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46강(사32:9-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1월 3일(화)
이 세상에서 안일함과 평안함만을 마냥 추구하는 자가 당하게 되는 고초(사32:9-15)
세상사람들에게 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거의가 평안과 행복을 얻기 위함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바쁜 일상에서 장차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를 너무 염려하지 아니해도 되는 좀더 나은 미래를 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천재지변이나 전쟁의 위험에서도 벗어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염원들이 있기에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권력과 부를 얻게 된다면 그와 같은 좋은 세상에서 안전하게 그리고 여유롭게 살 수 있게 될 줄로 믿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그와 같은 좋은 환경과 신분을 자손들에게도 물려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그와 같은 백성들의 바램과는 상당히 다른 예언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다가올 미래에 대하여 염려하고 안일한 일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본문의 구절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묵상을 통하여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혀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너희 안일한(so complacent, 크게 만족하는)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b) 너희 염려 없는(feel secure,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딸들아, (c)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사32:9);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특권층과 부유층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에 크게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굉장히 안전한 성읍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예루살렘의 왕과 귀족들에게 주고 있는 예언에 국한이 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들처럼 생각하고 있는 모든 세상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왜 그렇게 안일하게 그리고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일상을 누리고 있는지를 잠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예루살렘 성은 해발 780미터의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튼튼한 성읍입니다. 북쪽을 제외하고 삼면이 깊은 골짜기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산이 없는 북쪽절벽으로 적들이 기어올라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쪽 기드론 골짜기의 ‘높은 성채’(오벨, ophel)가 진입로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어서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는 적들이 화살받이가 되기에 꼭 알맞기 때문입니다.
(2) 참으로 신기하게도 다윗 대왕이 여부스 족속에게서 시온 산성을 뺏어 다윗 왕조의 수도로 결정한 이후부터 이사야의 시대까지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적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이 공격을 당하여 완전히 함락이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왕조의 왕과 유대 왕국의 신하와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전하다고 여기고서 아예 염려를 붙들어 매어 놓고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사32:9b).
(3) 유대인들은 자기 만족이 심한 민족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며 제사의식을 제대로 행하기만 하면 선민의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정치적 지도자들과 귀족들 그리고 종교적 지도자들은 자기 만족의 정도가 더 심합니다. 선민들 가운데에서도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형통함의 복을 더 크게 받아서 누리고 있으니 그 만족감과 자기성취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4) 오늘날에도 이사야 당시의 다윗 왕조의 왕이나 유다 왕국의 귀족이나 종교지도자들처럼 자기 만족과 지나친 안전의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이제는 겸손하게 선지자 이사야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사32:9c). 왜냐하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성읍이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사람들의 세상적인 성공과 자기실현의 만족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크게 평가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과연 그들의 생각대로 안전을 지켜주시고 형통의 복을 계속 주실지 아니 주실지 확언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a)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b) 일년 남짓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리니, (c) 포도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일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라”(사32:10); 마치 ‘염려 없는 여자들’(사32:10a)처럼 어리석게도 선민들이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그것도 이사야의 생애 가운데, 적의 포위공격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그때가 역사적으로 주전 701년 앗수르의 황제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두 번째로 유다 왕국을 침범했을 때입니다(왕하18:17). 그런데 본문에서 이사야가 “일년 남짓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리니”(사32:10b)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의 예언은 이사야가 주전 702년경에 동족들에게 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앗수르 산헤립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유다 왕국을 재침하게 되면 그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될까요? 이사야는 유다 왕국의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포도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일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라”(사32:10c). 여기서 포도수확이 없다는 것은 자연재해나 새들에 의한 피해가 심각하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열매를 거두는 추수가 가을에 없을 것이라는 예언이 뒤 따르고 있어 전란에 의한 피해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헤립의 군대는 예루살렘 성만을 제외하고 유다 왕국의 모든 지방을 초토화시키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전쟁으로 죽고 포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농사를 지을 일꾼이 없을 정도로 전국이 황폐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a) 너희 안일한 여자들아, 떨지어다. (b) 너희 염려 없는 자들아, 당황할지어다. (c)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d)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사32:11); 삽시간에 앗수르의 대군이 전국을 초토화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동안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난공불락의 성이며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던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은 너무나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라 하고 있습니다(사32:11b). 특히 자신들의 기득권에 안주하여 만족하게 살고 있던 귀족층들은 덜덜 떨고 있습니다(사32:11a). 군사들과 백성들은 적병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여 생목숨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적의 기마대가 순식간에 전국을 휩쓸고 있어 어느 곳으로 피난을 가야 할지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이 마치 16세기말 일본의 침략을 당한 조선의 형편과 비슷합니다.
그와 같은 상황을 예언하면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부디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다음과 같이 매어 달리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c)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d)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사32:11cd); 여기서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사32:11c)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첫째, 전란으로 수치를 당하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둘째,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정직하게 하나님께 바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창조주가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 앞에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가장 솔직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나아가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왕과 귀족들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반드시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사32:11d)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백성들이 잘못되고 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은 모두 왕과 지도자들의 책임입니다. 그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는 준엄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다행스럽게도 마지막 순간에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고 있습니다(왕하19:1). 그 결과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인 구원을 얻게 됩니다(왕하19:35).
넷째로, “(a) 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b)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c)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사32:12); 마지막 순간에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매어 달린다고 하더라도 전란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할 것입니다. 유대 왕국의 문전옥답(門前沃畓, 집 앞에 있는 가장 기름진 논)이 모두 황폐화되고 맙니다(사32:12a). 그리고 그 좋은 포도나무의 열매가 모두 약탈이 되고 맙니다(사32:12b). 전쟁은 끝났지만 다음 해 농사를 지어 추수가 있을 때까지 살 길이 막막합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면서 자신들의 안일함과 자만했음을 후회하고 있습니다(사32:12c). 이제야 말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할 때입니다.
다섯째로, “내 백성의 땅에 가시(thorns)와 찔레(briers)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사32:13); 가시나무의 특징은 위로 뻗는 나무의 가지에 가시가 돋아 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찔레는 가시를 가진 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옆으로 뻗어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목장의 초지에 가시나무가 나게 되면 즉시 제거를 해버리면 됩니다. 그렇지만 찔레가 나서 일단 군락을 이루고 있으면 그것을 제거하기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찔레의 무리를 뚫고서 사람이나 짐승이 들어가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고 있다는 것은 그곳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시나 찔레가 자라날 때에 적기에 그것을 사람들이 제거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선민들이 자랑하고 있던 성지 예루살렘입니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 앗수르 대군의 포위 공격으로 성밖출입을 못했습니다. 성 바깥의 포도원과 목장을 돌볼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가시와 찔레가 무성한 성읍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섯째로, “대저 궁전이 폐한 바 되며, 인구 많던 성읍이 적막하며, 오벨(citadel, 성채, 포탑, 아성)과 망대(watchtower)가 영원히 굴혈이 되며 들나귀가 즐기는 곳과 양떼의 초장이 되려니와”(사32:14); 이사야는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공격에 대해서만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예루살렘 궁전이 황폐화되고 만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참상은 언제 도래하게 될까요? 첫째, 신바벨론 제국 느부갓네살 황제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주전 586년에 유다 왕국이 망할 때입니다. 그때는 예루살렘 성이 성전과 함께 불타버려서 황폐화가 되고 맙니다. 둘째, 주후 70년 로마의 대군이 유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켜버린 경우입니다.
두 경우 모두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피해를 입히게 된다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예루살렘 궁전이 황폐화 됩니다.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2) 유다 사람들이 그 땅에서 살지를 못하게 됩니다.
(3) 도시를 지키는 성채도 무너지고 시골에서 양을 치는 망대도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4)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의 주요 성읍들이 모두 이방족속들의 유목지가 되거나 야생동물들이 거하는 장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일곱째로, “(a)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the Spirit)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b) 광야(the desert)가 아름다운 밭(a fertile field)이 되며, (c) 아름다운 밭을 숲(a forest)으로 여기게 되리라”(사32:15); 황폐화된 곳을 누가 언제 어떻게 회복시키게 될까요?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을 부어주시어서 회복의 역사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사32:15a). 그 예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땅이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사람들에게 부어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땅만을 회복해보아야 역사 가운데 또 비슷한 잘못과 전쟁의 참상이 반복될 따름이라고 하는 전제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문제는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문제해결의 방법이 획기적으로 달라져야만 합니다. 전쟁의 방식이 아니고 메시아의 방식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메시아의 방식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그 일이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사람을 영적으로 바꾸는 작업이 있어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쉽게 말하자면 새로운 창조라고 하겠습니다. 환언하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와 열두 사도 그리고 성도들에 의하여 복음의 시대가 전개가 됩니다. 그러면 사막과 같은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고 사람들의 황폐한 마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생활화하는 옥토가 될 것입니다(사32:15b). 그것은 하나님나라가 임하고 확장이 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4) 끝으로, “아름다운 밭을 숲(a forest)으로 여기게 되리라”(사32:15c)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다시는 이 세상의 아름다운 밭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실 이 땅의 높은 지위나 권세 그리고 명예나 부귀영화는 모두 100년 안팎의 인생을 사는 동안 지나가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들이기에 함께 영생을 누리기에는 부적합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구원과 영생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복음사역을 감당하다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생명의 면류관을 얻어야만 합니다.
부활과 영생을 추구하고 있는 성도들이라면 이 땅에서 얻은 것들을 문전옥답이 아니라 숲으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사야는 그것이 세상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들의 마음가짐이라고 그의 예언을 통하여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성읍이 천년만년 안전을 누릴 수 있는 요새이며 자신이 이룬 이 땅에서의 성취가 심히 만족스러운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안이한 삶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삶입니다. 그와 같은 이사야의 예언과 같은 맥락에서 훗날 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9-21).
한 마디로, 안이함과 자만을 벗어버리고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바로 서는 그것이 이 세상의 고난을 이기고 부활과 영생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이사야의 예언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는 분들에게 그러한 삶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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