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20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7. 13. 00:56

이사야 강해 제120(27:10-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08()

 

누가 멸망을 당하며 누가 구원을 얻고 있는가?(27:10-13)

 

누가 멸망을 당하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이사야는 명쾌하게 그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지각이 없는 백성들은 멸망을 당하며 지각이 있는 백성들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27:11b-12). 그리고 지각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게 되면 그들이 살고 있던 도시와 주택이 어떻게 황무하게 되고 살아남은 자들의 고생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예언을 해주고 있습니다(27:10-11a). 반대로, 지각이 있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 그 구체적인 역사에 대해서도 예언해주고 있습니다(27:12-13). 도대체 지각’(知覺)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심판의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그 점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각 구절을 따라가면서 더 깊은 내용을 묵상을 통하여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지각’(知覺, understanding, NIV, KJV)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한자의 뜻을 보면 지각이란 지성적인 각성 곧 이성적인 깨달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로는 이해력을 뜻하고 있는 ‘understanding’으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통전적인 입장에서 보아 무엇을 이해하고 깨달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도대체 무엇에 대한 이해이며 깨달음이기에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지 못 받을지 그것으로 판가름이 나게 된다고 이사야가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음과 같은 성경이야기를 가지고 그 깊은 의미를 도출해보고자 합니다;

(1)  창세기 제5장을 보면 아담의 계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비록 창세기 제1장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지만 그들의 후손인 인류가 하나님신앙을 제대로 지니고 살아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히 모습은 하나님의 모양을 닮아 있는 사람인데 그 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 곧 창조주의 성품과는 한참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5:1-2). 그래서 수 많은 인류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보전하고 있는(5:3) 특별한 가문이 아담의 계보로 제5장에서 등재가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한때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았던 아담이 자신의 형상을 아들 셋에게 대물림을 하고 있습니다(4:25, 5:3). 그것은 하나님신앙을 물려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셋은 그 신앙을 아들 에노스에게 물려주고 있습니다(4:26a). 그 결과 에노스의 가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간구하는 예배가 생겨나고 있습니다(4:26b).  그 가문의 후손들 가운데 믿음의 장자들의 이름이 제5장과 제11장에 등재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으로 나아가는 의인들의 명단이라고 하겠습니다.

(3)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7:21). 그렇다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모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드러나 있는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12:30-31).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고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4)  구약에서 율법의 기본정신은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의 주인으로 섬기고 자신은 그 분의 종이라고 하는 확실한 정체성의 확립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제대로 대접하고 섬기는 것으로 바꾸어서 말하고 있습니다(7:12, 25:40). 그 뜻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접하고 창조주가 만드신 피조물에 대해서 자신과 같은 값어치를 인정하고 자신처럼 사람대접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5)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3:16, 8:21). 이 세상 자연환경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이 사랑하여 창조한 고귀한 창조물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소중하게 관리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됩니다. 그와 같은 깨달음으로 사유하고 행동할 때 지각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대저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거처가 황무하며 버림 받아 광야와 같은즉, 송아지가 거기에서 먹고 거기에 누우며, 나뭇가지를 먹어 없이하리라”(27:10); 이사야는 개인의 거처인 주택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성읍”(城邑, town or city)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그것도 보통 성읍이 아니라 요새와 같은 견고한 성읍입니다. 세상적으로는 번영을 누리며 강대국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는 난공불락의 성읍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창조주를 모르며 창조주의 뜻대로 만민과 만물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있는 성읍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각이 없는 백성들이 살고 있는 그 성읍을 멸망시켜버리십니다. 그 결과 적막강산이 되고 맙니다(27:10a).

개인이 거처하고 있는 주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도록 황폐화되고 광야와 같이 변하고 맙니다(27:10b). 그 결과 미처 피난하지 못한 송아지들이 살아남아서 그곳에 거처하면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27:10c).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아니하므로 먹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송아지가 마치 돼지처럼 나뭇가지를 꺾어서 먹어 치우고 있습니다(27:10d). 참으로 비참한 풍경을 이사야가 마치 붓으로 그린 듯이 예언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27:11); 견고한 성읍을 지키기 위하여 남자들이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패전의 결과 남자들이 몰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성읍에는 일부 여인들만이 살아남아 있습니다. 추운 날씨에 밤을 견디지 못하여 불을 피우고 있습니다. 연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옥의 나무를 떼내어 불을 피워서 지내고 있습니다(27:11a).

이사야는 그 모진 고생과 참상의 원인을 한 마디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창조주를 인식하는 지성이 없습니다. 하나님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창조주 사랑, 인간사랑이 없는 동네입니다”(27:11b 의역). 그와 같은 깨달음과 실천이 전혀 없으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금수와 같은 인생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지으신 이조성하신 이라는 유사개념을 겹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27:11c). 일견(一見, 한번 언뜻 보는 것)하기로는 강조용법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으신 이는 생명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조성하신 이는 인생을 만들어나가시는 분입니다. 전자는 과거형으로 볼 수 있지만 후자는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개념에는 두 가지 개념이 모두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의미의 풀이가 가능해집니다; “생명을 주신 이가 그에게 생명준 것을 후회하여 불쌍히 여기지를 않습니다. 창조주가 그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도록 지도를 하고 있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더 이상 은혜 베풀기를 원하지 아니하게 되고 맙니다. 이제 남아 있는 수순은 멸망뿐입니다”(27:11c 의역)

넷째로,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같이 너희를 하나하나 모으시리라”(27:12); 남은 자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자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이 세상에 깃발로 세우시게 되면 그 기치를 보고서 선민과 이방인들이 많이 몰려올 것이라고 벌써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11:10). 본문에서 이사야는 좀더 구체적인 예언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1)  어디에서 몰려올까요? 이사야는 구체적인 지명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창일하는 하수곧 큰 두 강이 만나서 그 강물이 풍부하게 삼각주를 적시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나일 강물이 갈라져서 많은 시냇물이 삼각주를 흐르고 있는 애굽 지역입니다(27:12a). 유다의 선지자인 이사야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유대인들이 끌려가서 살게 되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이거나 그들이 피난 가서 살게 되는 애굽 지역이 먼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2)  메시아 깃발을 보고 하나님께로 몰려오는 자들은 모두 창조주에 대한 지각이 있으며 그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실천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은 선민 유대인들에 국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의 복음이 전파되는 지역에서는 어느 곳에서라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발생을 합니다. 그들이 모두 창조주를 섬기며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들을 불러모으시는 방법에 대하여 이사야는 하나하나 모으시리라”(27:12b)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과 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는 집단적인 구원의 방식이 아닙니다. 매우 개인적인 구원의 방법을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선민사상을 넘어서는 만민구원사상의 특징이 바로 개인별로 구원’(individual salvation)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그날에 큰 나팔을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들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27:13); 구원이 선민들 가운데 이방 땅에 흩어져 있는 자들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나팔소리가 온 세상에 크게 울려 퍼지게 됩니다(27:13a). 그러면 앗수르가 상징하고 있는 동방 땅에서도, 또한 애굽이 상징하고 있는 서방 땅에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이미 이사야가 예언한 바와 같이 온 세상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돌아옵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멸망하는 자들이 돌아온다”(27:13b)는 표현이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지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구원이냐 멸망이냐를 구분하게 되는 기준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각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를 인식하는 것과 그 말씀의 뜻을 깨닫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이 사람들의 지성과 감각을 이끌어갈 때에 그 인생은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의 가치가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훗날 그와 같은 모범을 메시아가 이 세상에 와서 보여주게 됩니다. 따라서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성도들은 지각이 있는 인생을 살아가기가 참 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서 스승님처럼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을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러한 제자가 지각이 있는 사람이며 구원을 받을 만한 인생을 살고 있는 성도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