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72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9. 04:13

이사야 강해 제172(38:21-2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129(주일)

 

창조주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왕을 죽을 병에서 낫게 하시고 그의 수명을 15년 연장시켜주겠다고 이미 약속하셨는데 어째서 이사야는 한 뭉치의 무화과를 아픈 곳에 붙이라고 말하고 있는가?(38:21-22)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의 깨달음의 노래를 그의 선지서에 독점적으로 게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읽게 되면 노래의 주인공 히스기야 왕처럼 감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치의 병이 낫게 되고 더구나 죽을 목숨이 15년 더 살 수 있도록 구원을 받았으니 영생의 하나님을 감격스럽게 찬양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격에 겨워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선지자 이사야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질구레한 이야기 그리고 이상한 질문을 말미에 수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1) 이사야가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가져다가 종처(부스럼이 나고 있는 자리)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하였고, (22) 히스기야도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냐? 하였더라”(38:21-22).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성경말씀을 오래 공부하다가 보면, 무언가 정상적인 이야기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곧 비약이 나타나고 있을 때에는 영적으로 큰 의미가 그 가운데 숨어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의 구절을 상세히 검토하면서 이제부터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파악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이사야가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가져다가 종처(腫處, 종기자리 곧 부스럼이 나고 있는 자리)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하였고”(38:21); 그 의미를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1)  당장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히스기야 왕이 얻게 된 불치의 병이 바로 종기의 발생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의학의 외과시술에 의하면 종기는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병입니다. 하지만 고대사회에 있어서는 목숨이 위험합니다. 조선시대의 예를 보면 17세기에도 그러합니다. 근세조선의 왕인 효종이 목에 난 종기에 칼을 대지를 못하여 그만 죽고만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언의 달성에 있어서 아무리 사소해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처방을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차피 여호와 하나님이 신위적인 능력으로 병을 낫게 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낫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더구나 사람의 노력으로 낫게 되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처방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라고 선지자를 통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에 순종을 할 때에 완전히 낫게 되는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1)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고쳐주실 때에 진흙을 개어서 그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으로 보내십니다(9:6-9). 그 말씀대로 씻고 나니 볼 수 있는 눈이 생겨나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엘리사는 자신을 찾아온 아람의 장군 나아만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단 강물에 7번 몸을 담그면 문둥병이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왕하5:10). 나아만 장군은 선지자 엘리사가 그를 위하여 여호와에게 간절하게 중보기도해주는 것을 원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다보지도 아니하고서 희한한 처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는 도저히 나을 것 같지가 아니하여서 화를 내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바꾸어서 순종을 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처방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3)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기적을 이루시기 전에 당사자의 순종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고 있는 처방이라고 한다면 의심하지 아니하고 따르고자 할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히스기야 왕도 예외가 아닙니다. 무화과가 그 깊은 종기를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처방을 따르고 있는 그 믿음을 보시고서 나음을 베푸신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의미일 것입니다.

(3)  세상일을 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는 목적의 달성이고 또 하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의 성취가 중요합니다. 또 그만큼 예언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일을 크게 감당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경우에 흔히 범하게 되는 잘못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방법에 대하여 소홀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예언이 반드시 성취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신위적인 방법으로 기적과 같이 실현이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 히스기야 왕이 특히 그러합니다. 그는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하룻밤 사이에 적군 185천명을 몰살시키고 예루살렘 성을 구원해주시는 초능력을 경험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37:36).

2)    마찬가지로 히스기야 왕은 믿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죽을 병에 걸려 있는 히스기야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이 살리시고 15년 목숨연장을 해주시겠다고 이미 예언해주셨기에 이제 병이 낫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현상처럼 그렇게 낫거나 아니면 기적적으로 금방 낫게 될 것입니다.

3)    히스기야 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간증문을 읽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놀라운 창조주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에 관한 간증을 듣다가 보면 그만 그 간증에 취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제 생각대로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만 하면 그 예언은 저절로 성취가 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저 목적의 달성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지 그 달성의 방법에 대해서 소홀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의도와 능력을 함께 살피시고 또한 목적과 수단을 동시에 감찰하고 계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먼저 계시하시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그 예언을 어떠한 방법으로 성취하고자 하는지를 또한 지켜보십니다. 예를 들면, 리브가와 야곱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에서가 장남이고 야곱이 차남이지만 하나님은 영적인 장자는 둘째인 야곱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25:23). 그 예언을 성취하겠다고 리브가는 야곱을 에서처럼 꾸며서 아버지 이삭의 방으로 들여보냅니다(27:8-14). 그렇게 하여 장자에게 주는 축복을 가로채는 것이 하나님의 예언을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거짓말과 속임이 그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방법이지(8:44) 거룩하신 하나님의 방법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5)    또 하나의 예를 더 들어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경우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메시아를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맡겨진 사명 곧 예수님의 인생의 목적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3:16-17).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마귀가 그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의 권세를 줄 것이고 그리스도는 그것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입니다”(4:8-9 의역). 참으로 달콤한 제안이며 효율적인 방법의 제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제안을 단숨에 물리치십니다(4:10). 그 이유는 구원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창조주 하나님만을 섬기며 경배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0:3-6).

6)    사탄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 구원이라는 목적의 달성이 단숨에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을 그것이 아닙니다. 더 높은 차원의 목적 곧 생명의 하나님만을 섬기며 경배한다는 근본적인 구원의 취지에서 이탈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말하고 있는 근본취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 그것이 모두 불법이며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히스기야도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냐? 하였더라”(38:22). 히스기야는 기도의 응답을 받은 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통곡과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불치의 병을 낫게 해주고 또한 15년의 수명연장도 허락해주었기 때문입니다(38:1-5). 그것은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서 받아 누리기를 원하고 있는 복입니다. 그래서 부러운 마음으로 히스기야의 이야기와 깨달음의 노래를 음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히스기야 왕의 이름으로 여러 성도들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냐?”(38:22). 그 의미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10:20).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기고 무병장수함을 오래 누린다고 하는 것으로 결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부여하고 있는 역사적인 사명일 수는 있지만 창조주가 부여한 인생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메시아에게 부여된 인생의 사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8-39).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들 곧 성도들의 인생의 목적은 마지막 날에 남도 살리고 자신도 살리는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사야가 본문에서 히스기야 왕의 질문 형식을 빌어서 강조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38:22).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에게 무화과를 그 종기가 난 자리에 붙여서 낫게 하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38:21). 참으로 사소해 보이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해주시는 방법이기에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 아무 것도 아닌 방법에 순종을 할 때에 히스기야의 죽을 병이 깨끗하게 나음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사야는 예언을 실현하고 구원을 얻는다는 목적도 중요하지만 그 구원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칼로 세상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빨리 건설하는 방법을 포기하고 있습니다(26:52).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에 맞는 방법을 선택하여 사용한다는 것이 항상 옳습니다.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무병장수함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히스기야 왕의 질문을 기록하면서 이사야는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복이며 구원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5년 목숨연장을 받고 있는 히스기야를 부러워하거나 무덤에서 되살아나온 베다니의 나사로를 마냥 부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부러워해야 할 사람은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인생을 살다가 천국에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영생을 누리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입니다. 아무쪼록 본문을 깊이 음미하시면서 그 은혜를 사모하고 마침내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