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37강(사30:18-2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0월 25일(주일)
백성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기다리심, 은혜, 긍휼, 공의 등에 대한 이사야의 설명(사30:18-22)
제29장 제23-24절에서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하여 첫째, 거룩하신 이 둘째, 경외의 대상 셋째, 총명과 깨달음을 주는 하나님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1) 하늘보좌에 계시는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 (2) 인간의 몸으로 오시는 메시아 그러나 경외의 하나님, (3) 성도들에게 총명과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내주 역사하시는 하나님 등으로 새겨볼 수 있다고 이미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존재와 입체적인 역사하심을 시사해주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이 벌써 터져 나오고 있는 이유는 그 내용이 이스라엘의 구원의 과정과 직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내용을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성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환난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습니다(사30:15). 하지만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지도자와 백성들은 달리 행동을 하고 맙니다(사30:16). 그 때문에 제사장나라가 망하고 일부만이 살아남아서 산마루 위의 기치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사30:17). 그것은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장차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어주시는 메시아의 깃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사30:15-17 의역).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어주시면 어떠한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는 것일까요? 그 답변을 상당부분 본문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그와 같은 시각에서 본문의 각 구절을 살펴보면서 그 함축된 의미를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30:18);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하나님이실까요? 아니면 구원의 하나님이실까요? 겉으로 보면, 창조주는 두려우신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심판이 아니라 부디 구원으로 나아오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사30:18a, 요3:16-17, 빌2:5-11). 단지 기다리고 계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때가 되면 메시아를 보내셔서 다시 한번 강력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고(사30:18b)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깨닫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사30:18c).
선지자 이사야는 동족인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장차 나라가 망하는 환난을 당하고 유민으로 살게 되는 고생 길에 접어든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예지하고 있습니다(사30:20a). 그러나 그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메시아를 보내어 놀라운 은총과 긍휼을 베푸셔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전하는 백성으로 살아가게 만드실 것입니다.
둘째로,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니라”(사30:19); 이사야는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백성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시온’과 ‘예루살렘’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사30:19a). 훗날 메시아가 오시는 그곳 그 땅의 백성들을 왜 두 가지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을까요? 언뜻 보면, 같은 의미입니다. 시온이 바로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강조용법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다른 뜻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시온’은 다윗의 성이 있는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수도를 말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훗날 다윗의 후계자가 그들에게 오셔서 이스라엘 제국을 회복하고 시온의 영광을 온 세상에 떨칠 것을 암시하고 있는 선민사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2) 그러나 ‘예루살렘’은 다릅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이란 도시에 누가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금방 그 의미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이 함께 살고 있는 지명이 바로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선민의 구원을 위하여 오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선민과 이방인 모두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사해주고 있는 용어들이라고 하겠습니다.
(3) ‘통곡’과 ‘부르짖는 소리’의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사30:19b). ‘통곡’은 그냥 목놓아 우는 것입니다. 그저 큰 소리로 울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애통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르짖는 소리’는 그냥 목을 놓아 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대상을 향하여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일까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무엇을 부르짖고 있을까요? 한 마디로, 살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해달라고 하는 울부짖음입니다. 그러므로 그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응답을 하십니다(사30:19c). 그 응답이 장차 구주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어주시는 것입니다.
(4) 이사야는 메시아의 오심을 미리 알고서 심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가 사랑하고 있는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이 은혜로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마음속으로 동족의 구원을 간절히 소망하면서 하나님의 응답과 메시아의 오심을 증거하는 내용을 이와 같이 그의 선지서에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사30:20); 유다 왕국의 백성들에게 환난과 고생이 밀어 닥치고 있습니다(사30:20a). 그들의 제사장나라가 이방인들의 제국에 의하여 망하게 됩니다. 그것이 엄청난 환난입니다. 그리고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오랜 세월을 지내게 됩니다. 그것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입니다. 도대체 이방 제국의 치하에서 왜 선민인 자신들이 수치스러운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왜 역사를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일을 행하고 계신 것일까요?
이사야는 하나님의 숨겨져 있는 그 알 수 없는 역사섭리의 비밀을 가르쳐줄 스승께서 장차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사30:20b). 그 스승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것이기에 유대인들이 훗날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까지 말해주고 있습니다(사30:20c). 요컨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가르쳐주기 위하여 스승으로서 이 세상에 오시는 분이 바로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넷째로,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30:21); 영적인 스승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가 어떻게 제자와 성도들에게 가르침을 베풀 것인지 그 교수법의 특징을 이사야가 몇 가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첫째, 사람들이 신앙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뒤쪽에서 관찰하고 계십니다. 오른 쪽으로 치우쳐있는지 아니면 왼쪽으로 치우쳐있는지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결과 어떻게 교정해야 ‘바른 길’(사30:21c)로 갈 수 있는지를 말해주십니다. 그것이 ‘네 뒤에서’(사30:21a)라고 하는 표현이 의미하고 있는 바라고 하겠습니다.
(2) 둘째, 메시아는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인간의 몸으로 살아가시고 있는 스승님이십니다. 따라서 사람의 음성인 ‘말소리’(사30:21b)로써 가르침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의문사항을 인자(人子, son of man)인 메시아에게 질문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대답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속 시원하게 인간의 말로써 설명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공생애를 살게 되는 제자들은 스승과 같이 먹고 마시며 여행을 하게 됩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대하여 직접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입니다.
다섯째로,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사30:22); 이사야는 이 대목에서 우상의 종류 두 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나무로 조각한 우상이 있습니다(사30:22a). 둘째, 쇳물을 부어서 만든 우상이 있습니다(사30:22b). 그 가운데 주신(主神)으로 섬기는 우상은 후자입니다. 그래서 은이 아니라 금박을 입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나안에서는 ‘바알’이 주신이며 부어서 만든 바알 신상에 금박을 입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인으로 만들고 있는 ‘아세라’는 나무를 깎아서 아름답게 만든 목상(木像)이며 은박을 입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금과 은은 귀중하고도 비싼 금속입니다. 고대 유다 왕국에서는 금화와 은화를 제조하여 통용하지를 아니하는 대신에 금괴와 은괴 자체를 돈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상에 금박과 은박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을 고귀한 신으로 모시고 섬긴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한 꺼풀을 벗기고 보면, 추악한 사람들의 속내가 다음과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되로 주고 말로 받겠다고 하는 심산입니다. 비싼 금칠과 은칠을 해주었으니 그 답례로 자신들에게 부디 금덩이와 은덩이를 안겨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것은 황금만능주의적인 사고방식이며 기복신앙입니다.
그렇게 타락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큰 깨달음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가르침을 베풀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올바른 하나님신앙의 모습을 알게 된 성도들이 세속적으로 오염된 종교생활을 더럽게 여기고 우상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사30:22c). 이사야는 그 은혜가 동족들에게 하루 속히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본문의 예언을 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심판의 하나님보다는 구원의 하나님을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비록 선민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제사장나라가 망하는 환난을 당하고 백성들이 이방제국의 치하에서 오랜 세월 살게 되는 고난을 당하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래 기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메시아를 보내셔서 구원과 긍휼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한번 더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부디 세상적인 이익을 구하여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 정신에 비추어 장차 오시는 메시아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컨대, 그와 같은 내용을 풍성하게 설명하고 있는 글이 바로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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