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3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7. 23. 05:26

이사야 강해 제139(30:27-2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027()

 

하나님의 진노가 원방에서부터 올 때 너희는 구원을 준비하라(30:27-29)

 

본문말씀; “(27)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 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듯 하며, 그의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의 는 맹렬한 불 같으며, (28) 그의 호흡은 마치 창일하여 에까지 미치는 하수 같은즉, 그가 멸하는 열방을 까부르며, 여러 민족의 입에 미혹하는 재갈을 물리시리니, (29) 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에 하듯이 노래할 것이며 피리를 불며 여호와의 산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반석에게로 나아가는 자같이 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라”(30:27-29).

오늘은 본문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먼저 제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의 말씀을 천천히 음미하시면서 여러분 스스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해답을 한번 찾아주셨으면 좋겠다고 하는 의도 때문입니다;

(1)  이사야는 여호와의 이름이 왜 가까운 곳이 아니라 원방에서부터 오고 있다고 예언하고 있는가?

(2)   여호와의 불붙는 진노와 빽빽한 연기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3)  여호와의 입술에 분노가 차고 그 혀에 불이 붙게 되는 것이 왜 재앙인가?

(4)  여호와의 거친 호흡이 열방과 만민을 완전히 쓸어버리기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스스로 한번 자제를 하시고 계시는가?

(5)  심판이냐? 구원이냐? 열방을 두 가지로 분류하고 또한 만민을 그렇게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라고 이사야가 은근히 시사해주고 있는가?

(6)  여호와의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자들이 그 밤에 행하는 세 가지의 행사는 무엇인가?

(7)  이사야는 왜 마음에 즐거움을 얻는 것과 이스라엘의 반석에게 나아가는 것을 직결시키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가?

이상 7가지 질문사항에 대하여 먼저 나름대로 말씀 가운데 묵상하시고 그 결과를 스스로 정리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말씀에 대한 묵상이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 사이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스스로 만든 질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규명해보는 작업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지혜나 지식만으로 그 해답을 모두 얻을 수 없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드러나지 아니하고 있는 숨겨진 의미에 대해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깨우침을 달라고 간구를 해야만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관건이 됩니다. 따라서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은 그 자체 하나의 간절한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묵상을 차제에 스스로 시작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좋은 결과를 얻게 되신다면 그것은 앞으로 분명히 여러분들의 가치관과 행동의 변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부디 그러한 기대를 가지시고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말씀묵상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제 나름대로의 묵상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이사야는 여호와의 이름이 왜 가까운 곳이 아니라 원방에서부터 오고 있다고 예언하고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여호와로 섬기고 있는 민족이 선민들입니다. 그들 선민의 사회를 벗어나게 되면 이방세계입니다. 그 이방세계는 두 개로 나누어볼 수가 있습니다. 유다의 근방과 원방입니다;

훗날 선민의 나라 유다 왕국이 망하고 나면 그 백성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제국에 흩어져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흩어져서 살고 있는 그곳을 근방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특징은 하나님신앙을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선민들이 함께 살고 있기에 그 이방의 백성들에게도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선민의 사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원방에는 그러한 기회가 없습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을 전혀 섬기고 있지 아니하고 있는 먼 이방인들의 땅이 바로 원방의 개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 먼 이방인의 땅 원방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30:27a). 그들 유물론적인 세계관에 젖어서 살고 있던 원방의 이방인들이 왜 창조주 여호와의 이름을 갑자기 부르게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바로 그 다음 구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쨌든 원방에서부터 여호와의 일이 심상하지 아니하게 발생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신앙을 지니고 있는 백성들이 바짝 정신을 차려야만 합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여호와의 불붙는 진노빽빽한 연기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원방의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의 역사가 마침내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상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인내하실 수 없는 한계상황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5:16, 왕하21:11).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이 붙고 있습니다(30:27b). 그러한 상태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자 강림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면목을 감추고 있다는 표현이 역시 빽빽한 연기입니다(30:27c). 그 옛날 시내 산에 강림하신 사례를 기록하고 있는 모세의 다음 묘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19:16),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가마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19:18).

참고로, 이 땅에 강림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진면목을 빽빽한 구름으로 숨기고자 하실까요? 그 이유는 그 진면목인 얼굴을 직접 보게 되는 피조물은 전부 죽임을 당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33:20).

셋째로,여호와의 입술에 분노가 차고 그 혀에 불이 붙게 되는 것이 왜 재앙인가?”; 본래 피조물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으며 그 입과 혀에서 나오는 생명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에너지를 얻고 있습니다. 모세의 기록과 그리스도의 증언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1:3),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하시니”(8:3, 4:4).

그런데 지금 창조주 하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창조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생명의 말씀도 아니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고 있는 생기도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입술에서는 분노의 말씀이 쏟아지고 있습니다(30:27d). 그 혀에서는 맹렬한 불기운이 품어지고 있습니다(30:27e).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피조물에게 너무나 실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6:11-13). 특히 노아의 홍수 때처럼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고 계십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6). 그래서 이제 모두 없애버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넷째로,여호와의 거친 호흡이 열방과 만민을 완전히 쓸어버리기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스스로 한번 자제를 하시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세상과 함께 완전히 없애버리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 최종심판 직전에 갑자기 멈추시고 계십니다. 이사야의 본문예언을 살펴보면, 표현상 하나님의 호흡이 사람들의 마지막 숨통을 조이고 있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그의 호흡은 마치 창일하여 목에까지 미치는 하수(河水, 강물) 같은즉”(30:28a).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옥석을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영생(永生, eternal life)이냐?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이냐?를 최종판정하기 전에 마지막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면 그 판단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 점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쉽지 아니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뒤이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심판이냐? 구원이냐? 열방을 두 가지로 분류하고 또한 만민을 그렇게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라고 이사야가 은근히 시사해주고 있는가?”; 영생이냐? 아니면 영벌이냐?를 구분하게 되는 판단의 기준에 대하여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멸하는 키로 열방을 까부르며, 여러 민족의 입에 미혹하는 재갈을 물리시리니”(30:28b);

(1)  농부가 키질을 한다고 하는 것은 알곡과 지푸라기를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바람이 부는 곳에서 키질을 하게 되면 알곡은 무게가 있어 실하므로 그대로 키에 남게 됩니다. 하지만 겨와 지푸라기 같은 것들은 가벼워서 그대로 바람에 날려가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키질을 하여 알곡을 거두어 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분류의 방법을 벌써 시편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1:4).

(2)  마지막으로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진정한 것인지 형식적인 것인지를 알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미혹하는 영들에게 한번 더 성도들을 미혹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사탄이 옥에서 나와서 마지막으로 세상을 미혹하여 하나님께 대항하는 장면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20:7-10). 그 이해하기 어려운 계시가 본문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예 다시는 다른 변명을 할 수 없도록, 마치 그 입에 재갈을 물리듯이, 마지막 미혹이라는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예언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참고로, 미혹하는 영들이 성도들을 시험하는 방법은 그 옛날과 똑 같습니다;

1)    사탄의 영이 깃들어 있는 뱀이 교활하게도 하와를 유혹하고 있습니다(3:1-6). 제일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의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의심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어도 죽지 않는데 하나님이 고의적으로 반드시 죽는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2)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진심에 대한 의심입니다(5:9, 45, 6:35, 8:35, 14:1-3). 하나님의 진심은 인간사랑이 아니고 인간을 영원히 종으로 부리는데 있다는 주장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진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무서운 미혹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가장 좋은 열매인 선악과를 주시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그 진심에 대한 곡해는 무서운 시험으로 다가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게 되면 말씀대로 죽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라는 뱀의 주장입니다. 사실은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되어 선과 악에 대한 심판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지 아니하고 있다는 미혹입니다”(3:1-5 의역). 결국 하나님은 피조물인 그들이 하나님처럼 창조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있다는 사탄의 주장입니다.

4)    피조물이 창조주처럼 되겠다고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선한 청지기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벗어나게 되면 그것이 타락입니다(14:12-15). 악한 영의 지배를 허용하고 말게 됩니다. 그 순간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13:27).

여섯째로,여호와의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자들이 그 밤에 행하는 세 가지의 행사는 무엇인가?”; 선민들은 여호와의 절기를 잘 지키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제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세 절기 곧 유월절, 맥추절, 그리고 수장절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습니다(23:14-19).

거룩한 절기가 되면 그 밤에 다같이 노래하며 피리를 불고 여호와의 산으로 간다고 이사야가 증거하고 있습니다(30:29a). 절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성전으로 입장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피리를 불면서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국내외 유대인들의 각 회당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가 되고 백성들이 그 말씀을 듣고 외우게 됩니다. 실로 선민들은 절기를 그렇게 뜻 깊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연중행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사실은 이사야가 주장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마지막 미혹에서 벗어나자면 그 이상의 신앙적인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일곱째로,이사야는 왜 마음에 즐거움을 얻는 것과 이스라엘의 반석에게 나아가는 것을 직결시키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가?”; 이사야가 하나님신앙의 반석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30:29b). 이 세상을 이기는 신앙(16:33), 그리고 모든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견고한 신앙의 본에 대하여(4:1-11)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 모범과 반석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메시아를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종말심판의 문전에서 마지막 미혹을 이기자면 그리스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이사야의 상징적인 예언입니다(30:29).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음을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4-25),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먼 땅 원방에서부터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이 오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를 해야만 합니다;

(1)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그 먼 땅에 먼저 여호와의 심판이 임하고 있으므로 성도들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선적인 관심을 두어야만 합니다.

(2)  그리고 최종심판을 앞두고 멸망의 목전에서 잠시 마지막 기회를 제공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만 합니다.

(3)  알곡과 겨를 키질을 하여 구분하듯이 그렇게 구분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열매 맺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만 합니다.

(4)  마지막으로 그저 종교행사에만 참석하는 신앙생활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성전예배에 참석하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믿음의 반석인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는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5)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깨달아 생활화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어렵다면 그리스도의 일생을 음미하면서 그 모범을 따라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 된 도리입니다.

  끝으로, 그리하면 이 세상에서 사탄의 모든 시험을 이기고 영생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그와 같은 교훈을 풍성하게 주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이 바로 본문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