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7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12. 09:12

이사야 강해 제179(40:18-2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26(주일)

 

이사야가 증거하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40:18-26)

 

선지자 이사야는 그의 동족들에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1) 사람이 만든 형상인 우상과 다르다(40:18-20). (2) 땅에 살고 있는 사람과 다르다(40:21-22). (3) 사람이 만든 것 가운데 영원한 것이 없다(40:23-24). (4) 하나님은 천지만물과 모든 것을 다시 창조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40:25-26).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 목을 뻣뻣이 해서는 안됩니다.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여미며 진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섬기고 그 말씀에 순종을 해야만 합니다. 만약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하거나 창조주 하나님을 우상으로 여기고 섬기고자 하는 경우에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들이 우상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현세적인 복과 이익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처럼 자신들의 존재도 그렇게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총체적으로 그와 같은 의미를 전해주고 있는 이사야의 본문말씀입니다.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그 깊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40:18); 창세기 제1장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것이 사람들입니다(1:26-27). 사람을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창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그 특징이 다음과 같습니다;

(1)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이신 하나님의(4:24)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흙으로 빗은 사람의 육체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2)  그렇다면, 사람의 보이는 겉과 보이지 아니하는 속 가운데 어느 것이 하나님을 닮아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겉 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7:22-25).

(3)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빗으시고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고 계십니다(2:7). 그 결과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서 움직이는 영혼을 가진 인간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받아서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하겠습니다.

(4)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사람의 영혼이 마음을 지배하고 육체를 움직여나갈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세상의 관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아담과 같은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2:7-8).

(5)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의미에서 보이는 형상이나 모양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입니다(5:1-4, 20:4-5).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32:4-10). 그리고 보이는 형상과 모양이 영원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이치에 맞지 아니하는 것입니다(40:18).

둘째로, “(a) 우상장인부어 만들었고, (b) 장색(goldsmith)으로 입혔고, (c)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40:19); 이사야가 사람들이 만든 우상의 두 가지 종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금속으로 만든 우상입니다. 또 하나는 나무로 조각하여 만든 우상입니다. 먼저 금속으로 우상을 만드는 과정이 다음과 같습니다;

(1)  돈 있는 사람들이 정성을 기울여서 힘있는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강한 금속으로 주물을 떠서 만들도록 장인에게 부탁을 합니다(40:19a).

(2)  주물로 만든 우상에 금박을 입히고 치장을 합니다(40:19b). 은 사슬을 만들어 그 신상을 꾸미게 되면 귀한 주신이 되는 것입니다(40:19c). 예를 들면, 시돈의 주신 바알이 그러합니다(왕상16:32).

셋째로, “(a) 궁핍한 자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b)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40:20); 가난한 사람들은 값비싼 우상을 주조하여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단단한 나무를 선택하여 그것으로 우상을 조각합니다(40:20a). 주로 아름다운 여신을 만들어 달라고 목공에게 부탁을 합니다(40:20b). 그렇게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처럼 여신을 조각하여 목상을 세우게 됩니다. 마치 가나안 원주민들이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7:5, 왕상16:33).

넷째로,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40:21);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그의 동족들인 선민들이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서 다음의 사항을 다시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모세오경만 보더라도 하나님신앙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기록 위에 튼튼하게 구축이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열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은 훗날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출애굽기의 기적을 통하여 다시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2)  이른 바 하나님신앙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제1장이 하나님신앙의 시작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제1장 제1절을 믿지 아니한다면 하나님신앙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창세기의 기록이 끝나고 출애굽기에 들어서게 되면 소위 하나님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 신앙상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창세기의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인류의 역사와 자연의 질서를 주장하고 계시는지를 확신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빠져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17:7). 따라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세에게 직접 가르쳐주시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나는 여호와 하나님 곧 스스로 있는 자이다”(3:14); 사람들이 믿든지 아니 믿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존재하시고 계십니다. 물론 창조도 홀로 하셨고 그 후에도 홀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연의 질서도 홀로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설혹 피조물인 인간이 없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창조주이십니다. 반면에 피조물인 인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영혼의 창조주이시며 인생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 계시면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수명이 다한 다음에는 허무하게 사라질 뿐입니다.

2)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3:15);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믿음의 열조들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대를 이어가면서 믿음의 장자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 각자 자신의 세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백으로서 약속의 아들이며 또한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했습니다(20:7, 23:6).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죽음과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8:11). 그 표현이 하나님의 입을 통하여 모세에게 위와 같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3:15).

다섯째로, “(a)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b)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같이 치셨고”(40:22); 이사야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땅 위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착각하지 말라고 동족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거처와 존재의 차원이 사람과 틀리므로 다음과 같이 그 생각과 뜻도 사람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여호와) 생각이 너희(이스라엘 자손들)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55:8-9).

여기서 이사야는 더 구체적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내려다 보실 때에는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메뚜기와 같은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40:22a). 그리고 하늘 자체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 하늘 높이 끝간 데가 없이 펼쳐져 있는 우주 바깥의 수막(1:2)은 하나님이 손수 펼치신 차양(canopy)과 같다. 그리고 그 하늘이라고 하더라도 성막처럼(25:8-9, 40:34-35) 하나님의 거처를 모방하고 있는 천막에 불과한 것이다”(40:22b).

여섯째로, “(a) 귀인들을 폐하시며, (b)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40:23);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6:10). 이사야의 동족인 선민들도 그렇게 간구하면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이 땅 위에서 자신들의 인생 가운데 실천하기를 작심하고서 살아가지 아니하게 되면 그들의 인생도, 그들의 나라도 존재의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나라의 지도자나 종교적인 지도자들도 그 존재가치가 상실되고 맙니다. 구체적으로, 나라가 망하며 왕과 귀족들의 기득권과 귀인의 신분이 사라지고 맙니다(40:23a). 하나님신앙을 백성들에게 바로 가르쳐주지를 못한 사사들도 헛된 종교적 행사만 관장하다가 그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고 말 것입니다(40:23b).

일곱째로, “(a)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b)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마른풀) 같도다”(40:24); 이사야는 동족들인 선민 유대인들의 하나님신앙의 깊이가 무척 얇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고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다. 그 뿌리가 겨우 생겨나고 있다”(40:24a)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는 환난이 찾아올 때에 모두들 뿌리가 뽑혀서 마른 풀처럼 바람에 날려가고 만다는 것입니다(40:24b, 1:4, 13:21). 환언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한 평생을 살게 되면 그 결국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통하여 그 뜻을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늘에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가서 영생을 얻는 영혼이 되지 못한다면 그 육신적인 삶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요?이사야의 표현 그대로 인간이란 겨우 지구의 표면에 엉덩이를 붙이고 살고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지구의 중심까지 이르는 두께 6,366km 가운데 겨우 표토층 10km 정도에 삶의 터전을 가지고 있는 인류입니다. 그 내부는 온통 불 못과 같은 용암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20:14). 그러므로 이사야의 표현 그대로, 겨우 심겨져서 한 평생을 위태위태하게 살고 있는 불쌍한 인생들이라고 하겠습니다(40:24).

여덟째로, “(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26) (a)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b)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c)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40:25-26); 이사야가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권세와 능력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해주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그 의미를 풀이해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40:25); 하나님은 홀로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하나님의 지위를 침범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크신 권능에 대하여 비교할 대상이 되지를 못하며 동등한 창조주라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2)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40:26a); 창조주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나님 내부에서 복수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시사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1:26). 복수의 형상이 하나의 하나님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2)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11:7-8). 복수의 개념이 여호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3)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 여호와의 말씀이 독립적인 인격으로 아브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십니다.

4)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9:6). 메시아가 창조주의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5)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11:1-2). 메시아에게 성령님이 강림하여 함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3)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40:26b); 하나님의 창조의 방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에는 하늘과 땅과 바다에 대하여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한대로 식물과 동물을 만들어내라고 하십니다(1:11, 20, 24). 그러면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생물이 발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들을 돌보십니다. 그 이름을 일일이 부르면서 돌보시는 것입니다. 참고로, 그 일을 일부 맡아서 수행하고 있는 인물이 하나님의 청지기로 발탁이 된 에덴동산의 경작자 아담입니다(2:15, 19).

(4)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40:26c); 하나님의 명령을 피조물들은 어길 수가 없습니다. 빠짐없이 수행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실 때에 모두가 심판대 앞에 나아가야만 합니다(5:28-29). 만약 불복종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소멸과 새로운 창조가 있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면심판입니다. 그 마지막 단계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라고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65:17).

(5)  참고로,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형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계속형이라는 사실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보라.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 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48:6-7). 지금도 새로운 인생과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한 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 땅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부분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구의 중심까지 6,366km의 두께를 가지고 있지만 그 표면 10km정도만이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토양입니다. 그 심부에는 불 못과 같은 용암이 꿈틀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늘을 쳐다보면, 더 아득합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그 발을 디딜 수 있는 하늘이 어디까지일까요? 아직 태양계를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짐작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만지고 있는 것은 한심할 정도로 극히 우주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인간들이 감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생의 구원을 말씀하시지만 그것의 필요성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당장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시대에 선지자 이사야는 그의 동족들에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다시 한번 체계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미 살펴본 그대로, (1) 사람이 만든 형상인 우상과 다르다(40:18-20). (2) 땅에 살고 있는 사람과 다르다(40:21-22). (3) 사람이 만든 것 가운데 영원한 것이 없다(40:23-24). (4) 하나님은 천지만물과 모든 것을 다시 창조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고(40:25-26) 이사야가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부르짖고 동족들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내용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온 세상에 전해야만 하는 창조주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700년전의 인물이므로 이 정도의 내용만 전해도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이미 이 땅에 오신지 2천년 후를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전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어떠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이웃과 온 세상에 전하고 설명해주며 자신의 삶으로써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마디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시는 지상명령입니다(28:18-20, 1:8). 그 일을 행하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천하권세가 함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이 시간 결단하시고 그 길로 달려나가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