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36강(사30:15-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0월 24일(토)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을 얻자면 어찌하여야 하는가?(사30:15-17)
이사야는 본문 첫머리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쉽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날뛰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파멸을 당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겨우 하나님의 기치에 모여든 남은 자들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 곧 하나님신앙이 무엇인지 장차 온몸으로 보여줄 메시아와 함께 열어가는 복음의 시대를 미리 예고하고 있는 예언으로 보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각 구절을 검토하면서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사30:15);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세 가지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먼저 이스라엘의 구원을 원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사30:15a). 이사야가 보기에 동족인 선민들이 하나님신앙보다 세상적인 방법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특히 엄청난 국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있습니다(사30:2). 그들은 앗수르가 침입해오자 종주국인 애굽에 군사원조를 요청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기에 바쁠 따름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신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불신앙입니다.
(2) 그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제사장나라를 멸망시켜버리실 것입니다(사30:5, 13-14). 그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는 슬프기 그지 없습니다(사29:1). 그러나 그 예언을 수 차례 동족들에게 전하면서 그가 확실하게 깨닫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와 같은 참혹한 예언을 미리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달리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선민들의 회개와 하나님신앙의 회복을 간절히 원하시고 계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신 있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사30:18a).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구원 베푸시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첫걸음입니다.
(4) 다음은 하나님께로 조용히 돌이켜야만 합니다(사30:15b). 적들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내침을 하고 있으므로 그 수습이 급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방법이든지 적을 막아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고 재빨리 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조용히 하나님께 먼저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왜 그와 같이 이치에 덜 맞는 말씀을 하시고 계실까요? 위급한 상황이므로 먼저 급한 불을 이러한 방법으로 빨리 진화하라고 그것부터 지시를 해주셔야만 하실 터인데 전혀 그리 하시지를 아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5) 그와 같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태도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을 했다가 실족하게 된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전쟁은 급한데 대 사사이며 대제사장인 사무엘의 걸음이 더디기만 합니다(삼상13:8). 적들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나가고 있습니다. 군사들은 빨리 제사를 드리고 전투를 시작하자고 성화입니다. 더 이상 지체를 하다가는 군사들이 흩어질 것만 같습니다. 마침내 현실을 감안하여 사울 왕이 결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자신도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므로 사무엘을 대신하여 간단하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전쟁을 시작하고자 한 것입니다(삼상13:9).
(6) 사울의 제사가 끝나자 마자 사무엘이 도착을 하고 있습니다(삼상13:10). 그 결과 전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무엘과 그의 군대에 의하여 전쟁의 승리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블레셋의 군대에 자중지란(自中之亂, intra conflict and struggle)이 일어나게 하여 이스라엘이 어부지리(漁父之利, unexpected gain)를 얻게 됩니다(삼상14:20-23). 한 마디로 전쟁의 승패가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7) 사울 왕은 전쟁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떠나서 제멋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있는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영으로 임재하실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창6:3, 삼상2:30, 13:13-14, 16:14). 기본적으로,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성립이 될 때에 하나님의 영이 임재를 하시고 생명살림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영생으로 이어지는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8) 그런데 영생의 문제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당장 세상적인 구원에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다른 방법을 강구하게 되고 영생의 하나님께서는 떠나버리시게 됩니다. 그러면 백 년 남짓한 인생을 살게 되고 모든 것이 끝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결과를 원하십니까? 그러하지 아니하다면 조용히 하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십시오. 모든 생명을 살리고 자신에게 영생과 구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드디어 터져나올 것입니다(창4:25-26, 17:15-21, 21:1-7).
(9) 이사야는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여야 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30:15c).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첫째,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온 사람 가운데에서도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기다리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나아왔다는 그 사실만으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든 것이 다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나가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사55:8-9).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잠잠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달을 때까지 조용해야만 합니다. 대충 알겠다고 그냥 뛰쳐나가서 함부로 행동을 했다가는 난리가 나게 됩니다.
2) 둘째,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고 그 방법에 자신을 맡겨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기가 일쑤입니다. 그러하므로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의 생각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조율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정답은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이미 다음과 같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수술을 받아야만 하는 환자와 같습니다. 수술대 위에 잠잠히 올라가서 전문의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 수술을 받아야만 합니다. 신뢰함으로 전적으로 맡기고 마치 마취를 당한 것처럼 조용히 있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발생합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사30:16); 만약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제 마음대로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적을 막아내고자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패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의 팔이 내려간 경우와 같기 때문입니다(출17:11). 물론 일부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둘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전투를 치른 결과 전체적으로 전쟁의 승패는 패전으로 귀결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패전으로 이어지는 이유를 이사야가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게 되면 결국은 말을 타고 전투를 치르거나 도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빠른 말을 선택하여 달릴지라도 적들의 기마가 더 빨리 따라붙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간교한 야곱이 자신보다 더 간교한 외삼촌 라반을 만나게 되듯이(창29:25-30, 30:34-36)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게 진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사30:16 의미적 해석).
셋째로,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사30:17); 국력(國力, national power)을 평가할 때에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합니다. 우선 눈에 보이는 상대적인 비교부터 합니다; 군사력의 차이, 국민의 수 및 영토의 크기, 부존자원과 산업생산력, 자본력과 과학기술의 차이 등입니다. 그 다음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역에 대하여 평가를 합니다; 군대의 사기(士氣)와 국민의 정신전력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런데 사기와 정신전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하나님신앙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굳건히 믿고 의지하고 있으면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롬8:2).
반대로, 하나님신앙을 떠나서 다른 세상적인 것들을 의지하여 적들을 물리치고자 할 때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물밀듯이 밀려오게 됩니다. 그와 같은 경우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에 나섰을 때 가나안 원주민들이 느끼고 있는 공포에서 다음과 같이 잘 엿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2:9-11).
그렇게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면 전쟁은 군사의 수의 차이가 아닙니다.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사기가 떨어진 군사들이 오합지졸이 되어 제 한 목숨을 구하고자 모조리 도망을 치기에 바쁩니다(사30:17a). 그 결과 제사장나라도 망하고 백성들이 거의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겨우 일부가 살아남게 됩니다. 그들이 살아남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기치를 바라보고 달려갔기 때문입니다(사30:17b). 장차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이 내걸고 계시는 그 깃발이 높은 산에서 펄럭이게 될 것입니다(사30:17c).
그 깃발은 역사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그리스도가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그곳 무덤에서 삼일 후에 발생하게 되는 승리의 부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마27:50-28:10). 그와 같은 부활과 영생의 하나님의 깃발이 펄럭이게 되었으니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나아가서 부활과 복음의 증거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마28:18-20, 눅24:44-48).
결론적으로, 하나님신앙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하여 이사야의 말씀은 크게 도움이 됩니다; 고난과 환난이 찾아올 때에 무엇보다도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흔들리지 말아야만 합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처방을 내리기 전에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대안이 주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드러났을 때에 자신의 의견을 하나님의 뜻에 조율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그 작업을 완료하셨듯이 제자들도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두려움이 물러가고 환난이 숨을 죽이게 됩니다. 창조주의 능력이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신앙을 보전하고 하나님의 생명 살리는 새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방법을 이사야가 아주 쉽게 시사를 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처럼 하나님의 깃발이 펄럭이는 곳으로 도망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그리스도가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시고 부활하신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입니다. 그 푯대를 바라보고 신앙의 길을 달려가는 자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주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훗날 개인적으로 그와 같은 길을 끝까지 달려가고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다음과 같습니다. 아무쪼록 본문과 관련하여 깊은 호흡으로 다시 한번 음미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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