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61강(사36:14-2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1월 18일(수)
참으로 가소로운, 그러나 심각한 질문; 히스기야 왕의 말, 여호와의 말씀, 앗수르 왕의 말 가운데 어느 것을 따를 것인가?(사36:14-20)
첫째로,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가소로운 일을 저지르고 있는 자가 앗수르의 산헤립 황제입니다(사36:13);
(1) 그는 국가간의 신뢰와 약속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있습니다. 그가 유다 왕국으로 쳐들어가자 히스기야 왕이 대항할 염두를 내지 못하고 전국의 금과 은을 끌어 모아서 자신에게 주면서 화해를 요청하고 있습니다(왕하18:13-16). 그런데 산헤립은 일단 화해를 하는 척 금과 은을 모조리 받아 챙기고 나서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서 유다 왕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것입니다(왕하18:17).
(2) 산헤립 황제가 히스기야 왕의 필사적인 화해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을 정복하고자 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부왕 사르곤(bc 722-705)이 일찍이 선민의 나라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복 왕’으로서 백성들의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산헤립 자신도 앗수르의 황제로서 ‘정복 왕’의 칭호를 얻자면 남조 유다 왕국을 정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산헤립이 유다 왕국을 반드시 정복하고자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1) 북조 이스라엘보다는 남조 유다를 정복하는 것이 더 위신이 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때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 제국을 형성했던 다윗 왕조가 여전히 다스리고 있는 나라가 유다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2) 유다 왕국을 멸망시켜야 인접한 블레셋을 완전히 복속시킬 수가 있고 나중에 애굽 제국을 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패권국인 앗수르를 중근동 전체의 패권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숙명적으로 애굽 제국과 자웅을 겨루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4) 산헤립 황제의 친정(親征, 황제나 왕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정벌에 나서는 것)은 대단히 성공적입니다. 파죽지세로 유다의 46개 성읍을 휩쓸고 히스기야 왕과 유다의 귀족들을 모조리 예루살렘 성에 몰아 넣은 것입니다(왕하18:13). 이제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산헤립 황제가 기고만장한 것입니다(왕하18:17).
(5) 더구나 산헤립 황제의 중앙군은 유다 왕국을 지원하고자 애굽에서 달려온 구스 왕 디르하가의 군대를 립나에서 성공적으로 막아내었습니다(왕하19:8-9). 이제 예루살렘 성의 다윗 왕조는 살아날 가능성이 전무합니다. 그래서 그 성을 포위하고 있는 랍사게 장군에게 최종적으로 히스기야 왕에게 항복을 권유해보라고 명령을 한 것입니다(왕하19:10). 그런데 랍사게를 통하여 산헤립 황제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가소롭기가 그지 없습니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보다도 못한 생각을 함부로 떠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앗수르의 산헤립 황제의 생각을 랍사게의 말 가운데서 찾아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루살렘 성의 유다 백성들은 히스기야 왕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군대의 공격을 막아낼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사36:14).
(2) 히스기야 왕이 여호와를 신뢰하고 기다려보라고 하는 말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사36:15). 그것은 그저 시간을 끌려고 하는 수작입니다. 실제로 히스기야가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애굽의 구원병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지원군이 이미 산헤립 황제의 중앙군에 의하여 립나에서 격퇴를 당했기 때문입니다(사37:9).
(3) 히스기야 왕이 백성들에게 항복을 하는 경우 모두가 죽게 된다고 하는 말도 거짓이라는 반박입니다(사36:16a). 산헤립은 만약 예루살렘 성에 갇혀있는 백성들이 히스기야 왕의 말을 물리치고 자신에게 항복을 해오는 경우에는 모두 예전처럼 평화스럽게 그리고 풍요롭게 살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랍사게를 통해서 외치고 있습니다(사36:16b). 특히 자신들의 전답이 황폐화된 경우에는 그만큼 좋은 땅을 주어서 넉넉히 살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선전하고 있습니다(사36:17).
(4) 끝으로, 히스기야 왕이 진심으로 여호와를 의지하여 국난을 극복하자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효성이 없는 신앙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열국의 신들 가운데 앗수르 황제의 군대로부터 자국을 지켜낸 수호신이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사36:18).
셋째로, 산헤립의 신관(神觀)이 랍사게의 전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확실하게 제시가 되고 있습니다;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자기의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내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하니라”(사36:19-20). 간략하게 이해를 돕기 위하여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1)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사36:19a); 주전 734년경 유다 왕 아하스 시대에 북쪽의 아람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이 연합하여 유다로 쳐들어왔습니다(왕하16:5-6). 두 나라를 한꺼번에 대항할 수가 없었던 아하스 왕은 그들 배후의 강대국 앗수르 제국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왕하16:7-8).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차지한 앗수르는 서쪽으로 진출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좋은 기회로 여기고 먼저 시리아의 아람 왕국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때 정복한 큰 도시가 아르밧과 하맛입니다. 아르밧은 북부 시리아의 국경도시입니다. 그리고 하맛은 중부에 있는 요새입니다. 그곳에서 앗수르의 침략군을 방어하지 못했기에 아람 왕국의 수도 다메섹이 주전 733년에 그만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왕하16:9).
(2) “스발와임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사36:19b); 앗수르의 공격을 하맛에서 저지하지 못하자 아람 왕 르신은 스발와임 요새에서 사력을 다하여 적과 싸웠습니다(왕하16:9). 승리를 얻기 위하여 그는 스발와임의 신들에게 인신제사까지 지냈습니다(왕하17:31). 하지만 패전을 당하고 수도 다메섹까지 정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가 주전 733년경입니다. 그 후 앗수르는 주전 725년경 북조 이스라엘 왕국으로 쳐들어갔습니다(왕하17:5). 그때 스발와임의 아람 사람들이 앗수르의 통치하에서 분연히 일어나 이스라엘 왕국을 돕고자 합니다. 그러나 역부족입니다. 앗수르 군대는 스발와임의 반란도 진압하고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까지 함락시키고 맙니다(왕하17:6). 그것이 주전 722년의 일입니다.
(3) “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자기의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내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하니라”(사36:19-20); 고대도시를 지키는 토착신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상숭배가 심하고 인신제사까지 바치고 있는 고대 시리아와 북조 이스라엘에는 호국신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신들이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도시나 왕국을 결코 앗수르의 말발굽에서 건져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앗수르 제국의 산헤립 황제는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 왕국의 수호신 여호와도 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다른 열방의 토착신들처럼 뻔히 눈뜨고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이 망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사36:20 의역).
넷째로, 그렇다면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누구의 말이 거짓일까요? 예루살렘 성에 갇혀서 백성들을 단속하고 있는 히스기야 왕의 말이 사실일까요? 아니면 국제정세를 꿰뚫고 있는 산헤립 황제의 말이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요? 예루살렘 성의 귀족들과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태도를 결정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항복을 하면 앗수르 황제가 자신들을 약속대로 살려줄까요? 후환을 우려하여 아무래도 죽일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애굽의 구원병이 도착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산헤립 황제의 말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이제는 살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참으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진짜 하나님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인지 아니면 무늬만 성도인지 차이가 발생하는 법입니다. 진짜 하나님신앙을 지니고 있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의도와 능력을 먼저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행동하고 선택을 할 것입니다;
(1) 그와 같은 상황으로 몰아넣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서 가장 먼저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2) 그리고 정직하게 창조주 앞에 피조물의 신분으로 다시 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씀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3) 구체적인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적들이 함부로 떠들고 있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중지시키거나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다윗처럼 회개하는 저희들을 위하여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사37:17-20, 35).
결론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가소로운 인간들의 난동입니다. 창조주를 몰라보고 제멋대로들입니다. 그러므로 모조리 쓸어버리고 새로운 창조를 하면 딱 좋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창조를 베푸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창1:26-27). 그러므로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창9:6).
과연 누가 구원을 받으며 누가 영벌에 처해지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
(1)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는 자들이 앗수르의 황제와 그의 군대입니다(사37:36).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힘없는 우상이나 토착신으로 여기고 조롱을 했기 때문입니다(사36:20).
(2) 그 다음에는 회개하지 아니하는 선민들일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께서 신위적인 능력으로 구원해주신다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심기일전하여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바라보고서 남은 인생들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이 그러하지를 못했기에(사39:1-8) 훗날 선민의 나라가 사라지게 됩니다.
(3) 그러므로 사람들의 말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의도와 그 말씀의 뜻을 깨닫고 따르는데 열과 성을 다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능력이 그 어떤 피조물의 능력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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