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77강(사40:6-1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2월 4일(금)
이사야가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 두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사40:6-8)와 “하나님을 보라”의 차이에 대하여(사40:9-11)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대에서 하나님을 직접 보는 시대로 역사가 전개될 것임을 본문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지 각 구절을 살펴보면서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b)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사40:6); 여기서 ‘말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소리’는 선지자입니다. 언뜻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선포가 되고 있기 때문에 ‘말하는 자’가 마치 ‘선지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밀하게 그 내부관계를 묵상해보면 다음의 사실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1)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사40:6a); 선지자는 말씀의 주인이 아닙니다. 말씀의 종입니다. 곧 주인의 말을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마이크나 스피커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에게 선지자가 묻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외칠까요?”(사40:6a).
(2)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사40:6b);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고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아름다움은 그 풀에 한 시절 피어나는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사40:6b 의역). 조금 알기 쉽게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육신적인 삶을 살고 있으니 선민이라고 하는 너희들이 마치 풀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들판에서 나고 자라고 마르고 사라지는 풀과 무엇이 다른가?
2) 그 육신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서로 자랑하고 있으니 그것은 더 한심한 일이다. 풀보다 존속기간이 더 짧은 것이 꽃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한때 아름답게 피었다가 곧 사라지고 마는 것이니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될 것인가!
둘째로, “(a)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b)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40:7); 창세기 제2장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영적인 삶이 가능한 생령으로 만들고 계십니다(창2:7).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코를 맞대고서 영적인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군대를 막아내지 못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백성들을 구원해달라는 것입니다(사37:14-20). 그 동안 애굽 제국의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리며 성안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소망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사라졌으니 마지막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동안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있었기 때문에 죄송스러워서 그저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간주하고서 심히 모독하고 있는 저 앗수르의 황제 산헤립과 그의 군대를 징벌해달라는 내용의 기도입니다(사37:17). 그렇게 부족한 죄인의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물리치고서 예루살렘 성과 유다 왕국에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사37:34-37).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그 후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1)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사40:7a); 구원을 받은 이후에 히스기야 왕과 유다 백성들의 행동을 보니 도저히 창조주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며 그 말씀을 실천하는 성도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단이 다음과 같습니다;
1) 한평생 예루살렘 성내에서 선민으로서의 기득권을 누리며 잘 살다가 죽고 나면 그만이라고 하는 현세주의 기복신앙의 모습이 만연이 되어 있습니다(사39:6-8). 그것은 한 마디로, 육신적인 삶을 탐닉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탄식이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전달이 되고 있습니다(사40:7a).
2)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이 전달이 되지만 그러하지 못한 자에게는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기운이 그들의 육신적인 삶의 주기를 자연적인 법칙 그대로 주장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 풀은 마르고 꽃은 더 빨리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사40:7a).
(2)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40:7b); 히스기야 왕과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스스로 선민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세상에 자랑하고 있지만 그들의 신앙태도를 보니 그러하지를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들의 현세적이고도 육신적인 소원이나 들어주는 한갓 우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풀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사40:7b).
셋째로, “(a)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b)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40:8);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선민 유다 왕국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계십니다;
(1)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사40:8a); 계속 육신적인 삶에 탐닉을 하다가 풀과 같이 마르고 말 것인가? 세상적으로 누리는 영화와 육체적인 아름다움은 풀보다 더 빨리 사라지는 일장춘몽과 같을 것이다(사40:8a).
(2)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40:8b);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배우고 깨달아 실천함으로써 영생의 구원을 얻을 것인가? 이사야는 하나님 말씀의 영원성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현세적인 구원과 복에만 매달리지 말고 부디 하나님 말씀의 영원성을 깨닫고서 영생의 구원을 소망하라고 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사40:8b).
넷째로, “(a)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b)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c)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40:9); 여기서 ‘아름다운 소식’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며 곧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인 삶에 몰두하고 있는 선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지자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사40:9a); 무엇보다도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복음으로 유다의 백성들에게 전하기를 원하는 선지자는 먼저 높은 산에 올라가야만 한다고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그 옛날 모세처럼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직접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출19:3-6). 왜 그렇게 해야만 할까요? 다음 두 가지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영생의 구원을 줄 수 있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유일하신 창조주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면 실효성이 없다고 하겠습니다(신8:3, 마4:4).
2) 둘째, 창조주 하나님이 생기를 사람들의 코에 불어넣어주고 있습니다(창2:7). 따라서 선지자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옛날 에스겔 선지자처럼 사람들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말씀의 능력으로 불어넣어줄 수 있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가 되어야만 합니다(겔37:9-10).
(2)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사40:9b); 선민들이 아름다운 구원의 소식을 복음으로 전하는 선지자들을 환영할까요? 그렇지 않다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유대교리 선민사상과 다르기 때문에 거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복음을 계속 주장한다면 해치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두려워하지 말고 목소리를 높여서 유다의 백성들에게 힘써 외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사40:9b).
(3)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40:9c); 그러면 선민들이 그 아름다운 구원의 소식이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그 증거를 보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구원의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증명을 해줄 수가 있을까요? 이사야가 그 정답을 한 마디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입니다”(사40:9c 의역).
(4) 하나님을 직접 보여주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일찍이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일러주신 주의사항 그대로 피조물인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됩니다(출33:20). 그렇다면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까요? 그 방법이 바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시고 사람들과 함께 공생애를 사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또한 증거해주는 것입니다; “나(그리스도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5)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영적인 하나님을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보고서 그 교훈과 생애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 절정은 대속의 십자가 죽으심과 무덤 속의 부활사건입니다(마27:50-54). 창조주 하나님만이 선지자를 무덤에서 부활시켜서 하늘로 승천시킬 수가 있습니다(행2:32-33). 그 사건이 장차 역사 가운데 현실로 나타남으로써 비로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게 되는 영적인 삶이 이 세상에서도 제자들의 삶 속에서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이사야의 예언은 그 일이 발생하기 700년 전에 장래의 일을 예언하고 있는 진실로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섯째로, “(a)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b)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c) 보라, 상급(구원)이 그에게 있고 보응(심판)이 그의 앞에 있으며”(사40:10); ‘강한 자’는 세상을 이기는 자이며 세상의 권세를 쥐고 있는 악한 영들을 처벌하시는 자입니다(요12:31-32, 16:33). 앞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가 그러한 자일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대목입니다(사40:10a). 그리고 구체적인 두 가지의 예언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1)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사40:10b); 메시아가 죽음에서 부활하시게 되면 세상임금들이 쫓겨나게 됩니다(요12:31). 제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기 시작하며 그 나라를 그리스도가 직접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40:10b).
(2) “보라, 상급(구원)이 그에게 있고 보응(심판)이 그의 앞에 있으며”(사40:10c); 메시아가 아버지 하나님의 권한의 위임을 받아 친히 구원과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훗날 그리스도의 증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1-22),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7-29).
여섯째로, “(a) 그(메시아)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b)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c)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40:11); 이사야는 참으로 알기 쉽게 메시아의 사역의 모습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그(메시아)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며”(사40:11a); 흔히 메시아를 목자, 그의 인도함을 받는 백성들을 양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시23:1-2). 이사야는 목자가 양떼를 풍성한 목초지로 안내하듯이 메시아가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양떼에게 풍성한 꼴을 먹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할입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영육간의 풍성함과 생명력이 그 말씀 가운데 넘치고 있습니다.
(2)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사40:11b); 양을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목자의 일입니다(삼상17:34-36, 요10:11-15). 특히 대항능력이 약한 어린양을 먼저 보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좋은 목자입니다. 어린양을 모두 그 품에 안으시며 강력하게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잘 키워서 능히 원수와 그리고 세상과 싸워서 승리를 얻도록 양육하십니다(요16:23-24, 33, 17:15).
(3)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40:11c); 전쟁이 나면 어떤 사람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될까요? 피난을 가기에 부적당한 사람들이 먼저 적에게 살해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마24:19). 따라서 그리스도가 그들을 얼마나 안전하게 인도하시는지 모릅니다. 그 모습을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름다운 구원의 소식을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더 감사한 것은 말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역사 가운데 그 영원한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메시아를 보내어주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의 본문예언을 참조하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을 백성들에게 그대로 보여줄 것입니다. 그것은 훗날 그리스도 예수께서 창조주 하나님의 죄 사함의 능력과 부활의 능력을 그 일생 가운데 보여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메시아의 시대를 예언하면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1) 히스기야 왕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현세적인 구원과 복에 집착하는 신앙생활을 영위해서는 안됩니다. 영생의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지 아니하는 현세적인 구원과 복이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육신적인 삶입니다. 그러한 삶은 들판의 풀과 꽃처럼 때가 되면 흔적도 없이 소멸이 되고 말 것입니다.
(2)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생의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것은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그 옛날 모세와 같이 직접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백성들이 그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하게 되면 놀랍게도 자신의 인생 가운데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보게 되는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3) 이사야의 예언은 700년후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발생하는 메시아의 복음사역과 그 제자들에게 임하는 성령님의 임재를 미리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구원의 소식을 동족들에게 들려주면서 이사야가 얼마나 감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선지자의 동족사랑의 마음을 저와 여러분들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4) 이미 2천년 전부터 발생하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입니다. 그 역사가 한반도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을 모두 살리는 창조주의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가 아니고서는 4대 강국으로 둘러싸여 있는 한국사람들이 제대로 통일을 이루고 또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10년내에 하나님의 은혜로 한반도의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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