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62강(사36:21-37: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1월 19일(목)
마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처럼 히스기야 왕과 그의 세 신하가 보여주고 있는 위대한 결단(사36:21-37:4)
본문에서 히스기야 왕과 그의 세 신하는 랍사게가 전달하고 있는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말을 듣고 너무나 참담하여 자신들의 옷을 찢고 여호와 하나님의 처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시점은 주전 701년경입니다. 그런데 10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게 되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비슷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처분을 바라보고 있는 일이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모두 유다 왕국의 귀족의 자녀들입니다(단1:3). 주전 605년에 일종의 인질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황제에게 보내어진 젊은이들입니다. 그들은 3년 동안 황제의 궁에서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도록 되어 있습니다(단1:4-5). 그런데 문제는 황제가 주는 기름진 음식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도록 규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단1:5).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당돌하게도 황제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음식과 음료수 만으로 살아가겠다고 결단을 하고 있습니다(단1:6-8).
그러자 그들을 감독하고 있는 바벨론의 환관장이 먼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 네 사람이 황제의 기름진 음식을 마다하고 채식위주로 생활을 하게 되면 자연히 얼굴이 수척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자신이 훗날 황제의 문책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단1:10).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당당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자신들을 돌보실 것이기에 오히려 더 나은 영육간의 강건함과 형통함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단1:11-13). 그렇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사자 다니엘의 기록은 그 결과가 믿음의 승리로 나타나고 있음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단1:15).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다니엘의 그 자랑스러운 이야기와 같은 믿음의 글을 벌써 1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큰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엿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전 701년에 발생한 그 사건에 대하여 유대인 사관들이 그들의 역사서에 그리고 이사야가 자신의 선지서에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왕하18:36-19:7, 사36:21-37:7).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히스기야 왕과 그의 세 신하가 어떻게 처신을 했기에 믿음의 승리가 예루살렘 성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제 그 비결을 알아보기 위하여 본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히스기야 왕과 그의 세 신하는 랍사게 앞에서 다음과 같이 그와 시비를 가리거나 쟁론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히스기야) 왕이 그들(세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사36:21). 히스기야 왕이 왜 신하들에게 산헤립 황제의 선전관인 랍사게의 오만한 말에 대하여 어떠한 말대꾸도 하지 말라고 사전에 주의를 주었을까요? 그 옛날 요셉의 경우를 가지고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 옛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청소년 요셉의 일대기에서 그 이유를 잘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복 형들의 배신 때문에 억울하게 낯설고 물 설은 애굽 땅에 노예로 팔려가게 된 요셉은 기가 막혔습니다. 너무나 억울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창39:1-3). 왜 그랬을까요?
(2)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람에게 호소를 해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집안에서 배우고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는 단지 여호와 앞에 호소하고 그 판단을 얻어서 행동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창17:1). 그렇게 행하였을 때에 항상 살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창21:28-33, 26:2, 32:24, 35:1). 그것이 믿음이며 신앙생활의 비결입니다.
(3) 실제로 사람의 꾀를 사용하고 다수에게 호소하여 지지를 얻어보아야 진정한 문제해결에 도달하지를 못합니다. 원칙적으로, 구원과 영생은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선조들이 깨달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믿음의 조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서 배운 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요셉의 경우처럼 이 세상에서 진실로 형통함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 되고 있습니다.
(4) 사람들 앞에서 잠잠하고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것이 한 마디로, 문제의 해결을 사람들의 차원에서부터 하나님의 차원으로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따가운 하나님의 눈이 피아(彼我, 상대방과 자신인 양쪽)를 동시에 살피고(창39:9) 심판과 구원의 문제를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렇지만 그들의 마음이 너무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참담하여 왕과 신하들이 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옷을 찢고 있습니다; “그때에 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자기의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그에게 전하니라”(사36:22),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사37:1). 자신들의 옷을 찢는 행위의 의미를 좀더 깊이 살펴봅니다;
(1) 흔히 상대방의 말을 듣고 견딜 수 없이 모욕감을 느끼고 격분하였을 때에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너 죽고 나 죽자는 표현”입니다. 더 이상 수모를 견딜 수가 없으니 이제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자존심 하나는 지키고 싶다는 표시입니다.
(2)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은 히스기야 왕의 세 신하가 적장 랍사게 앞에서 자신들의 옷을 찢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왕인 히스기야 앞에 나아가기 직전에 자신들의 옷을 찢고 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사항전의 표현을 자신들의 왕 앞에서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목숨을 던져서라도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 앗수르 황제와 그 군대에 대하여 대항을 하고 싶다는 의사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히스기야 왕 자신도 신하들 앞에서 옷을 찢고 있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이상한 것은 그 다음의 수순입니다. 그들은 갑옷을 갖추어 입고 곧바로 전장으로 달려나가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아가고 또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셋째로,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를 하기 위하여 굵은 베옷을 입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옷을 입으니라”(사37:1-2a). 고대사회에서 굵은 베옷을 입는 경우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상을 당했을 때에 자식들이 자신의 불효로 부모님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고 생각하고서 죄인의 심정으로 베옷을 입습니다. 또는 왕과 부족의 어른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을 청하고자 나아갈 때에 베옷을 입고서 석고대죄를 합니다. 그와 똑 같은 심정으로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 그리고 원로 제사장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자인(自認, 스스로 인정)하고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비로소 살 길이 열리며 문제가 해결되기를 시작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하여 곧바로 사생결단의 현장으로 뛰어나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먼저 자신의 그 동안의 잘못을 사죄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에 나서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주이심을 인정하고 있는 성도의 성숙한 신앙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고맙게도 이사야가 그 대목을 놓치지 아니하고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선지자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사37:2-3). 선지자는 그들을 도와주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특히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 그리고 제사장들처럼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환난과 고통이 찾아왔으며 백성들이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자들에게 살길을 열어주고 나아가서 구원과 영생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리는 자입니다. 그와 같은 선지자의 중보기도에 대하여 일찍이 아브라함이 다음과 같이 선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50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50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창18:23-24),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10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10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18:32). 소돔과 고모라 성의 주민들을 자신의 장조카인 롯과 함께 임박한 심판으로부터 구하고자 간절하게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모세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2) “이제 그(아브라함)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그랄 왕 아비멜렉)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20:7). 선지자의 기도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치유의 역사를 이 땅에 발생하게 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조건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3) 그와 같은 이치를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왕인 히스기야가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하들과 제사장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선지자 이사야를 찾아가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하심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해달라고 요청을 하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그들(엘리아김과 셉나와 원로 제사장들)을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사37:2b).
(4) 오늘 날 성도들은 모두 선지자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를 행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 그러한 경우를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습니다;
1)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8-20).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전에 용서와 구원을 요청하는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필요함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2)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사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행9:17-19).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선지자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가서 중보기도를 해주고 그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일할 수 있도록 세워주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히스기야는 자세한 사정을 여호와께 아뢰기 위하여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사37:1). 그리고 정직하게 자신들의 힘으로는 이 환난을 극복할 수가 없다고 고백합니다(사37:3). 그러므로 부디 자신들을 꾸짖어주시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구원해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사37:4). 그러한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면서 전하고 있는 말씀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1)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사36:3); 선민들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 잘못을 알고서 시정하고자 하나 이미 적의 능욕이 심하고 자신들은 당면한 환난을 극복할 수 있는 방도가 없으며 또한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디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는 기도를 히스기야가 선지자 이사야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히스기야 자신도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동일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의 상전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로 말미암아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하니라”(사36:4); 적으로부터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모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그 진노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방인 적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자신들에게도 질책이 임할 것입니다.
(3) 따라서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고 있습니다. 부디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불쌍한 백성들에게 살 길을 열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도 사태를 이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방치한 자신의 죄를 모두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에게 중보기도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백성뿐만 아니라 히스기야 자신도 살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4) 그러한 부끄럽기 그지없는 기도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훗날 다음과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있습니다; “대저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사37:35),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사39:8).
(5)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들의 부족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신앙의 현주소를 보면 하나님이 별로 구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위신과 다윗을 생각하여 그들의 성을 구원해주기로 결정하셨다는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 왕의 하나님신앙은 어떠한 수준의 것일까요? 한 마디로,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았으나 일신상의 치유와 예루살렘 성의 구원에만 만족하고 있는 소위 현세적인 모습의 신앙인이 어쩌면 히스기야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 구원은 상대방과 쟁론하여 말로 승리를 한다고 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 왕은 신하들에게 랍사게와 말싸움을 하지 말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2) 창조주를 폄하하고 있는 상대방의 말이 너무나 참담하여 견딜 수가 없어서 자신들의 옷을 찢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사생결단을 하고 말겠다는 의사표현입니다.
(3) 굵은 베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나무라기에 앞서서 그와 같은 상황을 초래하고 있는 자신들의 잘못을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종의 석고대죄와 비슷한 것입니다. 환언하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았기에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었으니 자신들의 잘못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보의 기도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신탁의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5) 스스로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서 기도로써 정직하게 고해야만 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말씀 드리고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음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질책하시고 백성들에게는 부디 구원을 베풀어달라고 간구해야만 합니다.
(6) 아무쪼록 위와 같은 믿음의 자세로 히스기야처럼 죽을 고비에서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현세적인 구원에 머물지 말고 영생으로 나아가서 영원한 구원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시간 기도하는 민족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민족 위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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