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41강(사31: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0월 29일(목)
선민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서 의지하려고 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사야가 그 헛됨을 일일이 지적하다(사31:1-3).
이사야는 본문의 예언을 통하여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어째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며 또한 애굽에게도 임하게 되는지 그 이유에 관하여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예언은 그의 시대에만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의 시대에도 그러합니다. 특히 2,700년 후의 시대인 21세기 오늘날에도 그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적용이 되고 있는 예언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이제부터 각 구절을 먼저 살펴보면서 그 깊은 의미를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이해를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31:1);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의 환난에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훗날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시게 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자신의 인생을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이 환난을 이기고 구원을 얻는 방법입니다(마6:10, 10:28, 26:42, 눅24:49, 요6:38-9, 행1:8). 그런데 구약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신앙을 파수하고 있다고 대내외적으로 크게 자랑하고 있는 선민들이 그러한 신앙의 모범을 전혀 보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사31:1).
메소포타미아의 신흥 패권국 앗수르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은 종주국으로 섬기고 있는 애굽 제국에 도움을 청하고자 사신을 보내기에 분주할 따름입니다(사31:1a). 그들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전쟁의 환난에서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지를 않습니다. 말로는 그 옛날 신앙의 거인 다윗 왕처럼 시편의 말씀을 줄줄이 외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시3:1-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구원해주신다고 하는 신앙고백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믿고 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이 있어 보이는 애굽의 황제 바로에게 부디 앗수르의 군대를 격파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선민 유대인들이 그저 전통적인 종교의식이나 행사를 치르고 있는 것이지 그들의 구원과 영생을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에게 의탁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째서 그와 같은 엉터리 신앙인들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본문에서 이사야가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선민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입니다;
1) 피조물인 ‘말’(horse)의 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사31:1b).
2) 사람이 만든 전투용 마차인 ‘병거’(chariot)를 의지하고 있습니다(사31:1c).
3) 훈련이 잘된 ‘기마병이나 병사’(horseman or soldier)를 의지하고 있습니다(사31:1d).
(2) 그 세 가지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애굽 제국을 평소에 종주국으로 섬기고 있으며 적의 내침을 받게 되면 즉시 애굽에 원군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민국가의 국방정책입니다. 한 마디로, 피조물(被造物, God’s creature)인 ‘말’과 인조물(人造物, artificial creature or man-made things)인 ‘전차’ 그리고 훈련 받은 ‘병사’의 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전부 피조가 된 것들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의 주인이신 창조주를 의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사31:1e). 그것이 선민들의 참으로 잘못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제 왕국에 전란이 발생하게 되는 위기상황에서 그들의 믿음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그 부끄러운 모습이 그대로 노출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이사야의 본문예언에 따르게 되면, 오늘날에도 창조주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피조물이나 인조물 그리고 훈련된 사람의 능력에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의 반석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다른 피조물의 능력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것이 어떻게 참된 하나님신앙의 모습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은 그렇게 날카롭기가 그지 없습니다.
둘째로,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사31:2);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엉뚱하게 애굽 제국으로 뛰어가서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사31:1). 그런데 그는 그 다음 예언 가운데 두 가지 이상한 구절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지혜롭게 재앙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사31:2a). 둘째, 하나님 말씀에 변함이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사31:2b).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대목들일까요?
선민들의 불신앙의 모습을 보시고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배신감을 다스리지 못하시고 단번에 모조리 전멸을 시켜버리시는 것이 아니라고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사야는 철석같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진심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의 정신에 따라 선민 이방인 구별 없이 사람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보응으로 반드시 심판을 행하시지만 그 가운데 벌써 구원의 처방을 마련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사야의 신앙이 제19절에서 다음과 같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주시리라”(사19:22). 그리고 차제에 메시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의 기록의 일단을 적어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6-7).
다음으로 이사야는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사31:2cd)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두 가지입니다;
(1) 악행하는 자 당사자만 처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사자와 그의 집을 전부 치신다는 것입니다(사31:2c). 그러므로 왕이 악행을 하게 되면 그 왕국이 위험해집니다. 그리고 가장(家長, the head of family)이 악행을 하게 되면 그 식구들이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따라서 가정과 왕국의 행복을 지키고 싶다면 하나님 앞에 악행을 행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2) 악행 가운데 특별히 조직적인 특수범죄의 대하여 강력하게 처벌을 하십니다. 행악을 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악행을 돕고 있는 자들까지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행동대장뿐만 아니라 음모자와 범죄의 교사자가 모두 처벌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원군을 구하려고 달려가고 있는 불신앙의 나라 유다 왕국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애굽의 바로도 모두 처벌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3) 따라서 애굽의 바로인 구스의 디르하가 왕이 앗수르 원정군의 후미를 공격하지만 역시 성공을 거두지를 못하고 있습니다(왕하19:8-9). 그 결과 예루살렘 성에 갇혀 있는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은 절망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나아가서 하나님께 눈물로써 매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왕하19:14-19).
셋째로,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31:3);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만 하는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육신의 죽음 뿐만 아니라 영혼의 소멸까지를 관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마10:28). 둘째, 그 말씀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동일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32:2b).
그와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본문 위의 구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1) 선민들이 애굽을 평소에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기고 있는 이유는 엄청난 국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 때에 그 국력은 군사력의 강함으로 나타납니다. 수많은 말과 병거를 보유하고 있는 애굽 제국은 강력한 기마대(騎馬隊)를 가지고 있습니다. 앗수르 대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시점에서 히스기야 왕은 애굽 기마대의 적 후방공격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 요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애굽의 바로인 구스 왕 디르하가가 직접 친정(親征)에 나섭니다. 하지만 전투에서 패하고 맙니다.
(2)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사야가 정확하게 예언으로 답해주고 있습니다. 그 답변의 조각들을 나열해서 의미해석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이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지 아니하고 애굽의 원군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의 능력이 아니라 피조물인 기마대에 모든 기대를 걸었으니 그것이 어떻게 구원을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사31:3b)
2) 차제에 철저하게 선민들의 불신앙을 바로잡기 위하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애굽 제국이 한갓 피조물에 지나지 못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할 것입니다.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 외에는 이 세상에서 구세주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할 것입니다(사31:3a).
3) 그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와 스스로 힘이 있는 강대국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나라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두 멸망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사31:3c).
결론적으로, 불신앙의 모습이 평소에 잘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성전에 모여서 모두가 똑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찬양을 드리며 진지하게 예배를 잘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적으로 큰 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하게 되면 참 신앙인지 아니면 불신앙인지 금방 들통이 나고 맙니다.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미구에 앗수르 대군의 침략을 받게 되면 히스기야 왕과 그 신하들의 태도가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여쭈어보지도 아니하고 급하게 종주국인 애굽 제국에 원군을 요청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애굽의 강력한 기마대에 구원의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군을 격퇴시킬 수 있는 것은 강력한 군대이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하는 상당히 세상적으로 똑똑한 상황판단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서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 창조의 능력을 무시하고 있으니 결국 하나님신앙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잘못된 신앙생활을 고칠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진노와 처벌 가운데 그들을 참 신앙인으로 바로 세우고자 하시는 고심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히스기야 왕의 나라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들의 일시적인 엎드림은 완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앗수르 군대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격퇴를 당하고 나자 히스기야 왕의 교만과 선민들의 세상적인 자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됩니다. 결국은 그로 말미암아 제사장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백성들이 온 세상에 유민이 되어 떠돌게 될 것입니다.
선민들이 그러한데 이방인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래서 불신앙의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진심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메시아가 태어나시게 됩니다. 이사야는 이제 모든 기대를 메시아의 오심에 걸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선지서 기록은 메시아의 오심과 복음의 시대에 초점을 맞추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생애와 약속을 다시 음미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으로 일관할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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