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34강(사30:6-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0월 22일(목)
애굽 제국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사대주의(事大主義) 나라들에 대한 이사야의 강력한 경고(사30:6-7)
성경말씀은 최소한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생명의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면초가(四面楚歌, 마치 패장 항우의 곧 죽을 운명을 일깨워주듯이 그를 사면에서 포위하고 있는 한나라의 군사들이 초나라의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고 있는 것, 절체절명의 세상적인 위기를 말함)에 빠져있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구원의 빛을 던져주고 있습니다(사30:18-33). 둘째, 두려움의 실체가 영적인 것임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롬8:1-6).
그런데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미구(未久, 멀지 않아)에 국난을 당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고자 달려가게 되는 애굽 제국의 실체에 대하여 미리 밝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애굽의 영적인 실체는 라합”(사30:7)이라는 것입니다. ‘라합’은 큰 악어로 묘사가 되고 있는 악한 영이며 평소 나일 강에 살면서 애굽 백성들을 지배하고 있는 강한 존재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애굽으로 원군을 청하러 급히 사절을 파견하게 되는 유다 왕국은 “더 이상 제사장나라가 아니며 네겝 짐승과 같다”(사30:6)라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짐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역시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개념입니다. 훗날 그 용어는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서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계13:1-18).
어쨌든 본문에서 이사야는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선택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그 결과는 허망할 뿐이라고 거듭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상의 나라, 악한 영이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 달려가서 원조와 구원을 요청하고 있으니 그것은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의 제대로 된 정책결정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사야의 예언은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피조물들의 모든 삶에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명심하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살펴보면서 그 깊은 의미를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네겝 짐승들에 관한 경고라. 사신들이 그들의 재물을 어린 나귀 등에 싣고, 그들의 보물을 낙타 안장에 얹고, 암사자와 수사자와 독사와 및 날아다니는 불뱀이 나오는 위험하고 곤고한 땅을 지나 자기에게 무익한 민족에게로 갔으나”(사30:6); 용어들에 대한 개념풀이를 해보면서 구절의 의미를 음미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네겝’은 반(半)사막성 기후를 지니고 있는 광야 또는 사막이며 주로 가나안 남부의 메마른 광야지역을 가리키고 있는 용어입니다. 헤브론과 그 이남지역이 그러합니다. 강수량이 매우 적고 큰 나무가 없으며 관목이 약간 있을 뿐입니다. 사철나무로서는 유일하게 에셀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늘 잎을 가지고 있지만 뿌리를 자기 키의 3배 정도나 깊이 뻗어서 사철 푸른 색을 띠고 있습니다.
(2) 참고로, 그 옛날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그랄 왕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한 후에 하나님에게 너무 감사하여 에셀 나무를 심고 있습니다(창21:33). 그 뜻은 에셀 나무처럼 사철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잘 하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메마른 땅 네겝이지만 그곳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은혜의 땅이라고 하겠습니다.
(3) ‘짐승’은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세상권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관련구절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 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13:6-8). 이사야는 하나님을 버리고 애굽을 섬기려고 하는 유다 왕국이 마치 짐승과 같다고 질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낙타 안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낙타 안장’에 야곱의 애처 라헬이 친정 아버지에게서 훔친 보물 드라빔을 감춘 적이 있습니다(창31:34). 그와 마찬가지로 귀한 보물을 운반할 때에 사신(使臣, 사절로 오고 가는 신하)이 직접 자신의 낙타안장에 숨기고 길을 떠납니다. 기타 재물은 낙타의 등과 나귀의 등에 짐으로 싣게 됩니다.
(5) ‘유다에서 애굽으로 가는 길’은 험합니다. 우선 지형적으로 메마른 광야인 네겝이 사막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시나이 반도를 지나야 합니다. 그곳에는 두 가지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야와 사막에는 독을 가진 뱀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약탈민족들이 암사자와 수사자처럼 무리를 지어 출몰하는 지역입니다(출17:8). 유다의 사신이 지금 많은 재물과 보물을 챙겨서 애굽의 황제인 바로에게 원군을 청하고자 가고 있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화적 떼의 좋은 먹이 감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6) 그와 같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애굽으로 간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까요? 이사야는 한 마디로, 그것은 허망한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그와 같은 선민들의 불신앙을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7) 하나님 대신 구원을 호소하기 위하여 우상의 나라 애굽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꼬임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선민들이라고 자랑을 하고 있으면서 그들의 선택은 세상적인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탄의 사주를 받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영적인 짐승들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계획은 우상의 나라 애굽과 함께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를 섭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컽었느니라”(사30:7); ‘라합’에 관하여 욥기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을 전제로 하여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욥기의 내용을 먼저 살펴봅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 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욥9:13),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욥26:12).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라합과 그 추종자들을 치시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동족들이 세상나라 애굽을 찾아가서 구원을 호소하는 것은 그 결과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사30:7a).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가만히 앉은 라합”(사30:7b)이 될 수밖에 없도록 애굽의 힘을 먼저 무력화(無力化, become no power)시켜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가 임하도록 이사야가 소원하고 있는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사51:9).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동족인 선민들이 앞으로 수 많은 제국의 군대의 침입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믿고서 성전으로 나아가서 구원을 호소할 것인가? 아니면 종주국인 애굽을 찾아가서 원군을 청할 것인가? 이사야는 훗날을 위하여 모범답안을 미리 제시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무시하지 말고 부디 적의 침략을 초래하고 있는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매어 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래에 펼쳐지는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선택은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장래의 역사 가운데 애굽 제국도 망하고 제사장나라도 망하고 말 것입니다. 우상의 나라 나일 강의 지배자 ‘라합’이란 괴물이 하나님 앞에 무력화되고 멸망을 당하는 것이 역사섭리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그 귀한 영혼을 버리고 힘만을 숭상하는 ‘짐승’처럼 괴물 ‘라합’을 찾아가고 있는 선민들 역시 멸망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은 안타까운 미래를 조망하면서 이사야는 믿음회복의 길을 다시금 제시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멀지 않아 그 점을 다시 살펴볼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무익하고 허망한 시행착오를 그만큼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짐승의 길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길로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살리고 죽을 운명을 부활과 영생의 운명으로 바꾸는 길입니다. 그 은혜로 나아가는 방법을 이사야의 예언에서 시사 받을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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