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22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7. 14. 19:48

이사야 강해 제122(28:6-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010()

 

훗날 메시아를 심판하는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주고 있는 엄중한 이사야의 예언(28:6-14)

 

본문 제6-8절의 내용은 전번 강해에서 일차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제9-14절의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대목을 다른 시각에서 한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훗날 메시아가 유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에 오시게 되면 유대인들의 종교인 유대교와 큰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고 하는 예언이 그 속에 이미 포함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6-8절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고 그 다음에 본문 제9-14절의 내용을 한 구절씩 차례로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본문 제6절에서 이사야는 그 옛날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의 모세의 역할을 추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하루 종일 백성들의 송사를 하나님말씀으로 재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8:13-16).

그 당시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영적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4:12). 그 결과 모세가 산 위에서 팔을 들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쟁의 승리가 찾아옵니다(17:10-11, 28:6b). 또한 모세가 율법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뜻을 깨달아서 그 취지를 판결의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18:15-16). 하나님 말씀의 뜻을 깨닫고 그 취지를 재판에 적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재판석에 앉아 있는 모세에게 판결하는 지혜의 영을 부어주시고 있다는 의미입니다(28:6a). 그것은 솔로몬 대왕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꼭 같은 것입니다(왕상3:5, 8-12).

둘째로, 만약 유다 사람들이 그 옛날 모세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의 취지를 쫓아서 재판을 했더라면 그들의 유대교는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대인들의 유대교는 그러하지를 못합니다(28:7-8).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그들이 이방인처럼 권력을 추구하고 재물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입니다(28:7a). 그들의 유대교는 선민의 권리만을 우월하게 주장하는 근거로 변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는 공의의 정신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돌보며 하나같이 살리고자 하는 창조주의 긍휼과 은혜가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33:18-19, 10:13, 30:20, 3:16-17).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 받고 있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인 유대인들이 공의의 정신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방인을 죽이는 유대교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꿈꾸고 있는 선민의 특권과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제국의 환상만이 하나님 말씀의 취지라고 우기고 있습니다(28:7b).

셋째로, 유대교지도자들이 하나님말씀을 왜곡하여 적용한 결과 그 부작용이 심각합니다. 자신들이 주장하고 있는 선민구원과 선민우월사상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다른 주장을 하는 자를 하나님말씀에 대한 모독죄로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유대교와 같이 심히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적이며 집단이기주의에 물들어 있는 잘못된 하나님신앙에 대하여 이사야는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것이 없도다”(28:8)라고 개탄을 하고 있습니다.

넷째로,(유대교지도자)들이 이르기를, (메시아)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28:9); 유대교지도자들은 자신만만합니다. 그들의 유대교리가 완전하며 그 기반이 탄탄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론적으로 본다면 분명히 그러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민족이 가장 훌륭한 민족이며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백성들이 드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한다면 그 대상은 당연히 자신들의 가족과 가문 그리고 동족들이 최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선민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웃나라와 민족들이 하나같이 악하다고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자신들에게는 구원을 베푸시고 이웃나라와 백성들에 대해서는 저주와 멸망을 베푸시는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선민우월사상과 선민구원사상 그리고 이방인 저주라는 이분법에서(5:43) 벗어나고 있는 하나님말씀의 해석은 모두가 이단사상이라고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유다 백성들이 거의 동조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민인 유대인들이라고 하면 누구나 선민우월사상에 기초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히브리정경해석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시대 유대인들의 사회에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이사야가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선생들인 랍비들이 다음과 같이 메시아의 복음전파에 대하여 가소롭게 생각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주장하고 있는 만민구원사상을 누가 듣고 따르려고 할 것인가? 그것은 유치한 어린아이들에게나 먹힐 꿈 같은 이상론이 아닌가? 현실을 알고 있는 어른들이라고 하면 그와 같은 망상적 주장을 들으려고 하지 아니할 것이다”(28:9 의역).

다섯째로,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 도다”(28:10); 이단사상으로 몰아 부칠 수 있는 방법론이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 전체 하나님말씀의 취지를 벗어나서 그저 여기 저기서 자신의 주장에 어울리는 구절만을 발췌해와서 그것으로 편벽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이 메시아의 사상에 대하여 그와 같이 비판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훗날 아이러니컬하게도 유대교지도자들은 그들이 주장했던 그 논리에 의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게 됩니다(28:13). 메시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편집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의 방법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주의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 아래에 갖다가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논리가 동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말씀 그 자체 그리고 그 취지가 최우선이고 주인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 그리고 논리와 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주인의 자리를 양보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과 지혜는 기도와 묵상 가운데 그 말씀의 취지를 깨닫고 그것을 뒷받침하는데 도구로 사용이 되어야 합니다. 잘못 주객이 전도가 된다면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말씀해석의 방법 또는 그들의 주석 사용법과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섯째로,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28:11); 현실론적으로는 바리새인들의 말씀해석이 더 타당합니다.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선민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자면 절대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각별해야만 합니다. 세상살이를 좀 해본 어른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민구원을 위하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메시아의 말씀은(5:44-48) 선민 유대인 사회에서 버림을 받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훗날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의 사역이 완전실패로 끝나고 말까요? 그러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이 대목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28:11). 참으로 이상한 구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하나님께서 메시아의 사역을 뒷받침할 것이라는 언급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사야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계시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훗날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의 현장을 보게 되면 금방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120명의 성도들의 영혼과 몸을 사로잡게 됩니다(2:1-4).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 행하심을 증거하게 됩니다(2:4, 11). 자신의 의지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그 옛날 모세의 입술을 주장하셔서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에게 말씀을 전하시던 때와 같습니다(4:12, 15). 한 마디로, 술이 취해서 더듬고 있는 입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에 취해서 사역을 하고 있는 입술이라고 하겠습니다(2:15-21).

일곱째로,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28:12); 창세기 제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6일동안 천지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그 창조행위가 끝나시자 제2장에서 제7일을 안식일로 삼고 있습니다. 그 하루는 피조세계의 움직임을 관찰하시면서 점검을 하시는 날로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피드백’(feedback)을 위하여 관리인 청지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 대화를 하시고 잘못된 것을 고치시는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안식일에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보고하고 고쳐주시기를 하나님께 맡기게 되면 어떠한 역사가 발생하게 될까요? 신실하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사람에게 안식을 주시고 새로운 창조를 해주실 것입니다. 그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성도들은 생기를 되찾고 하나님의 그 새로운 창조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28:12a).

이사야는 그와 같은 안식의 복을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온 세상에 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이방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안식의 복을 누리며 고침을 받아서 상쾌하게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전하라고 합니다(28:12b). 그것이 만민구원사상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안타깝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명령을 선민들이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28:12c)

여덟째로,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28:13);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조금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의 본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히브리정경 내에서 유사한 대목을 찾아서 비교연구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말씀의 본문 대신에 자신들의 주의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히브리정경을 뒤져서 여기저기서 인용하여 편향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2)  히브리정경의 시작이 모세오경이며 그 첫 번째가 창세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창조주라고 하는 고백이 하나님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해야만 합니다. 선민 이방인 구별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과 구원과 영생을 간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구원의 대상이라고 전제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어져 있기에 부작용이 심각합니다.

(3)  자신들의 선민사상을 고수하고 바리새인들이 주석을 달아서 체계화해 놓은 유대교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유대교지도자들이 만민구원사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를 죽여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임을 이사야가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28:13).

아홉째로,이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28:14);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선민사회입니다. 이사야는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이 망하고 나면 그와 같은 사회가 형성이 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6:9-13). 따라서 본문과 같은 예언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것이 이사야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에서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여”(28:14a)라는 대목은 특히 장차 예루살렘에서 다윗 왕조를 대신하여 유다 백성들을 다스리게 될 레위 인들과 유대교지도자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사야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청종하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28:14b); “부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선민사상을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의 만민구원사상을 전하게 되는 메시아의 복음을 듣고 그 명령을 받들라고 하는 간절한 외침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히스기야 왕 때에 주로 활동을 하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가 100여년 후에 있게 될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멸망과 700년 후에 있게 될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와 같이 유대교지도자들이 메시아를 왜 배척하게 되는지 그 이유까지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 놀라운 것입니다. 그와 같이 먼 훗날의 이야기를 미리 말해주고 있는 이유는 부디 그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고 미리 미리 마음을 고쳐먹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지도자들이 이사야의 본문말씀의 의미를 그 뜻 그대로 음미를 하고 묵상을 했더라면 메시아를 죽이는 잘못을 범하지 아니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역사는 그러하지를 못합니다. 당시 히브리정경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랍비들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아전인수격인 말씀해석이 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선민구원과 유대인 우월사상을 체계화하고 있는 유대교리를 하나님말씀의 뜻이라고 우기면서 메시아도 자신들의 교리를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만민구원사상을 복음으로 전하게 되는 메시아는 그 사회에서 배척을 받게 되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안타까운 미래지사를 예방하고자 하는 이사야의 외침이 본문에서 처절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역사가 어떻게 2,000년 전의 이야기에 국한이 되겠습니까? 지금도 자국의 발전과 자민족구원을 절대적인 교리로 숭상하면서 적대국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을 기원하고 있는 모든 종교행위가 그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왕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으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특히 적대국과 그 백성들이 구원으로 나아오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중보자로서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