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47강(사32:15-2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1월 4일(수)
이사야는 공의와 정의의 차이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사32:15-20)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시켜서 시내 산으로 데리고 옵니다(출3:12, 19:1-3).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사장나라의 율법으로 선포합니다(출19:3-7). 거룩한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고 제사장나라의 신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고 맹세를 합니다(출19:7-8, 24:3-7). 하지만 그 후의 역사는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 받기 위하여 시내 산 정상으로 올라간 후 장기간 소식이 없자 당황한 백성들은 불안을 이기지 못하여 대제사장 아론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이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신탁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출32:1). 이에 아론은 애굽에서 보고 배운 그대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출32:2-4). 그들은 십계명을 어기는 줄도 모르고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고 축제를 벌입니다(출20:4-5, 32:6). 그 결과 3,000명 가량이 죽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출32:28).
그 뿐만이 아닙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12정탐꾼을 보낸 결과 그 보고의 내용을 둘러싸고서 절망에 빠집니다; 10명의 정탐꾼은 현지정탐의 결과를 보고하면서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말합니다(민13:31-33). 나머지 2명의 정탐꾼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므로 믿고서 전진하자고 역설합니다(민13:30, 14:6-9). 하지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은 순식간에 열패의식(劣敗意識,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 속았다고 하는 배신감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아론을 크게 원망하는 한편 그 두 명의 정탐꾼 곧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민14:1-5, 10).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을 위한 열 가지 하나님의 재앙과 유월절의 구원사건, 그리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고서도 이스라엘 자손들의 인간성과 본심은 도무지 변화를 받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충분하고 안전이 확보되어 있을 때에는 출애굽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출14:30-31). 그러나 그 조건이 열악하고 미래가 불투명할 때에는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이 오히려 더 좋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에게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습니다(출16:2-3). 도무지 절대적인 하나님 신뢰와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들을 탈바꿈시킨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부득이 하나님을 크게 원망하던 기성세대는 모세와 아론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 등 4명만 남기고 광야생활 38년 동안에 모두가 광야에서 죽고 맙니다(신2:14-16).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모세가 젊은 백성들을 이끌고 2년 동안에 요단강 이동지역을 정복합니다(신2:24, 3:1-2, 12-17, 수12:1-6). 그 다음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가서 가나안 땅을 정벌합니다(수12:7-24). 그러나 그들 영적인 지도자들이 죽고 나자 그 후의 사사 시대는 하나님신앙이 약화되고 이민족의 지배를 자주 받게 되는 참으로 곤궁한 시대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가 다윗과 솔로몬 대왕의 시대에 상당히 청산이 되는 것으로 보였으나 솔로몬 후기부터 다시 우상을 섬기고 이민족의 문화가 급격히 기승을 부리게 됩니다(왕상11:1-13). 그 결과 두 개의 나라로 쪼개어지고서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왕상12:19-20, 28-30). 어쩌다가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경우에는 성군이 나타나서 종교개혁을 단행하지만 계속 이어지지를 못하고 단발로 끝나고 맙니다(왕상15:11-15, 왕하12:2). 그러한 역사가 이사야의 시대까지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시대를 갈망하면서 본문에서 한 마디로 외치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써는 도무지 백성들의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디 위에서부터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십시오. 메시아가 오시고 성령님이 오셔야만 저희들의 광야생활이 끝나고 아름다운 밭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사32:15a 의역).
이사야는 이 세상에서 영적인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의 삶을 백성들이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그러한 영적인 삶을 공의의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사32:16b).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하고 있는 인생을 자신들의 정의만 추구하고 있는 광야의 삶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사32:16a). 그와 같은 이분법을 가지고 이사야가 어떠한 영적인 지식을 더 상세히 말해주고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각 구절을 검토하면서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사32:15); 하나님의 영이 성도에게 임하게 되면 영적인 대 각성이 있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영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일까요?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 대오각성의 내용을 한 마디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여전히 삭막하고 메마른 광야에 있지만 하늘이 열리게 되니 아름다운 천국이 그 마음속에 임하고 있다. 세상의 기름진 밭이 부럽지 아니하게 되니 그것을 그저 숲과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것이 성령님이 임재하여 역사하고 있는 성도의 구원받은 영생의 마음가짐이다”(사32:15 의역).
둘째로, “(a) 그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b)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사32:16);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자신의 목숨을 먼저 살리고 가족을 돌보며 민족의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삶이 여전히 우세합니다. 그러한 인생살이를 이사야가 정의를 존중하는 삶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사32:16a).
반면에 메시아와 하나님 아버지가 이루고자 하시는 공의의 나라는 천국의 아름다운 밭을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사32:16b).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천국을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눅17:21). 그것은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서 이 세상에서 자신의 것을 희생하면서 모두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32:17); 성도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한 평생을 살아가게 되면(마16:24) 어떠한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일까요?
이사야가 그 대답을 예언으로 해주고 있습니다; “경쟁과 투쟁의 사회를 서로 용서하며 화해하는 사회로 만들어나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실천하기 때문에 그 열매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부활하여 천국의 시민으로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물론 남은 인생 가운데에서도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영원한 평안과 안전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사32:17 의역).
넷째로, “(18)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19)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사32:18-19); 이사야가 두 가지의 경우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의 삶과 이 세상의 숲을 아름다운 밭으로 착각하고서 그것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삶을 상호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얻은 아름다운 밭을 숲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한 자에게는 훗날 아름다운 천국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살이 가운데에서도 성령님과 함께 살아감으로써 그의 집과 거처가 화평하고 안전하며 더구나 영적으로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사32:19).
(2) 반대로, 이 세상에서 얻은 것을 아름다운 밭으로 영원히 소유하기를 원하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숲으로 변화하는 끔직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우박과 같은 자연재해로 그 열매가 상하고 적의 침략과 약탈로 말미암아 그 성취한 것이 일시에 파괴가 되기 십상인 것입니다(사32:20).
다섯째로, “(a)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b)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사32:20); 이사야가 본문의 결론을 맺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도들은 남은 인생을 물가에 하나님말씀의 씨를 복음으로 뿌리는 삶으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흐르는 강물에 말씀의 떡을 던지는 인생과 같습니다(전11:1a). 흐르는 강물 그리고 범람하는 물가이므로 그 열매를 당사자가 얻을지 아니 얻을지 알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바라보면서 그 명령에 따라 던지는 것입니다. 손익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그대로 실천을 할 뿐입니다(마28:18-20).
(2) 그 결과는 솔로몬의 설교의 내용 그대로 여러 날 후에 당사자에게 기적과 같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전11:1b). 하나님께 맡기고 성도가 사심이 없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다음에 하늘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을 한 것이므로 그 복이 그들에게 그리고 당사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마10:12-13).
(3) 성도는 말씀의 씨만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시간과 재물도 복음사역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그것이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행위입니다(사32:20b). 그 손익계산이 장차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온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 그대로 온전한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롬8:2). 만약 이 땅에서 전부 보상을 받겠다고 하면 그 보답은 그저 조금 많을 뿐입니다.
(4) 하지만 그 보상을 천국에 저축해놓기를 원한다면 그 보답은 엄청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100데나리온을 탕감해주는 것과 천국에서 10,000달란트를 탕감 받는 것을 주님께서 한 가지로 이야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마18:23-34). 그 의미는 천국에서 탕감 받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의 것보다 60만배이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처럼 녹이 슬거나 절도를 당하지 아니하는 안전한 보상입니다(마6:19-20). 가히 자신의 것을 기울여서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히스기야 시대의 감격과 절망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 진정한 구원을 위하여 메시아가 반드시 오셔야만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사32:1). 그리고 메시아의 본보기대로 백성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도 성도들에게 임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32:15).
그렇다면, 메시아가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나라를 함께 열망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서 살아갈 때에 어떠한 변화가 임하게 될까요? 이사야가 본문에서 몇 가지 변화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이기적인 정의가 아니라 모두를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할 것입니다(사32:16).
(2) 마음속에 하나님의 천국이 임한 것을 기뻐하면서 자신의 것을 희생하여 하나님나라를 이루고자 할 것입니다(사32:17).
(3)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넣어주고자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보상을 이 세상에서 모두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저축해놓았을 때 그 이자가 실로 엄청나기 때문입니다(사32:20).
(4) 세상에서 아름다운 밭을 모두 소유하고자 하면 그것들이 몰락하거나 도둑을 당하는 비참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사32:19). 하지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쉬어가는 숲과 같이 여기고서 살아가고 있기에 성도들의 집과 거처가 화평하고 안전하며 영적으로 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사32:15, 18).
(5) 아무쪼록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그와 같은 놀라운 복을 전부 받아 누리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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