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26강(사29: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0월 14일(수)
이사야의 탄식; “슬프다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사29:1-4)
이사야의 동족인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백성들은 당시 두 가지를 믿고서 자칭 선민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평안하게 영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두 가지가 바로 이사야가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아리엘’과 ‘다윗이 진 친 성읍’(사29:1)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두 가지를 믿고 안심하면서 살고 있는 동족들이 사실은 신앙상의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탄식이 다음과 같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사29:1).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 그 두 가지가 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그것이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이사야의 슬픈 탄식을 자아내고 있는 것일까요? 그 답변이 기록되어 있는 문장이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가 기록한 구절을 따라가면서 하나님 말씀의 깊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묵상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슬프다 아리엘(번제단)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사29:1);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수도는 예루살렘입니다. 모든 왕국의 백성들이 유대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들이 그 두 가지를 잘 보존하고 있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서 모든 적의 침략을 물리치고 선민의 영광을 사해에 떨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두 가지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다윗의 성입니다.
성전에서는 매일 제물을 번제단에서 태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일같이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제물을 받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들의 나라를 어김없이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은 본래 다윗의 성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옛날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자 당시 가나안의 원주민이었던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 곧 시온산성을 빼앗아 그곳에 다윗의 성을 건설하고 수도로 삼아 천도를 했기 때문입니다(삼하5:3-12). 다윗은 그때부터 연전 연승하여 작은 이스라엘 왕국을 중동의 패권국(hegemon) 이스라엘 제국으로 만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그에게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왕국의 백성들은 종교적으로 부지런히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인 ‘아리엘’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 다윗이 물려준 예루살렘 성을 착실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전통과 히브리사상은 그 두 가지를 확실히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제나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을 지켜주신다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왕상9:1-5). 그것이 그들 선민들의 관념입니다. 그것은 마치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을 하며 기독교를 인정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서 언제나 안전을 누리며 평안하게 살 수가 있다고 하는 관념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것일까요?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신앙생활이 그러한 수준의 것일까요? 전혀 그러하지가 아니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슬퍼하시며 그 탄식이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처절하게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슬프다,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백성들조차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안전만을 생각하면서 습관적으로 번제단에 제사나 드리고 다윗의 성을 의지하여 살아가고들 있구나! 해가 지나가도 도대체 하나님의 뜻을 직접 구하지 아니하고 종교적인 행사에만 매어 달리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로구나. 그저 조상 다윗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다윗의 성에 살고 있기만 하면 지금도 계속 지켜주실 것으로 착각하고 있구나. 어째서 다윗이 발견한 하나님을 그 후손들이 찾지를 아니하고 조상의 족보와 그의 성만을 의지하여 살아가고들 있는가? 참으로 슬픈 현상이구나!”(사29:1 의역).
둘째로, “내가 아리엘(예루살렘의 별칭)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번제단이 있는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되리라”(사29:2); 선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있지만 이방인들의 침입으로 큰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주시지 아니하실까요?
(1) 주전 8세기말 이사야 시대부터 메시아가 그 땅에 오시는 주후 1세기초까지 700년 기간 동안에 그 땅을 크게 침탈하거나 지배하게 되는 제국을 손꼽아보더라도, 앗수르, 신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그리고 로마 등 5개나 됩니다(요4:18). 700년 동안에 5제국에게 시달리고 있는 역사는 참으로 세상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도대체 하나님께 제사를 잘 드리기로 유명한 유다 족속이 왜 그러한 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요?
(2) 그 대답을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해주시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에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제사장나라의 역할을 다 수행하고 있다고 믿고서 살고 있는 그들에게 나 여호와가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그 번제단과 함께 성전을, 그리고 예루살렘 성까지 무너뜨려버리고 말겠다. 번제나 성전 그리고 시온 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죄의 제사의 의미를 알고서 여호와 앞에 직접 나아와야만 할 것이다. 나 여호와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가지 아니하고 있는데 그 제물과 시온의 선민의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사29:2 의역).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예언이 나타나고 있음을 차제에 함께 음미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1-12),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
(4) 요컨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또한 그 뜻대로 실천하지 아니하면서 그저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으니 그와 같은 형식적인 종교행위가 어떻게 하나님께 열납이 되고 그 보호하심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그와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으니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것을 근절시켜버리신다는 예언입니다. 번제단과 더불어 유다의 백성들을 흩어버리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사29:2).
(5)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은 선민들의 조상인 야곱의 일생을 살펴보아도 이미 다음과 같이 밝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1) 야곱이 얍복 시내에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의 대 족장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얻었지만(창32:28) 그 다음 그의 행보는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제단을 쌓겠다고 서원한 장소 벧엘로(창28:18-22) 직행한 것이 아닙니다.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얍복 시냇물이 흘러 들어가고 있는 그곳 물이 풍부하고 풀이 무성한 ‘숙곳’에서 양을 실컷 쳤습니다(창33:17).
2) 목축으로 더 부자가 된 야곱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제는 벧엘이 있는 곳으로 남하하여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로 북상을 합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된 그가 인생을 즐기기 위하여 번화한 도시 세겜으로 간 것입니다(창12:6, 33:18-19). 그곳에 정착한 그는 여호와를 자신의 우상으로 섬기기 위하여 제단을 마련합니다(창33:20).
3) 그 모습을 보시고 크게 실망하신 하나님께서는 소위 ‘세겜 사건’을 통하여 야곱을 혼을 내십니다(창34:24-30).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는 유다의 백성들을 나라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으로 혼을 내실 것입니다. 그 결과 창세기에서는 그들 선민들의 조상인 야곱이 살 길을 찾아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서 벧엘로 들어갑니다(창35:1-6). 그곳에서 애초에 그가 서원한 대로 실천을 합니다. 그때 야곱은 비로소 전능하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4) 약속의 장소 벧엘에서 직접 하나님을 만났기에 야곱은 ‘엘벧엘’(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창35:7).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믿음의 대 족장 ‘이스라엘’로 세움을 받게 됩니다(창35:10). 그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남은 인생을 선지자이며 제사장인 위대한 대 족장 ‘이스라엘’로서의 삶을 끝까지 살아가게 됩니다(창35:11-15, 46:1-4, 47:7-10, 29-31, 48:5, 49:1-32).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훗날 ‘세겜’을 정복하게 된 것은 일종의 보너스라고 하겠습니다(창48:22).
(6) 작은 결론을 맺어보자면,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온 세상에 흩어버리실 것입니다(사29:2). 번제단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뜨려버리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먼 훗날에 선민들이 오랜 세월 자신들의 종교적인 행사에만 그친 신앙생활을 크게 회개하고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된 것과 같은 구원의 은총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너를 에워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사29:3); 선민들이 천혜의 요새라고 믿고 있는 다윗의 성입니다. 해발 780미터의 고지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서 있는 예루살렘 성입니다. 다윗의 영광이 빛나고 있는 그 성을 누가 감히 정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매일 번제물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 성전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께서 틀림없이 지켜주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선민들의 믿음을 강화시켜주고 있는 가장 가까운 사례가 이사야 생전에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히스기야의 기적’입니다. 하나만 예를 들어봅니다; 주전 701년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군대가 유다 왕국을 초토화하면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을 포위공격하고 있습니다(왕하18:17).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에 의하여 하룻밤 사이에 적군 18만 5천명이 몰살을 당하고 맙니다(왕하19:35). 단지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앗수르 황제의 조롱과 적군의 횡포에 대하여 상세히 아뢰고 부디 살려달라고 부르짖기만 했어도 그와 같은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왕하19:14-19).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에 살고 있는 유다 사람들은 자신이 있습니다. 급하게 되면 성전에 들어가서 살려달라고 부르짖기만 해도 구원함을 다시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요? 이사야는 그렇지 아니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쭉 둘러가면서 적군들이 높은 토성을 쌓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적들이 공성작전(攻城作戰)을 구사하게 되면 다윗의 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입니다(사29:3).
넷째로,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이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이리라”(사29:4); 다윗의 성이 함락이 되고 나면 선민들이 이방인의 포로가 되는 수치가 찾아올 것입니다. 높은 성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유다의 백성들이 골짜기로 끌려 내려가게 됩니다. 유다 사람들이 이방인들의 땅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으며 하나님 앞에 무엇과 같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깨달음은 다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을 이사야처럼 직접 만나고(사6:1-8) 그 뜻을 정확하게 실천하는 인생을 살지 아니하면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일같이 제사를 드리고 다윗의 성을 시온의 영광으로 선민들이 노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이방인들과 똑 같은 일종의 민족우월사상이며 우상을 섬기는 종교행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2)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적에게 내어주시는 것을 보고서 선민들이 비로소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사람들이 하고 있는 모든 수고와 종교행사가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디 메시아를 보내주시고 성령님을 보내달라고 구원을 호소하게 됩니다(사29:4).
(3) 일찍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고백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18:27),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18:32).
(4)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 티끌과 같이 미미한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아브라함과 같이 중보의 간구를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이방인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다시 살아가고자 합니다(사29:4). 그와 같은 먼 훗날의 변화를 이사야가 소망 가운데 바라보면서 그의 예언의 한 자락을 마무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선민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고 예루살렘을 명절 때마다 방문하는 것으로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적들의 공성작전으로 예루살렘이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며 선민들이 이방인들에게 끌려가서 참담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먼 훗날 그들에게 찾아올 것임을 또한 예언하고 있습니다; 죄임임을 비로소 깨닫고서 이방인들의 땅에서 유다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찾게 되는 역사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티끌과 같이 비천한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중보자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그 모든 변화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유대 땅에서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의 본문 예언은 오늘날 주일예배와 교회생활에만 만족하고 있는 형식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높은 성 교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낮은 땅 티끌과 같은 자신의 모습을 창조주 앞에서 발견하게 되는 눈이 열려야만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직접 만나고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은혜가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거듭난 영적인 삶이 바로 교회와 예배의 존재이유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귀한 메시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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