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1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7. 13. 00:54

이사야 강해 제119(27:7-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07()

 

이방인과 선민 모두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동일한 구원의 조건(27:7-9)

 

짧은 세 구절에 불과한 본문이지만 그 의미가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이사야가 만민구원을 염두에 두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섭리와 선민, 이방인 차별 없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는 구원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러한 문장인지 지금부터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그 깊은 의미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던들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던들 백성을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함과 같았겠느냐?”(27:7); 이사야는 미구(未久, 오래지 아니하여, in the near future)에 동족 유다의 백성들에게 닥칠 전쟁의 참혹함 뿐만 아니라 먼 훗날에 찾아오는 전쟁의 비참함을 미리 내다보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 여러 차례의 전쟁의 참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에서는 달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동족인 선민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아니했기 때문에 받는 처벌이 그들을 치는데 동원이 되고 있는 이방인들의 제국들이 훗날에 당하게 되는 참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미한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그 말은 선민과 이방인을 다룸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처벌의 강도를 달리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왜 그와 같은 차별성이 선지서에 기록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해답을 얻기 위하여 창세기 제1장부터 제4장 사이에 실려 있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창세기 제1장 제26절부터 제31절 사이에는 많은 인류의 조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제6일 곧 창조 마지막 날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을 잘 경영하도록 하나님께서 위임을 하시고 심히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모양만 닮아 있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있는 사람으로서의 행위를 전혀 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래서 개인적으로 함께 사시면서 제2장에서 청지기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 장소가 에덴동산이고 그 대상자가 엄선된 인물 아담입니다. 하나님 형상을 여전히 보전하고 있는 아담에게(5:3) 아내 하와를 만들어주어 함께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선해주십니다(2:20-25).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신앙을 가진 인류의 조상이 되고 있습니다.

(3)  그들이 잘못을 범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소위 실락원’(失樂園, lost paradise)에서 살게 되자 그 가정에 비극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살해함으로써 믿음의 가정 최초의 형제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4:5-8). 카인에게 그 죄를 묻고 하나님은 그를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동방 땅으로 유배를 보냅니다(4:9-12).

(4)  그러자 카인이 남은 인생 동안 놋 땅의 불신자들로부터 살해를 당하지 아니하도록 보호를 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4:13-14). 그 간구에 긍정적으로 응답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조치를 해주신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카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4:15). 한 마디로, 카인에게 손을 대는 자는 7배의 응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된다고 하는 강력한 보호하심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선민 유대인들에게 다시 임하고 있음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27:7).

(5)  그렇다면, 어째서 그와 같은 보호하심을 살인자 카인이 유배를 가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유일한 이유는 그의 부모님이 하나님신앙을 파수하고 있으며 카인 역시 제사를 드린 경험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불신자 이방인과 구별이 되고 있는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차이가 출애굽기를 살펴보면,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백성들 사이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기로 결정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엄청난 축복입니다”(2:23-25, 3:9-10).

둘째로,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27:8); 이방인들에 비하여 선민들을 경미하게 징계하신다고 하더라도(27:8a) 그 처벌의 내용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선민의 왕국을 멸망시키고 백성들을 이방인들의 땅으로 쫓아내는 징벌입니다(27:10).

그런데 이사야는 특이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주의 백성들)옮기신 것이다”(27:8b)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풍, 폭풍, 옮기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동풍’(the east wind)은 동에서 서로 부는 바람입니다. 그러므로 동풍에 실려서 옮겨진다고 하면 동에서 서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땅에서 서쪽 어디로 그 백성들이 옮겨진다는 것일까요? 유다 왕국이 망할 때에는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것은 동방 땅으로 간 것이므로 이 대목에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훗날 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유대 인들이 가나안에서 쫓겨나는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막내사도로 불리고 있는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북서쪽 소아시아 에베소로 피신을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더 많은 유대인들이 남서쪽 애굽으로 피난을 했을 것입니다.

(2)  폭풍은 강력한 바람입니다. 그것은 전쟁의 바람’(the wind of war)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후 70년에 로마의 장군이며 새 황제의 아들인 디두스가 이끄는 정예병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옵니다. 유대인 110만명이 살해를 당했다고 전쟁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을 정도로 참혹한 반란의 진압입니다. 그러한 폭풍이 거주민들을 고향산천에서 내쫓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옮기시는 경우가 두 가지 종류입니다; 첫째, 출애굽 당시에는 독수리 날개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안전하게 하나님의 산으로 옮겨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9:4). 둘째, 선민들의 왕국이나 사회가 하나님신앙을 버렸을 경우에는 전쟁의 폭풍으로 그들을 가혹하게 옮겨버리십니다(27:8c). 전자는 세상나라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신 경우입니다. 이른 바 거룩한 사명을 부여하기 위하여 불러내심’(calling out)에 해당하는 경우입니다. 반대로, 후자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전혀 기능하지를 못하고 있는 선민들을 더 이상 보호할 필요가 없어서 이방세계로 쫓아내는 경우입니다.

(4)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느 경우를 소원해야만 할까요? 당연히 전자 calling out’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끝까지 자신의 영혼과 인생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제 뜻대로 자신의 고집과 아집을 앞세워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까요? 결코 그러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이사야가 전쟁의 폭풍으로 여기서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의 죄 없이함을 받을 결과는 이로 말미암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을 부서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이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27:9); 이사야는 먼 훗날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 세상에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것은 실락원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다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2:19-20, 11:6-9).

같은 맥락에서 메시아로 오신 나사렛 예수의 행적과 교훈을 적고 있는 복음서에서는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은 모두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3:14-18). 그렇다면 메시아에 의하여 그리고 성도들에 의하여 어떠한 변화가 이 세상에 오고 있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본문에서 메시아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이 반드시 먼저 실천해야만 하는 일이 하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가 하신 일을 그대로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 제단의 모든 돌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과 태양 상을 영원히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1)  제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과 이방 신을 섬기는 제단입니다”. 이방 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제단을 훼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에 있어서도 부수어버려야만 하는 것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2)  첫째가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섬기고 있는 제단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을 단지 이스라엘의 조상신으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전국을 휩쓴 앗수르 산헤립의 군대가 그러합니다. 적장 랍사게의 최후통첩문에서 여호와를 유다 땅의 수호신이나 토착 신 정도로 치부하고 있습니다(왕하19:11-13). 그리고 출애굽 당시 애굽의 황제인 바로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5:2).

2)    때로는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33:20, 32:4, 왕상12:28). 자신들의 번영과 영광만을 기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는 이웃나라들을 처벌해달라고 하나님께 저주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어야만 하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은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42:10, 3:2, 4:1-5, 5:43-48). 한 마디로, 선민과 이방인의 차이가 사라진 것입니다.

(3)  둘째가 하나님의 율법의 취지를 어기고 있는 제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출애굽시켰습니다. 애굽의 노예상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제20장에서 애굽에서 만든 웅장한 제단의 형식을 버리라고 강조하십니다. 다듬은 돌로 제단을 만들지 말고 제사장이 올라가는 층계도 높이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20:24-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화려하고 그 제단은 웅장합니다. 제사장의 권위와 지위는 자꾸만 높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제단과 종교는 하나님께서 부수어버리시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4)  돌로 만든 주상이 아니라 제단 옆에 따로 세우고 있는 나무로 만든 신상들이 있습니다. 그것들도 없애버려야만 합니다. 대표적으로 아름다운 여신을 새겨놓은 목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세라 목상입니다. 그리고 태양의 위용을 나타내고 있는 우상이 있습니다. 그것도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므로 부수어버려야만 합니다.

(5)  그와 같이 모든 우상과 이방 신을 없애버리고 하나님을 창조주답게 대접을 하고 그 뜻을 따라 올바른 제사를 드릴 때에 참 신앙이 회복이 되고 구원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아주 실제적인 예를 창세기에서도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에 묻고”(35:3-4),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35:9). 이방 땅 밧단아람에서 하나님의 땅으로 돌아왔다는 표시는 이방 신과 우상을 파묻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제단을 쌓는 것을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신앙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잘못을 범했을지라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하게 성찰할 수 있는 지식과 전통을 지니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러합니다. 예를 들면, 메시아가 유대 땅에 오셨을 때에 바리새인들을 많이 비판하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만민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초대교회의 역사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 의하여 초대교회의 역사가 예루살렘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리고 믿다가 실족했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구원의 길로 들어서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사야가 역시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우상문화를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만민구원의 아버지로 그리고 창조주답게 제대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신앙을 가지게 되면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모두가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이사야 예언의 깊은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