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63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4. 10:12

이사야 강해 제163(37:5-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120()

 

선지자 이사야가 받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구원의 이유와 구원의 방법론(37:5-7)

 

본문의 내용은 선지자 이사야가 중보기도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가 히스기야 왕의 신하와 원로 제사장들로부터 요청을 받은 중보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앞 절에서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선지자 이사야는) 이 남아 있는 자를(예루살렘 성에 갇혀있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히스기야 왕이)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하니라”(37:4).

그래서 이사야가 열과 성을 다하여 예루살렘 성을 구원해달라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그 결과 긍정적인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사야는 한시바삐 그 반가운 구원의 예언을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에게 전해주고자 합니다. 그래서 급히 자신을 다시 찾아오라고 그들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이에 따라 다음 구절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매”(37:5).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너무나 고대하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응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기쁜 응답의 내용이 본문 제6절과 제7절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상 제6절과 제7절은 좀 다릅니다;

(1)  6절은 예루살렘 성을 구원해주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2)  7절은 앗수르의 황제와 그의 군대를 치는 하나님의 전투의 방법론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 두 가지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히스기야 왕)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37:6); 여호와 하나님이 앗수르의 군대를 치는 이유가 하나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장군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능욕했기 때문에 그들을 치신다는 것입니다(37:6).

그 말씀은 예루살렘 성의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모욕하고 있는 앗수르의 군대를 징벌하시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에 그 반사적인 구원의 이익을 선민들이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그와 같은 말씀의 뜻은 나중에 다시 한번 이사야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계시가 되고 있습니다; “대저 내(여호와)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37:35). 역시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을 얻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지를 못합니다. 단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외생적(外生的)인 이유 때문에 반사적으로 구원의 이익을 향유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1)  첫째,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그렇게 결정을 하시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을 능욕한 앗수르의 군대를 심판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종 다윗을 위하여예루살렘 성을 구원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역시 이사야 당시의 히스기야 왕이나 그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구원을 얻을 만한 자격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셋째로,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종 다윗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찍이 다윗에게 준 언약의 내용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언약을 역사서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다윗을)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영원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7:27-29).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면 세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첫째,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하나의 집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2)  둘째, 그 집을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있게 할 것입니다.

(3)  셋째, 그 방법은 그 집에 하나님께서 하나의 복을 주심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그렇다면 다윗의 집을 영원히 세우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는 하나님의 복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 복이 바로 메시아의 오심이라고 일찍이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데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3-14). 역시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1)  선민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야말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영원한 왕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민의 영광, 선민만의 구원을 자랑하면서 그들의 선민사상으로 세상에서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괴롭히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2)  하나님께서 그 잘못을 시정하기 위하여 동정녀 탄생으로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실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임마누엘곧 메시아에게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함께하심으로 진짜 다윗의 집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 영원한 집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8:1-2, 38-39). 환언하면, 그리스도 바깥에서는 전혀 구원을 받을 이유나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엄격하게 선언하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섯째로, 지금까지의 모든 풀이를 하나로 정리해보자면 결국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메시아의 공로로 말미암아 반사적으로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향유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방법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접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메시아를 구원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구원을 받을 만한 공로가 없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거처를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14:1-3, 고후5:1).

그와 같은 이치를 모세의 글인 신명기에서도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습니다;

(1)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8:16-18).

(2)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9:5).

  여섯째로,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는 이유가 두 차례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사야가 기도의 부탁을 받고서 중보기도를 한 결과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서 그것을 전해준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 제6절의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히스기야 왕이 직접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한 결과에 대한 응답을 선지자 이사야가 듣고서 그 내용을 전해준 것입니다(37:14-15, 34-35).

36장과 제37장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항복을 권유하는 산헤립의 최후통첩이 두 차례 있게 됩니다(36:2-4, 37:9-10). 두 번째의 내용이 집중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앗수르 군대의 힘보다 약한 것이라고 능욕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모욕의 내용을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 펴 보이고 직접 간절하게 구원을 호소하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보전해주기로 하시고 그 내용을 이사야를 통해서 히스기야 왕에게 전해준 것입니다(37:34-36). 그러므로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을 꼭 본인이 직접 듣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그 응답이 전해져 올 수도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서는 사울이 다메섹에서 신기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이 주님의 제자 아니니아를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9:10-19).

일곱째로, “(a) 보라, 내가 (a spirit)을 그의 속에 두리니, (b) 그가 소문(a certain report)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c) 또 내가 그를 그의 고국에서 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37:7); 이사야가 중보기도를 한 결과 받게 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앗수르의 산헤립 황제는 많은 고급정보를 접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고국에서부터 긴급한 정보가 올라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산헤립 황제의 영을 지배하셔서 예루살렘 성의 포위를 풀고 급히 회군을 하도록 만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산헤립이 고국에서 반란의 조짐을 일단 수습하겠지만 나중에는 칼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상세한 예언입니다.

(2)  여기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판단력을 좌지우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발휘가 되면 정세를 역전시킬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에 역사하시면 산헤렙과 같이 엄청난 오판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지혜와 이성으로 항상 모든 정보를 전부 수집할 수가 있고 나아가서 완전한 분석과 정책결정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오만을 버려야만 합니다. 비근한 예로서, 인류의 역사 가운데 엄청난 강대국과 놀라운 패권국들이 모두 멸망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3)  요컨대, 이 세상에 100% 완전한 의사결정이나 정책결정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에 창조주의 뜻에 합당하면 완전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17:1).

(4)  참고로, 하나 더 말씀을 드려야 할 내용은 나중에 히스기야 왕이 직접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전달이 됩니다(37:35). 그 내용은 하나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며 구원해주겠다는 더욱 구체적인 언급입니다. 그 두 번째 계시가 있고 나서 한 밤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군인 185천명을 몰살시켜버리고 맙니다(37:36). 산헤립 왕은 속절없이 고국으로 도망을 치고 맙니다. 그 패전의 책임으로 훗날 정세가 불안해지고 왕자들의 난으로 살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37:38).

결론적으로,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잘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참담하게 모욕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징벌을 하는 과정에서 일부 사람들이 반사적인 구원의 은혜를 입고 있을 뿐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에 완전한 집이나 왕조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 가문이나 왕조라고 하더라도 모두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가문도 왕조도 하나님 앞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다윗 왕의 왕가도 결국은 그들의 유다 왕국과 함께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거처와 왕조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범을 따라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가 얻은 그 부활의 열매를 함께 나누게 될 것이며 그 보좌 앞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얻어 쓰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복을 얻어서 구원과 영생에 참여하라고 부르짖고 있는 선지자가 바로 본문의 이사야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 복을 모두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