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33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7. 19. 13:41

이사야 강해 제133(30: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021()

 

하나님께 여쭈어보지도 아니하고 강대국 애굽을 의지하게 되면 어찌되는가?(30:1-5)

 

사대주의’(事大主義)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잘 섬겨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사상입니다. 가까운 예를 들어 보자면, 조선이 중국을 상국(上國)으로 잘 섬겼기 때문에 일본군 18만명이 내침을 했을 때에 당시 명 황제의 도움을 받아서 적들을 물리칠 수가 있었다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실제로, 종주국의 보호를 받아 그 그늘에서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조선은 중국의 황제를 극진히 섬겼습니다. 조선 국왕의 사대주의적인 외교적 노력은 참으로 눈물이 겹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조선의 왕은 황제 앞에 신하라는 분수를 지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1)  자신의 칭호를 황제폐하’(皇帝陛下)가 아니라 국왕전하’(國王殿下)라고 스스로 한 단계 강등을 하고 있습니다. 그 칭호는 황제의 나라에 있어서 태자나 제후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신하와 백성들도 황제폐하 만만세’(皇帝陛下 萬萬歲)를 외치지 아니하고 국왕전하 천천세’(國王殿下 千千歲)를 외치고 있습니다.

(3)  또한 수시로 황제의 나라에 조선의 특산품을 조공(朝貢)으로 바칩니다. 물론 중국의 황제는 제후에게 은혜를 베풀듯이 조선 왕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서 조공의 가치보다 몇 배나 더 되는 답례품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4)  그것이 일종의 공무역’(公貿易)의 방식으로 정착이 됩니다. 그러자 조선에서 너무 자주 조공을 바친다고 하므로 중국에서는 그 횟수를 제한까지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나라가 이웃의 강대국을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그 보호를 받아 자국의 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그와 같은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을 때는 문제가 심각합니다. 세상나라 애굽을 상국으로 섬기면서 그 도움으로 제사장나라의 안보를 확보해나간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하는 태도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경우(26:2-5, 46:1-4)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애굽에 군사원조를 요청하여 국난을 타개하라고 지시를 하시고 있을 때를 제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신앙을 버린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이사야가 그러한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잘못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구절을 따라가면서 다음과 같이 묵상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로,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를 더하도다”(30:1); 이사야가 동족인 선민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첫 번째 대목입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의 조상인 야곱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서부터 야곱은 에서와 서로 먼저 태어나기 위하여 경쟁을 한 사람입니다(25:22-26). 장자가 족장의 지위를 상속하게 되어 있는 가부장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all or nothing게임과 같습니다. 그 집안에 있어서 장남이 차기 족장이며 훗날 왕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 반면에 지차들은 그의 가신이 되어야 합니다. 에서보다 힘이 약한 야곱은 둘째로 태어납니다.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서 태어났지만 그 몇 초 차이 때문에 평생 쌍둥이 형 에서의 종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신세입니다.

(2)  그 타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하여 야곱은 남은 세월을 투쟁의 삶으로 일관합니다. 그가 동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이 아니라 세상적인 꾀와 방법들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이 하나님의 것보다 더 낫다고 여기고 있는 패역함’(30:1a)입니다;

1)    형 에서가 시장한 틈을 노려서 그의 장자의 명분을 얻고자 합니다. 먹을 것을 주고 뺏어오고 있는 것입니다(25:29-34). 하나님께 여쭈어보거나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행위가 아닙니다.

2)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차기 족장에 대한 축복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음모에 동참하여 그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27:6-18). 하나님께 여쭈어보고서 행한 행위가 아닙니다. 따라서 두 가지 경우 모두 이사야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로 말미암지 아니하며”(30:1b)라고 그 잘못을 지적할 만한 것들입니다.

3)    외삼촌 라반과 머슴살이 계약을 맺을 때에도 야곱의 관심은 오로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한 것입니다(29:15-20). 하나님께서 그 계약을 어떻게 생각하실 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맹약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이사야가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30:1c)라고 지적할 만한 일입니다.

(3)  정리를 해보자면, 하나님께 여쭈어보지 아니하고서 제 마음대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한 계획을 욕심껏 세상적인 방법으로 밀어 부치는 것이 죄에 죄를 더하는 행위입니다(30:1d). 그리고 비록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따라서 실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행과정에 있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간섭을 배제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2)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3)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30:2-3); 이웃강대국을 상국으로 또는 종주국으로 잘 섬긴다고 하여 자국의 안보와 평안을 확실하게 유지할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서,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다고 한다면 애굽 제국을 종주국으로 섬긴 유다 나라와 가나안의 왕국들이 메소포타미아의 패권국들에 의하여 수 차례 멸망을 당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30:2-3).

조선의 역사도 그러합니다. 조선의 왕과 신하들은 중국의 황제가 천하의 주인인 줄 알고 그를 섬겼습니다. 그 그늘에서 국가안보도 유지하고 왕의 권위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30:2b).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종주국 중국만 섬기라고 했기에 조선은 쇄국정책’(鎖國政策, 나라의 빗장을 채우는 것)으로 일관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일본과의 교류나 진출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역’(私貿易)도 불허했습니다. 그 결과 산업과 상업의 발전이 뒤떨어지고 자본주의의 발판이 생겨나지를 못했습니다. 더구나 서양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하고 제국주의’(帝國主義)가 새로운 식민지를 찾아서 동진’(東進)해오고 있음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종내에는 중국이 망하자 조선도 망하게 된 것입니다(30:3). 조선은 스스로 부국강병책이나 자주국방정책도 한번 추진해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30:2a).

어느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과 지혜를 따르고 있지를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일개 강대국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큰 나라부터 패망의 역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수치가 작은 나라에게로 파급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는 더 이상 세상나라의 강함을 의지하지 말고 강함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훗날 메시아를 보내셔서 그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실 것입니다(10:28).  

셋째로, “(4) 그 고관들이 소안에 있고, 그 사신들이 하네스에 이르렀으나, (5) 그들이 다 자기를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민족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리니, 그 민족이 돕지도 못하며 유익하게도 못하고, 수치가 되게 하며, 수욕이 되게 할 뿐임이니라”(30:4-5); 유다 왕국을 비롯하여 가나안에 위치하고 있는 왕국들은 동으로는 메소포타미아의 패권국, 서로는 애굽 제국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줄타기를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유다 왕국의 입장에서는 애굽 제국과의 관계가 정치적으로 더 긴밀합니다. 그 이유는 430년간 애굽의 치하에서 살아온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문물과 정치제도에 더욱 익숙하기 때문에 애굽 제국을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자국의 안보를 튼튼히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시대에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장악한 앗수르 제국이 서진을 해오고 있습니다. 주전 733년에 시리아 아람 왕국을 정복하고 11년 후에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마저 멸망시키고 맙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사신이 부리나케 애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당시에 유다 왕국은 애굽의 북동면에 자리를 잡고 있는 행정도시 소안’(zoan, ‘타니스로 보고 있음)에 상주공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전권대사가 소안을 들러서 현지의 사정을 파악한 후에 급히 멤피스 남쪽 90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정치중심지 하네스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이사야가 제4절에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표현은 이디오피아 왕가가 전체 애굽 제국을 다스리고 있던 제25왕조 때에 적합한 것입니다. 유다의 사절이 상 이집트로 가기 위하여 남하하여 하네스에 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구스 왕 디르하가가 군대를 이끌고 유다 왕국을 침입하고 있는 앗수르의 산헤립 왕과 전투를 벌입니다(왕하19:9, 37:9). 그러나 별로 성공적이지를 못합니다. 산헤립의 군대는 여전히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습니다(왕하19:8-13). 그러므로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유다 및 가나안의 왕국들)이 다 자기를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애굽)민족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리니, 그 민족(애굽)이 돕지도 못하며 유익하게도 못하고, 수치가 되게 하며, 수욕이 되게 할 뿐임이니라”(30:5).

유다의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이 애굽이 패전하는 것을 보고서 비로소 이사야의 예언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마침내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밖에는 이 세상에 의지할 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나라를 의지한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시고 부디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백성들을 살려주십시오”(왕하19:1-4, 14-19). 그 결과 하나님의 천사가 밤중에 앗수르 원정군 185천멸을 몰살시켜버리고 맙니다(왕하19:35, 37:36). 그것은 주전 701년에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예루살렘에 응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결론적으로, 구약에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외침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여기고 제대로 섬기라. 종이 주인의 지시를 따르듯이 하나님 앞에서 종의 법도를 지키며 반드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라(30:19-20).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지나치게 내세우거나 강대국의 힘을 의지하여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모두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30:1-5)”.

본문에서 이사야는 앗수르 대군의 침략을 맞아서 유다의 왕이 성전의 하나님을 먼저 찾지 아니하고 정신 없이 종주국 애굽으로 사신을 보낸 사실이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애굽의 바로인 구스 왕이 구원군을 이끌고 오지만 전투에서 승리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더구나 훗날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애굽의 제25왕조가 무너지게 되는 치욕의 역사를 맞이할 것입니다.

종주국의 운명이 그와 같다면 약소국 유다 왕국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풍전등화의 운명이며 전국이 앗수르 군대에게 짓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의 외침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습니다. 그 결과 다시 한번 그들을 살려주는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이사야의 예언은 계속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 번 예언이 반복이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로 추정이 됩니다; 첫째, 급하면 하나님을 찾다가 위기가 지나고 나면 다시 인간들이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 세 번 같은 말씀이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둘째, 선민들에게만 적용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웃나라와 이방인 모두가 들어야만 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그들 모두의 경우를 예로 들어가면서 구체적인 예언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극동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도 이사야의 예언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야만 하겠습니다. 여전히 그 말씀 가운데 생명살림의 역사가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