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06강(사23:15-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9월 24일(목)
기억의 세대가 사라지는 기간 70년, 또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내는 70년의 세월을 반복하면서 인간의 역사는 어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사23:15-18)
지중해의 해상왕국(海上王國) 페니키아의 영광이 시작된 곳이 두로(Tyre)입니다. 그리고 두로가 망함으로써 그 영광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 두로에서 지중해 연안국가로 지속적으로 수출이 된 우상문화와 퇴폐향락산업은 두로의 페니키아 왕국과 운명을 같이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로가 사라지더라도 인간의 심성 가운데 여전히 우상을 선호하고 향락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욕구가 계속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 욕망을 근본적으로 끊어낼 수가 있을까요?
그 해답을 차제에 제시라도 하려는 것처럼 이사야의 예언이 본문 가운데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대목은 마치 요한계시록의 끝 부분을 미리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세상종말의 역사섭리와 관련이 되고 있기에 사람의 두뇌로 그 묵시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이사야가 이미 예언을 하고 있으므로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구절을 따라가면서 한번 묵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年限, period)같이 70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70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같이 될 것이라”(사23:15); 두로는 비록 해상왕국 페니키아의 중심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중근동의 두 강대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면서 생존하고 있는 하나의 약소국(弱小國)입니다. 기본적으로 ‘줄타기외교’를 통하여 양 진영 사이에서 소위 ‘균형자’(均衡者, balancer) 역할을 잘하고 있는 동안에는 나름대로 자율성을 가지며 번영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균형이 깨어지는 경우에는 어김없이 생사의 기로에 처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조선말기의 한반도의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신흥 강대국들이 애굽 제국을 압박하는 경우에는 늘 그러한 위기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하고 있던 시기 곧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평정한 앗수르 제국이 서진(西進, 서쪽으로 나아감)을 하면서 애굽 제국을 압박하고 있던 시대가 그러합니다. 당시 두로의 페니키아 왕국은 해상왕국으로 크게 번영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풍부한 농산물을 사서 지중해 연안에 수출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따라서 애굽과의 관계가 엄청 돈독하던 시대입니다. 그러한 두로의 한쪽으로 치우친 경제적 외교관계가 앗수르의 침입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페니키아 왕국의 생존을 원하실까요? 아니면 패망을 원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해답을 이사야가 예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패망하여 70년 동안 완벽하게 잊혀버린 왕국이 되었다가 다시 좋은 시절을 맞이하여 옛날의 성세를 회복하고 똑 같은 일을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사23:15 의역). 이사야의 예언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두로의 페니키아 왕국에 대하여 분노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지중해무역으로 큰 부를 얻게 되자 그것으로 흥청망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향락과 사치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상문화 및 음란과 퇴폐문화를 온 세상에 만연시키고 있는 주범입니다. 그러므로 멸망시키고 말 것입니다.
(2) 세월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70년의 세월이 지나면 한 사람의 기억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기억까지 모조리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시편에서 모세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시90:9-13).
(3)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첫째, 주님의 뜻에 맞지 아니하는 인생을 살거나 국가를 운영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로 망하게 되고 잊혀져 버리는 역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둘째, 70년에 불과한 짧은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교훈도 70년 세월이 지나면 또 까맣게 잊고 마는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 있는 옛날의 잘못을 반복하고 맙니다. 셋째, 이제는 그와 같은 슬픈 역사를 반복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허락해달라고 하는 모세의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4) 참고로, 본문의 이 대목은 어느 왕이라고 하더라도 그 통치기간이 70년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복자는 망한 나라의 역사를 빨리 지워버리려고 한다는 사실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묘지를 빌려주는 경우에도 30년 임대에 한 차례 갱신을 허용하여 최대 60년으로 임대를 끝내도록 하고 있는 현행제도가 합리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토록 한 시대를 기억하는 세대의 연한이 70년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한 평생을 살다가 사라지는 인간의 종말이 얼마나 허무하며 슬픈 것인가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淫女, the great prostitute, NIV, 계17:1)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계18:22) 너를 다시 기억나게 하라 하였느니라”(사23:16); 우상을 좋아하고 음탕한 문화를 지녔던 페니키아 왕국과 같은 나라를 멸망시켜버린다고 하여 그 문화가 사라지는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억의 세대가 모두 사라지자 70년 후에 다시 그 왕국을 재건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두로의 음탕한 문화를 상징하고 있는 그 음녀가 다시 힘을 발휘하여 무역상대국들에게 음란문화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70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deal with, NIV, visit, KJV)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사23:17); 이 대목은 어째서 감옥에 가두어두었던 사탄을 다시 세상에 내놓아 마지막 심판을 대비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지혜를 엿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악한 영만 가두어버리고 처벌을 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완전하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악한 영에게 부화뇌동하는 사람의 악한 심성을 모두 도려내는 대 수술이 필요합니다.
요한의 계시록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탄을 잠시 이 세상에 풀어줄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계20:7). 그 목적은 사탄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악하고 음란한 심성을 모두 불러모아 조직화하여 하나님께 대항하는 마지막 전쟁을 벌이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에서 지상에 나온 모든 어두운 것들을 한꺼번에 섬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죄악과 허물을 악한 영과 함께 모두 도려내어 없애버리는 대 수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전쟁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진두지휘하실 것입니다(계19:11-21). 그때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원하는 자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죄 사함의 용서와 함께 성령님의 임재로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군사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참회하지 아니하고 저항하는 자는 사탄 및 악한 음녀와 함께 영원한 심판의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계17:1, 19:19-20, 20:7-10).
넷째로,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사23:18); 이사야가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는 음녀의 모습을 가지고 두로의 앞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음란한 나라 바벨론의 모습입니다(계17:5). 그렇다면 두로의 페니키아 왕국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바벨론처럼 하나님의 종말심판을 받게 된다는 결론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그 뜻을 받드는 인생이며 국가의 경영일까요? 이사야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그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1) 해상무역을 통해서 얻은 이익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을 살리고 먹이고 입히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사23:18). 그렇다면 여기서 몇 가지 질문사항이 발생합니다;
1)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하늘곳간을 열지 아니하시고 두로가 바치는 그 재물을 사용하여 성도를 살리고 사람들을 돌보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2) 누가 그 재분배의 일을 담당하게 되는 것일까요?
3) 다 바치고 나면 두로의 상인들은 무엇을 먹고 살아가라는 말일까요?
(2) 항목별로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창조주를 창조주로 대접하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피조물로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마7:12, 막12:30-31). 이웃을 사람들이 자신과 똑 같은 사람으로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을 기꺼워하십니다. 그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의 기쁨을 생각하면서 그 피조물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사람의 인생과 재물이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뜻이 훗날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3) 재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 뜻을 따라 사용을 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위와 같이 사용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재분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재분배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4) 사람의 재물과 시간이 모두 사용이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하나님의 관심과 개입과 능력이 함께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시고 하나님께서는 베푸는 자의 삶을 돌보십니다. 재능을 더하여 주시고 먹고 살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더 많은 것을 맡기셔서 풍성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마25:21).
5) 물론 그냥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다음에 영광을 주시고 먼저 바치고 헌신하는 과정을 보시고 필요한 것을 부어주십니다(롬8:17-18, 11:33-36). 이웃을 살리고 말씀으로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을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하여 행하고 있는데 주인이 어떻게 청지기의 일을 모른 체 하겠습니까? 그것은 확실하게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두로가 지중해무역으로 돈을 벌어 페니키아 왕국의 영광을 떨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나라는 멀지 않아 중동의 강대국에 의하여 패망의 슬픔을 맛볼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페니키아는 배 만드는 기술, 항해술, 건축술, 계산의 방법, 다양한 물감의 개발, 기타 문물의 유통에 있어서 큰 공헌을 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다른 측면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한 마디로, 페니키아의 영광은 음탕한 문화를 온 세상에 보급시킨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패망할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두로가 패망하여 70년 동안 완전히 세상에서 그 영광이 잊혀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회복의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페니키아에서 참회와 반성의 역사를 보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음녀 페니키아의 음탕한 문화는 다시 재발이 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사야는 마지막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부디 재물을 자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사용하지 말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쳐서 많은 생명을 살리고 풍성한 성도의 삶을 살도록 하십시오”(사23:18).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 따르면, 그것이 자신의 재물로 호의호식하면서 음탕한 삶을 살아가는 음녀의 문화를 청산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지 아니하면 결국 음녀에 대한 종말심판을 함께 당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새삼 경청하게 되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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