:17); 이사야가 마지막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1)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사40:17a);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나라와 민족이 아무 것도 아니며 별로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사40:17a). 사람들은 스스로 위대한 창조물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들의 지식의 성장과 체계화가 과학의 이름으로 특정분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경지를 건드리고 있다고 그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대망상입니다. 특히 선민들의 경우에는 교만이 더 심합니다. 창조주가 자신들의 성전에만 임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제물에 굉장히 감격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선민들 자신들이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도 드러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도구로 쓰임을 받는 종들이 오히려 주인을 능멸하고 있는 셈입니다.
(2)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사40:17b); 그와 같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교만하고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경고가 다음과 같이 정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9-10),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 한 마디로,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업신여기게 되면 그들을 없는 것같이 제거할 수가 있으며 그 나라를 빈 것처럼 버려버릴 수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사40:17b).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사람들이 성군(聖君, 거룩한 군주)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히스기야 왕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선민들의 하나님신앙이 형편없다고 질타를 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모르고 그저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제사와 기도를 통하여 그저 현세적인 소원성취와 형통의 복만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구원을 주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만민을 모두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선민들은 고의적으로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한 마디로, 제사장나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선민의 나라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이 결국은 멸망을 당하고 그 백성들이 유민이 되어 이방 땅으로 떠돌게 될 것입니다(신29:25-28). 이사야는 선지자로 세움을 받을 때부터 그 사실을 더 확실하게 이미 알고 있습니다(신29:25-28, 사6:11-13). 그렇지만 동족을 사랑하는 이사야는 그 마음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다시 한번 동족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과 위상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성령님, 그리고 메시아에 관한 사항이 모두 설명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에 관한 설명은 창세기 제1장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어 주시는 메시아가 하나님의 권위와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사야가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제7장, 제9장, 제11장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과 더불어 함께 본문의 내용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사야는 동족의 구원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비록 동족들의 행실과 믿음의 태도를 보면 확실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확률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메시아의 시대를 내다보면서 계속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미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예언을 동족들에게 계속 전하고 있는 이사야입니다. 저희들이 본받아야 할 선지자의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사야와 같은 깨달음 그리고 메시아를 앙망하며 그 이름으로 이웃과 동족의 구원을 간구하는 믿음이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야 강해 제180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8.13 |
---|---|
이사야 강해 제17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8.12 |
이사야 강해 제177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8.11 |
이사야 강해 제176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8.11 |
이사야 강해 제17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