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30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7. 18. 10:08

이사야 강해 제130(29:15-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018(주일)

 

행악자(行惡者, 악을 행하는 사람)의 근본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이사야의 설명(29:15-16)

 

성경본문; “(15)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16) 너희의 패역(悖逆, 패륜과 반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聰明, 밝혀내는 지혜)이 없다 하겠느냐?”(29:15-16).

이번 강해에서도 성경본문을 먼저 제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의 용어와 그 뜻의 풀이를 해가면서 다소의 설명을 덧붙인다면 능히 이해가 가능한 말씀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29:15a)에 대하여 그 근원을 밝혀보자면 창세기 제4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카인’(Cain)의 범죄사건을 먼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카인의 범죄 가운데 그러한 죄악의 원형이 다음과 같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1)  그는 자신의 제사를 열납(悅納, 바친 것을 기쁘게 받아들임)하지 아니하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을 받아들이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대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4:5). 하지만 피조물인 카인에게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앙갚음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타는 적개심을 친동생인 아벨에게 돌리게 됩니다.

(2)  그와 같은 카인의 범죄심리를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사전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7). 그러나 카인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동생 아벨을 완전범죄로 살해할 수 있는 계획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자신 있게 시나리오대로 다음과 같이 완벽한 방법으로 아벨을 살해하여 암매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면이 확 트인 들판 한가운데로 동생을 불러냅니다. 주위에 보는 눈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합니다. 그 다음에 무슨 중요한 논의를 하는 것처럼 동생의 시선을 끌다가 순식간에 숨겨온 무기로 동생의 머리를 박살을 내고 맙니다. 그리고 사체를 땅속 깊이 암매장한 것입니다”(4:8).

둘째로, 카인은 자신이 행한 암살과 암매장이 어두운 데서 행한 완전범죄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범죄심리를 이사야는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29:15b)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인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이치 때문에 가장 어리석은 것입니다;

(1)  한 마디로, 카인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므로 완전범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눈만을 의식한 피조물의 판단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의 육신의 모집단인 땅이 살아서 말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2:7, 4:11, 3:8, 19:40). 그리고 사람이 흘린 피도 살아서 생명을 잃게 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4:10).

(2)  더구나 어두움과 밝음 그 모두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45:7) 양쪽을 전부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계십니다. 창세기 제1장을 보면 어두움의 세계에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1:3). 그런데 그 빛을 일부 제한하면서 밤을 창조하십니다(1:4-5). 그것은 완전한 어두움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수면을 편히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어두움의 환경을 만들어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그 시간대에는 사람의 눈으로 가시광선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만 어두움으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시광선뿐만 아니라 불가시광선까지 모두 보고 계십니다.

(3)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그 사실을 어리석게도 어두운 환경 가운데서 범죄를 한 인간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어두운 구석에 있는 모든 것까지 창조주의 눈 앞에 마치 벌거벗은 것처럼 속속들이 드러날 따름입니다(4:13). 놀랍게도 젊은 나이에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요셉이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39:9). 그것이 그의 형통함의 비밀일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시커먼 속도 모두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4:12).

셋째로, “너희의 패역(悖逆, 패륜과 반역)함이 심하도다”(29:16a); 이사야는 위와 같은 행악자들의 행태는 패역함이 심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패역함이라고 하는 것은 패륜과 반역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합성한 용어입니다;

(1)  먼저, ‘패륜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들이 창조의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질서는 자식이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장 기본적인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으로, ‘반역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종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힘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제14장의 기록이 그러합니다; 이사야는 히브리전승, 곧 미의 천사장 루시엘이 그 보좌를 창조주의 자리까지 높이려고 하다가 벌을 받아 이 땅에 떨어져 사탄인 루시퍼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원용하여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14:4, 11-20). 그리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또한 그러합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포도원을 차지하고자 그 상속자인 아들을 살해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21:38-39).

넷째로,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29:16b);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패역을 행하기 때문에 행악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패역한 행위를 일삼을 수 있는 기본인식을 이사야는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인식에 대하여 이 대목에서 알기 쉽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사람들이 교만하게도 창조주를 한갓 피조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어두운 곳에서 은밀하게 행한 살인사건을 창조주이신 하나님도 인지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다섯째로,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29:16c); 피조물이 주제넘게도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자”(3:14)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은 자연히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이지 결코 어떠한 창조주에 의하여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주장이 왜 잘못된 것인지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성경은 이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3:14).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창조주이시며 그 다음에 존재하게 된 것은 전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입니다(1:1-2:25, 1:1-5). 인류 역시 창조주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창세기 제1장 제26-27절 그리고 제2장 제7절과 제22절에서 정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2)  그래서 세례 요한은 창조주의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30). 그리고 의사 누가는 알기 쉽게 예수님의 족보를 추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3:38).

(3)  스스로 창조물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창조주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신론이 아니고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 사고방식이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조주의 존재를 부인하고자 종의 자연발생론과 진화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적인 방법론으로서 존재론적 인식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자력구원’(自力救援)과 스스로 신이 될 수가 있다고 하는 종교사상을 널리 퍼뜨리고 있습니다.  

여섯째로,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聰明, 밝혀내는 지혜)이 없다 하겠느냐?”(29:16d); 흔히 세상에서 성공하고 이익을 크게 얻자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리스도의 방법론보다는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세상적인 방법론과 지혜가 훨씬 쓸모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지혜가 없고 문제해결의 능력이 없다고 언급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이사야의 주장보다 사람들의 주장이 더 현실타당성과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창조주와 피조물은 그 시야가 다릅니다;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천하만민과 만물을 모두 골고루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고 있는 내리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모두의 생명을 살리기를 원하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2)  반면에 인간의 사랑은 무척 제한적인 것입니다. 자기자신과 가족 또는 이웃과 동족까지가 그 한계입니다. 적대국이 아니라 자국을 살리고자 합니다. 이웃나라의 이익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이 우선입니다. 남이 먼저가 아니라 자기와 가족이 우선입니다. 그러므로 도저히 이웃과 원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므로 자연히 세상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론과 출세지향적인 지혜가 쓸모가 있는 것입니다.

(3)  절대적인 사랑과 헌신 그리고 이웃과 원수까지 사랑하고 구원하라고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은 세상사람들에게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행한다면 자신과 가족의 희생이 그만큼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아 때문에 이사야의 설명과 예언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선민구원이 아니라 만민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죄 사함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희생했기 때문에 무덤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게 되는 새 역사가 발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며 새로운 언약을 세우신다는 의미입니다.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로 하여금 예언하고 외치라고 했던 메시아의 이야기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내려놓고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되새겨보아야만 합니다.  

결론적으로, 악을 버젓이 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무엇인가를 본문에서 이사야가 정확하게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창조주를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그러한 사회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으로 인간들이 얼마나 잘못된 악을 행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이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과 생명살림의 역사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으로 태어난 성육신이 그러합니다(2:5-7).

(2)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살아간 공생애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무려 36개월 동안 유대교지도자들의 미움을 톡톡히 받아가면서도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가르치고 전파한 것입니다.

(3)  더구나 모든 원수를 사랑하고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고 있습니다(2:8). 그 결과 세상적으로 가장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이 모두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시고 그 헌신을 귀하게 보시고 무덤 속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되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2:9-11).

(4)  그 부활사건은 지금까지의 모든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바꾸라고 하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구태의연하게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무시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천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게 되면 구원과 영생을 받게 된다는 확실한 약속입니다.

  끝으로,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저와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몫입니다. 그렇지만 아무쪼록 모세의 말처럼(30:19-20) 생명과 사망 가운데 생명을 선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