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48강(사33: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1월 5일(목)
세상적인 방법으로 계속 살게 되면 어찌되는가? 그리고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게 되면 어떠한 미래가 도래하게 되는가?(사33:1-6)
본문에서 이사야는 두 가지의 경우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계속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여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는 경우입니다. 두 가지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장래는 각각 어떻게 달라지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해서 이사야는 본문에서 예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 내용으로 되어있는지 이제부터 각 구절을 살펴보면서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b)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c) 화 있을진저. (d)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e)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사33:1); 이사야는 동족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33:1c).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1) 가진 자가 가진 것이 없는 자를 학대하는 사회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는 그 신분에 의하여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자를 지배할 수 있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사33:1a).
(2) 만약 그와 같은 사회구조가 잘못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끔직한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학대를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사33:1d).
(3) 재판제도가 잘못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한 마디로, 무서운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無錢有罪, 돈이 있으면 무죄가 되고 돈이 없으면 유죄가 됨)의 사회입니다. 돈이 있으면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여 무죄판결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그러한 사법적인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 십중팔구(十中八九, 열에 여덟이나 아홉, 곧 대부분을 말함) 유죄가 되고 맙니다. 그것을 이사야는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사33:1b)들의 횡포가 상식화되어 있는 사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렇게 사회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만약에 정당하게 판결을 받겠다고 재판정에 서게 되면 그 판결이 어떻게 나타나게 될까요? 이사야는 당연히 유죄판결이 나고 말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사33:1e).
(5) 그러므로 그와 같은 유대사회에 살고 있는 한 재산이 없고 권력이 없으면 학대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누구든지 신분상승과 성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 경쟁에서 뒤떨어지게 되면 당연히 사회적인 그리고 제도적인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6) 그런데 그와 같은 사회가 한없이 계속이 될까요? 이사야는 그렇지가 않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피조세계를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역사 가운데 강력하게 개입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사33:1c).
둘째로, “(a) 여호와여, (b)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c)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d)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e)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33:2); 이사야는 ‘여호와’를 부르는 경우와 ‘주’를 부르는 경우를 구별하면서 용의주도하게 예언을 베풀고 있습니다. ‘여호와’ (사33:2a)는 첫째, 창조주이시며 둘째, 지금도 역사를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부디 선민들에게 새로운 이스라엘 사회를 만들어주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사33:2b).
이에 비해서 ‘주’(主, Lord)의 뜻은 약간 다릅니다. 보통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약칭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라는 호칭은 그 자체 사람들의 각자의 인생살이에 있어서 ‘주인’이라는 뜻을 강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담아서 이사야가 부르짖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더 이상 이와 같은 사회에서 성도답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의 인생에 주께서 이제는 개입하여 주십시오(사33:2c). 매일 우리를 품에 안아 보호하여 주십시오(사33:2d). 그리고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온갖 학대와 거짓으로부터 저희들의 인생을 구원하여 주십시오(사33:2e)”(사33:2 의역).
셋째로, “(a) 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b)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졌나이다”(사33:3); 주께서 간구하는 사람들의 인생에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일어나시게 되면 어떠한 현상이 발생하게 될까요? 이사야는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나라와 민족들을 먼저 징벌하십니다. 둘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하여 징계를 행하십니다.
본문 이 구절에서는 이사야가 나라와 민족들에게 어떠한 징벌을 하시는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1) 멀리서 하나님이 임하셔서 심판을 베푸신다고 요란한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잘못을 크게 범한 민족들은 그 소문만 듣고도 벌벌 떨고 있습니다. 마치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신위적인 능력이 함께하고 있으므로 원주민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던 때와 같습니다(수2:9-11). 그래서 대항하기 보다는 도망을 치려고 합니다(사33:3a).
(2) 그 가운데 악한 세력에 사로잡힌 여러 나라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항하고자 합니다(계16:14, 16, 19:19, 20:8-9).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한 패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주께서 심판의 칼을 뽑으시고 있는데 피조물의 나라가 대항을 한다고 하는 것이 본래부터 게임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쪼개어지며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사33:3b, 계19:19-21).
넷째로, “(a) 황충의 떼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b)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사33:4); 주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면 개인들은 어떠한 징계를 받게 될까요? 이사야가 상징적인 수법으로 그 징벌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예언해주고 있습니다;
(1)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강자가 되어 살면서 치부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것을 이사야는 한 마디로, ‘노략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쪼개어 수많은 사람들이 차지하도록 만들어버리실 것입니다(사33:4a). 그 불의의 재물을 서로 차지하고자 황충의 떼와 같이 달려드는 무리는 두 가지의 종류입니다;
1) 전쟁으로 나라가 망하게 될 때에는 적군들이 약탈을 일삼게 될 것입니다(욜1:4, 2:25).
2) 내부모순과 분열에 의하여 국가나 사회가 망할 때에는 지배를 받고 있던 인민일 수가 있습니다.
(2)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다”고 오늘날 평등사회에서 흔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신분사회에 있어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 위에도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엄격한 계급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면 악하게 기득권을 누리던 자들이 된서리를 맞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하극상이 발생합니다. 마치 공산주의 혁명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해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의 누리고 있던 신분상의 기득권이 사라지고 망신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이사야는 마치 메뚜기 떼가 그 위로 뛰어오르는 것과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사33:4b).
다섯째로, “(a)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b)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사33:5);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보좌를 펴시고 지극히 높이 계십니다(사33:5a). 그렇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메시아가 이 땅에서 성취할 것입니다. 그 복음사역의 처음 터전이 시온입니다. 그곳에서 두 가지를 행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와 공의’입니다(사33:5b). 그 의미를 다시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정의’(justice)가 먼저 언급이 되고 있는 것은 선민사회 내에서 그들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시행해보라는 의미입니다. ‘정의사회의 구현’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재판의 공정성을 회복하고 사회적인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악을 일소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율법의 뜻에 비추어 시행해보라는 의미입니다.
(2) 그 다음에 ‘공의’(righteousness)에 대하여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공의는 정의보다 넓은 개념입니다. ‘정의’가 자기중심적인 의로움 또는 자기민족이 옳다고 하는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면 ‘공의’는 모든 피조물은 전부 동일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이 이방인을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여호와의 복을 독점해서도 안됩니다. 공존공영(共存共榮, coexistence and co-prosper)과 상생(相生, mutual living)의 복을 하나님께 구하면서 모두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창조주로부터 비롯되는 ‘공의의 정신’입니다.
(3) 메시아가 복음으로 부르짖고 있는 ‘공의의 정신’이 십자가에서 못이 박히지만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창조의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사야는 ‘선민의 정의’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메시아에 의하여 이 세상에 오게 되는데 그 출발지가 시온이 될 것이라고 본문에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앙망하고 있는 이사야의 믿음의 눈을 이 대목에서 생생하게 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여섯째로, “(a)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b)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c)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33:6);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하지만 선지서에 실려 있는 그의 예언은 그 글을 읽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메시아의 오심과 그때부터 가동이 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소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본문의 결론인 위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1) 이사야가 ‘네 시대’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은 그의 당대에 국한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선지서를 읽고 있는 사람의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오심으로 복음을 듣게 되고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는 성도들의 기쁨을 미리 내다보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을 영적으로 모시고 살아가게 되었으니 평안의 복을 받은 성도들임이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사33:6a).
(2) 메시아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면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메시아가 바로 구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구원만이 풍성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도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진실로 간구하기만 하면 그 은혜가 임할 것이라고 여기서 예언하고 있습니다(사33:6b).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이 이미 나타나고 있으니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거듭난 삶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게 되면 엄청난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복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 분의 뜻을 인생 가운데 더 정확하게 실천할 수가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될수록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크게 줄일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신앙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경외’(사33:6c)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의 기사를 보게 되면 그 점이 분명합니다. 창세기 제22장에서 아브라함은 적장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모리아 산으로 찾아가서 막상 이삭의 목을 치려고 할 때에 급히 천사가 나타나서 그를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외치고 있습니다; “멈추어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이제 인정을 한다. 그러니 이삭 대신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을 제물로 삼아 바치도록 하라”(창22:11-13 의역).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하나님께서 인정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 자리매김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경외’야 말로 하나님신앙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33:6c).
(4) 참고로, 히브리서 저자는 그 장면을 풀이하면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시에 벌써 영생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는 생명의 창조주이시므로 자신이 이삭을 바치더라도 언약의 아들인 이삭을 다시 부활시켜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히11:19 의역). 여기서 중요한 믿음의 개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이 하나님신앙입니다.
2) 영생의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능력을 베풀어서라도 언약을 성취하십니다.
3) 이삭의 목숨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양으로 대신 속죄의 제사를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그 제물이 바로 메시아입니다(요1:29).
4)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대속의 구원과 부활과 영생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명의 하나님을 믿고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받들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 경외사상’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있는 무서운 사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학대를 당하고 남을 속이는 자가 기득권층이 되고 있는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을 섬긴다고 하더라도 학대를 당하고 속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동족인 선민의 사회의 모습이 그러하므로 이방족속들의 사회야 언급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사회적인 정의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한 선민사회이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 자리를 잡는다고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에 개입하시고 강력한 구원의 방책을 마련해주십시오. 우리들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사33:1-2 의미). 이사야는 그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 나서 메시아의 시대를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신앙을 떠나고 사회정의도 행하지 아니하던 나라와 민족들이 벌벌 떨고 있습니다.
(2) 불의한 재물과 지위들이 약탈을 당하고 뒤집히고 있습니다.
(3)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에 보좌를 높이 펴시고 이 땅에서 메시아가 하나님나라를 개척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4) 그 나라에서는 구원과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입니다.
(5)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보배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6) 이 시간 이사야의 예언대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힘있게 구축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야 강해 제150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29 |
---|---|
이사야 강해 제14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28 |
이사야 강해 제147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26 |
이사야 강해 제146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26 |
이사야 강해 제14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