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31강(사29:17-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0월 19일(월)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사29:17-21)
제29장에 들어와서 이사야는 제1-14절에서 선민의 죄와 하나님의 벌을 먼저 기록하고, 이어서 제15-16절에서는 이방인의 죄와 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민의 죄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 수 있었던 다윗의 처음 마음가짐과 솔로몬의 초심(初心)을 선민들이 잊어버린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시온 성 예루살렘에 천도한 다윗 왕은 모든 전쟁을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께 여쭈어보고서 그 지혜를 얻어서 겸손하게 수행했습니다(삼하5:9-12, 19, 23, 7:28-29, 8:11-12, 14-15). 그 결과 이스라엘 제국을 형성하고 시온의 영광을 사방에 떨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진 친 성읍’의 의미입니다(사29:1b).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립하여 하나님께 바치게 되는 솔로몬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지혜만을 구하고 있습니다(왕상3:8-15). 백성들의 송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정하게 재판함으로써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의 의로움을 온 세상에 널리 전하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성전에 자리하시고 다윗 왕조와 제사장나라 이스라엘을 지켜주십니다(왕상9:3-5).
그런데 솔로몬이 먼저 하나님의 지혜를 겸손하게 구하던 신앙인의 자세에서 이탈을 하고 맙니다. 이방나라의 공주를 많이 부인으로 맞이하여 결혼동맹으로 이스라엘 제국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고자 합니다(왕상11:1-3). 그들에게 이방 신을 자신들의 우상으로 섬겨도 좋다고 허용하고 맙니다(왕상11:4-11). 그 결과 창조주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섬기는 신앙이 사라지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마치 조상신 여호와라는 특별한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번제단이 위치하고 있는 하나의 신전으로 인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 번제단이 바로 ‘아리엘’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제29장의 기록을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고 있습니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사29:1a). 그것은 선민 이스라엘의 영적인 타락을 슬퍼하고 있는 하나님의 통한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신앙이 사라진 선민들은 무늬만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들의 일상생활과 국가경영의 방법은 이방인들과 별로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마지막 회개의 기회로 훗날 그 땅에 메시아가 오시게 되지만 영적으로 어두워진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배척하고 맙니다. 나아가서 만민구원의 하나님 뜻을 전하는 메시아를 아예 죽여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방 땅에서 어떠한 새로운 역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제29장 제15-16절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는 이방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무신론이라는 사실을 먼저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이사야는 그러했던 이방인들의 기존 신관과 사고방식이 획기적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사야는 본문 제17-21절에서 어떠한 구체적인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각 구절을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이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를 밝혀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오래지 아니하여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기름진 밭이 숲으로 여겨지지 아니하겠느냐?”(사29:17); 이사야가 이방나라의 대표로서 ‘레바논’을 거론하고 있습니다(사29:17b). 그 이유는 레바논 땅에서 페니키아 왕국이 발전했는데 그 중심도시가 우상을 크게 섬긴 시돈과 두로이기 때문입니다.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만 살펴보더라도 아합 왕의 아내가 그 유명한 이세벨입니다. 그녀는 시돈의 제사장이며 왕인 옛바알의 딸입니다(왕상16:31).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알 신을 섬기는 무당 옛바알이 시돈의 왕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시돈은 우상 바알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시돈이 개척한 무역항이 바로 두로입니다.
여기서 이사야가 ‘기름진 밭’(사29:17c)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를 참고하면, 복음을 받아들여서 싹을 틔울 수 있는 옥토(沃土, 비옥한 토지)인 ‘좋은 마음 밭’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마13:18-24). 따라서 오래지 아니하여(사21:17a) 700년 후가 되면 메시아가 두로와 시돈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전하게 될 것입니다(마15:21-28). 그러면 이방인이며 바알 우상을 크게 섬기던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마11:21-22). 반면에 선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던 옥토 제사장나라가 사라지고 척박한 ‘숲’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사29:17d).
둘째로,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뜻은 그들 선민들이 이방나라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창12:1-4, 20:7, 23:6).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선민만의 구원과 민족적인 우월사상에 빠져서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차별했습니다. 이방나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아니했으며 그들 선민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복을 독점하고자 했습니다.
그 모습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선지서가 바로 ‘요나’입니다(욘1:2, 3:2-10). 그래서 훗날 메시아는 자칭 선민인 유대인들에게 요나의 표적과 교훈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단언하고 계십니다(마12:39-41, 16:4).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는 구약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를 못하고 있던 이방나라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사29:18a). 그들이 히브리정경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알아 듣고서 영적인 무지를 벗어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사야의 표현이 절묘하며 그 의미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어둡고 깜깜한 곳에서는 맹인이나 정상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그 어두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됨으로써 믿음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사29:18b 의역).
셋째로,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사29:19); 이방사람이라고 하여 모두가 우상을 섬기고 무신론(無神論)에 빠져 있는 오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에는 창조설을 믿으며 창조주의 존재를 찾고 있는 구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앞에 겸손하게 서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가 되면 메시아를 이 세상에 구원주로 보내어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지만 구원을 받게 되는 겸손한 자들이 얼마나 기뻐하게 될지 모릅니다(사29:19a).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자가 ‘가난한 자’입니다(사29:19b).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가난한 자는 강자에 의하여 짓밟히고 사회적으로 인간대접을 받지를 못하고 소외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가난한 자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곧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변화가 오게 될까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동일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선민들에게 애굽에서의 긴 나그네생활과 노예생활을 생각하면서 너희들은 율법을 준수하라고 하십니다. 그 뜻은 압제자 애굽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람을 노예로 부리지 말고 인간대접을 해주며 사회적으로 고아와 과부 등 가난한 자를 돌보아주고 살길을 마련해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출22:21-27).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라고 메시아가 훗날 유대 땅에 오셔서 똑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마25:40). 그런데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먼저 메시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사회에 살고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즐거운 복이 먼저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사29:19c).
넷째로, “(20)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21) 그들은 송사로 사람에게 죄를 씌우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하게 하느니라”(사29:20-21);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복음이 이방인사회에 먼저 전파되게 함으로써 장차 새로운 사회가 그곳에 형성되도록 할 것입니다.
그 사회의 모습을 이사야가 이미 예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사11:4),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9). 이사야는 이미 제11장에서 예언한 것 곧 메시아의 복음이 살아 숨쉬는 사회의 모습을 제29장 본문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예언 사이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사29:20a); 강포한 자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그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둘째, 부와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복음이 사회적으로 살아 숨쉬게 되면 먼저 폭력의 시대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평등의 사회가 도래하게 됩니다. 그 평등사회에서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가 송사를 통하여 약자에게 죄를 덮어 씌우게 되는 현상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사29:21a 반대해석).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는 것입니다(사11:4a).
(2)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사29:20b); 오만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 대신에 무엇을 내세우고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다수의견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들의 다수의 의견이 더 옳다고 상대적인 정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에 그러한 다수의 의견은 어디에서 결정이 되는 것일까요? 보통 그 장소가 성문(城門, the gate of castle)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만한 자는) 성문회의를 통하여 결정된 다수의견을 가지고 선지자 곧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의 잘못을 책망하고 있는 자를 죄인으로 몰아 정죄하고 있다”(사29:21b 의역).
(3) 요컨대, 복음이 제대로 사회에 정착하게 되면 그러한 오만한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그칠 것이라고 하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와 같은 사회에서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있는 자,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리더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사11:4b).
(4)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사29:20c);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누구일까요? 제11장 제4절의 말씀에 비추어보게 되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이며 악인”입니다(사11:4c). 그리고 제29장 제21절을 참고하면, “거짓말로 의인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사29:21c). 그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가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천하의 권세를 가지시게 되기 때문입니다(마28:18). 그 결과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들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요12:31). 참고로, 그리스도가 승천하심에 따라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그 일을 계속하실 것입니다(요16:8, 11).
결론적으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가 되고 창조주의 공의가 살아 숨쉬게 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가 본문에서 다시 한번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 기쁜 소식이 바로 메시아의 복음입니다. 그와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이사야는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흘러 넘치게 되는 미래를 메시아의 사역의 결과로 이미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사11:9).
본문에서처럼 우상을 심하게 섬긴 이방나라 레바논 땅에 메시아의 복음이 전파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 밭이 옥토가 되는 놀라운 변화가 도래할 것입니다. 반면에 메시아의 복음을 배척하게 되는 선민들의 땅은 버림을 받게 되고 그들의 마음 밭은 개간하기 어려운 숲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미래지사를 내다보면서 이사야는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더 많은 은총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더 깊은 구원의 섭리와 역사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 내용을 모두 기록으로 남기고 있기에 이사야의 선지서는 매우 풍성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도 동족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사야처럼 하나님께 매어 달려야만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과 역사섭리의 비밀을 깨달을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더욱 풍성한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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