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29강(사29:13-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0월 17일(토)
선민들의 죄와 하나님의 벌(사29:13-14)
본문에서 이사야가 동족인 선민들의 죄가 무엇인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지적하고 있는 선민들의 죄는 그 당시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 백성들에게 국한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월이 지나 선민의 나라가 망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과 유다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죄가 이사야 시대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훗날 유다 사회에 오신 메시아가 이사야의 예언인 본문을 인용하여 동일하게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서에서 찾아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7:5-9).
그 뿐만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시절 이방인 사도로 크게 활동을 하게 되는 사도 바울도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의 유대교적인 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바울의 명쾌한 지적 역시 본문 이사야의 언급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창조주의 공의)를 모르고 자기 의(사람들의 아전인수격인 정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1-4).
본문의 이해를 폭넓게 하기 위하여 도움이 되도록 사도 바울의 언급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을 더해보자면 그 뜻이 다음과 같습니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10:1); 바울은 동족들을 위하여 마음에 원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중언부언하며 하나님께 모조리 간구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의 뜻에 비추어서 필요한 사항을 걸러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가 강조하고 있는 깨달음의 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고전14:19).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10:2);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열심을 다하여 행동을 하게 되면 이단이 되기 쉽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는 행위가 되기 쉽다는 사실을 바울이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초대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의 주장과 행동이 그러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나서도 율법준수의 중요성을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격으로 강조하는 열심을 보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대 공회가 열리고 있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행15:1-21).
(3) “하나님의 의(창조주의 공의)를 모르고 자기 의(사람들의 아전인수격인 정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3); 하나님의 의는 창조주의 공의를 말합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입장에서 공평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고자 하는 만민구원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의 사고는 다릅니다. 자신들 선민만의 구원을 희구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집단이기주의에 물들어 있는 선민사상이 유대교가 내세우고 있는 정의입니다.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4); 그와 같은 유대인의 사회에서 메시아가 하나님의 공의를 부르짖다가 십자가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메시아가 자신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 기본정신이 무엇인가를 똑똑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옳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그를 무덤에서 살리심으로 증거해주고 있습니다(롬1:16-17). 그것은 선민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창조주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는 이사야의 본문말씀으로 되돌아가서 각 구절을 따라가면서 하나씩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사29:13a);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사야는 본문에서 판연히 다른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은연중에 전제하고서 그의 설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는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위함인가? 아니면 영적으로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이유를 발견하기 위함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이사야는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단지 입으로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다고 갈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농사의 신 바알과 다산(多産)의 미(美)의 신 아스다롯(또는 아세라)을 함께 우상으로 섬기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왕상16:31-33).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갈릴리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이에 거두니 보리떡 5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12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6:13-15).
메시아는 백성들에게 먹을 수 있는 떡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한다면 매일같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년 풍년이 들게 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큰 소리로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지시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백성들에게 그러한 목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하신 떡은 전혀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생명의 떡입니다(요6:48-51). 곧 믿는 자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줄 수 있는 십자가의 대속의 제사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완전한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 그리고 죽은 다음의 부활과 승천 등입니다.
둘째로,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29:13b); 이사야는 백성들이 말하는 것과 실제로 그들의 속마음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백성들이 여호와를 공경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제6장에 기록되어 있는 ‘쉐마’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평가를 하자면, 분명히 선민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수하고 절기와 제사를 성전에서 잘 지내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명기 제28장 전반부에 기록이 되어 있는 세상적인 축복을 풍성하게 받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그 복을 얻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율법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당장 싫고 손해가 나더라도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웃으면서 그렇게 헌신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속마음과 달리 애쓰고 있는 그들의 종교행위는 오로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자면 불합격입니다.
요컨대, 속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아니하고 있는 사탕발림의 신앙고백, 그리고 형식적인 제사와 남의 눈만을 의식하는 율법의 준수가 타락한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의 현주소라고 하는 이사야의 지적입니다. 그것을 훗날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외식이며 누룩’이라고 알기 쉽게 규정하고 있습니다(마16:6, 23:13).
셋째로,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c); 출애굽기 제19장에서부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전달해주고 있습니다(출19:7-8). 그 율법은 제사장나라에서 거룩한 백성들이 지켜야만 하는 법률과 같은 것입니다. 출애굽기 제20장에서는 그 법률의 대의와 대강이 하나님의 십계명으로 먼저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출20:1-17). 그러므로 거룩한 백성들은 사람의 계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로, 하나님의 계명을 생각하면서 그 취지에 따라 율법을 생활화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사회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취지를 윤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분명히 피조물의 형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출20: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론과 백성들은 애굽에서 배운 그대로 그들의 경험을 쫓아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놓고서 그것을 출애굽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출32:4-6).
그들의 잘못은 그 정도에서 끝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생활의 세부적인 규정을 마련함에 있어서 두 가지의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1) 선민생활의 규범이 되고 있는 율법이 그렇게 상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 공동체의 생활이 좀더 복잡해지자 시행세칙과 규칙을 만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때에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의 취지를 그대로 하위규정에 반영하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시행규정과 규칙을 정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편의를 마음껏 반영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인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율법의 세칙을 정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그러한 세칙은 이방인들에게는 불이익을 많이 초래하게 됩니다. 요컨대, 율법의 세칙으로 선민을 우대하고 이방인을 차별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 종의 해방이 안식년(安息年, 7년에 한번씩 땅을 쉬게 하고 사람들도 안식을 누림)에서 희년(禧年, 50년에 한번 기업을 무르고 종이 해방이 될 수 있음)으로 은연중에 바뀌고 있으며 이방인 종에 대해서는 희년의 해방에서조차 배제가 되고 있는 것이 그러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출21:2, 레25:39-46).
(2) 장로들의 경험과 지식을 너무 많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실제생활과 직결이 되고 있는 율법의 세칙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래 계명의 취지와 어긋나고 있다고 한다면 과감하게 삭제를 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좀더 많은 자유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혼증서의 발급조건을 세칙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실제로 운영함에 있어서는 훨씬 더 융통성을 두고 있는 관례가 그러한 것입니다(신24:1, 마5:31-32, 19:7-9).
넷째로,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사29: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 가운데 참으로 기이한 일을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200만명이 넘은 이스라엘 족속이 출애굽을 하게 되고 광야에서 40년간 생존한 일이 기적입니다. 적들을 섬멸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천체의 움직임을 중지시킨 경우도 있습니다(수10:13).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전투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이 그러합니다(출17:11). 더구나 이사야는 생전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앗수르 원정군 18만 5천명을 전멸시키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사37:36).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장차 더욱 기이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계시하십니다. 그 일이 무엇일까요? 그 어떤 세상의 지혜자나 총명한 명철자라고 하더라도 꿈도 꿀 수가 없었던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행위입니다;
(1)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과 무덤 속 부활사건입니다(사52:13-53:12). 그것은 가장 처참한 실패가 가장 위대한 승리를 몰고 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죽으심이 자신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의 제사라는 사실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차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한다는 선언입니다(요3:13-15, 행2:37-42). 그리고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게 되면 부활의 영광이 찾아오는 것입니다(롬6:4).
(2)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과 내주 역사하심입니다(사11:1-2, 욜2:28-29, 행2:1-4). 하나님의 영이 성도에게 임하여 평생 동안 내주하여 역사하신다고 하는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은혜입니다. 선지자들도 그와 같은 영원한 성령님의 내주하심의 은혜를 얻지를 못했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 그리고 솔로몬 왕의 일대기를 보더라도 분명히 그러합니다(삼상16:14, 삼하12:11-15, 왕상11:2-11).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들보다 더 큰 은혜를 성도들이 누리게 되는 것이 기적입니다(벧전2:9).
(3)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사65:17, 계21:1).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을 하늘에서 이 땅으로 임하게 할 것입니다(사65:18-19, 계21:2). 창조주께서 사탄과 악한 영들을 모두 처벌하시고 성도들에게 그 성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을 누리게 해주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가장 기이한 일입니다(요1:12-13, 12:31, 14:1-3, 계21:7, 26-27).
결론적으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이 타락하고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으나 그 마음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사29:13b). 구원과 영생이 인생의 목적이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이웃나라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 대신에 단지 이 세상에서 선민으로 존경을 받으며 한 평생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라고 믿고 있습니다(사29:13a).
그러므로 율법생활도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겉치레가 되고 있습니다. 제사와 절기에의 참여도 형식적인 종교행위가 되고 있습니다. 오로지 신명기 제28장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 세상적인 복을 얻기 위한 종교적인 기복신앙에 머무르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속 중심을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의 눈밖에 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벌이 다음과 같이 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1) 사람의 계명, 장로들의 경험과 지식으로 율법의 세칙을 만들어서 종교행위를 하고 있으니 그 정성을 열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사29:13c).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아니하시고 있으므로 비록 그것은 요란하고 화려하지만 성전의 마당만 밟고 마는 종교행사라고 하겠습니다(사1:12).
(2)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와 메시아의 사역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사29:14). 그 결과 선민구원과 민족우월사상만 고수하다가 유대교지도자들이 만민구원을 부르짖는 메시아를 죽여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구원과 영생의 복음이 이방 땅으로 넘어가게 되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에 멸망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날에도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히4:12). 이사야가 전해주는 그 예언 앞에 우리들의 현실을 비추어보면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인생을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이 시간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살롬!
'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야 강해 제131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18 |
---|---|
이사야 강해 제130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18 |
이사야 강해 제128강(작성자; 손진길) (0) | 2021.07.17 |
이사야 강해 제126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17 |
이사야 강해 제127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