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04강(사23:7-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9월 22일(화)
희락의 성을 건설하며 지중해의 지배자임을 자랑하던 두로와 시돈이 어째서 하나님의 섭리로 멸망을 맞이하게 되는가?(사23:7-12)
지난 번 강해에서 이미 총론을 말씀 드린 바가 있기 때문에, 본문의 내용을 곧바로 다음과 같이 구절강해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사23:7); 지중해 연안에서 오랜 세월 고기잡이를 하던 시돈 사람들이 소득이 낮은 어업을 접고 상업으로 큰 소득을 얻고자 남쪽의 두로 바위 섬에 무역항을 건설함으로써 페니키아(헬라어로 ‘베니게’, 행11:19) 왕국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시돈 사람들은 대대로 지중해 연안어업에 종사를 했기에 해안선(海岸線)의 물길을 잘 알았고 배를 만드는 기술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물건을 어디에서 구입하여 지중해 연안의 어느 도시에 팔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는지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지중해에 들끓고 있는 해적선을 격파하면서 안전하게 해상무역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력으로 무역선(貿易船)을 보호할 수 있는 군대를 거느리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의 리더는 시돈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부하들은 여러 나라에서 모집한 용병들입니다. 그러므로 하극상에 의한 선상반란이 더러 발생했습니다. 이를 사전에 예방하는 방법으로서 일벌백계의 참혹한 형벌을 고안했습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돛대 높이 반란의 수괴를 매어 달고서 굶겨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처형방법은 훗날 페니키아 왕국이 망한 후에도 십자가 처형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 처형의 방식은 한때 페니키아가 튀니지에 식민지로 개척했던 카르타고의 전성시대를 거쳐서 로마제국에까지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워낙 처참한 사형방법이므로 로마시민에 대해서는 그 적용을 배제했습니다. 다만 제한적으로 로마황제에게 반역한 수괴나 노예반란을 도모한 괴수만을 십자가에서 처형했을 뿐입니다. 그 가운데 훗날 그리스도 예수가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요19:12-16). 따라서 페니키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훗날 그리 보기 좋은 모습으로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페니키아 사람들이 ‘무사단’(武士團)을 이끌게 되자 그 무력으로 지중해 연안에 여러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멀리 지중해의 서쪽 끝에 ‘다시스’라고 하는 항구도시까지 건설했습니다. 애굽 제국의 서쪽 끝에는 ‘카르타고’하고 하는 식민지까지 거느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페니키아 왕국은 그 식민지의 항구도시에 자신들의 두로 항에 있는 유흥향락문화와 우상문화를 그대로 이식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역선을 타고서 고향을 떠나 멀리 떠나온 선원들의 객고를 풀어줄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것이 나중에는 현지인들까지 합세하여 모두가 환락을 즐기게 되는 장소로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소위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희락의 성’(환락의 도시, city of joy, KJV, 음주문화의 도시, city of revelry, NIV)의 퇴폐문화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에 우상문화와 쾌락주의 퇴폐문화를 널리 보급시킨 주범 페니키아 왕국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돈만 벌 수 있다고 하면 무슨 일이든지 거리낌없이 행하고 있는 그들 상단의 나라를 없애버리시기로 결정하십니다. 그것이 어느 때에 시행이 되는지 이사야가 ‘환상의 골짜기’에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경고의 말씀을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사23:1).
둘째로, “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사23:8); 상인들과 무역상들이 정치적인 권력을 차지하는 일이 고대사회에 있어서는 사실 불가능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왕국의 건설은 돈이 아니라 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설혹 상인들이 왕국건설을 위하여 뒷돈을 대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중에 나라의 상권을 떼어주는 것으로 마감이 됩니다. 그들 상인들에게 국가권력까지 배분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고대사회에서는 상인계급의 신분상승을 막기 위해서 왕과 귀족들이 엄격한 계급사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동양의 통치철학인 유교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위로부터 관료가 될 수 있는 양반계급인 선비, 농사를 짓는 농민, 물건을 만들어 관에 납품하는 장인, 물건을 유통하는 상인 등의 엄격한 계급이 존재하고 있음)이라는 관념을 철저하게 백성들에게 교육했습니다. 그리고 특히 봉건국가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사무라이에 의한 ‘무신정권’(武臣政權)을 유지하면서 상인(일본에서는 ‘죠닝’, 町人)들을 천대했습니다. 일본의 독특한 통치제도인 ‘상낀교오따이세이’(參勤交代制,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 大名,가 자신의 영지와 수도인 경도, 京都,에 번갈아 가면서 살게 되는 제도) 때문에 상인들이 돈을 많이 벌게 됩니다. 그러나 돈으로 신분상승이 불가능해지자 처음에는 퇴폐향락기생문화에 빠져들게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취급품목과 제조기술에 있어서 최고의 칭호 ‘명인’(名人)이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게 됩니다. 그 결과 자본주의의 기틀이 일본의 봉건사회에서 일찍 형성이 되고 명인의 기술이 대물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페니키아 인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용감하게도 용병을 거느리고 지중해 연안의 작은 나라들을 정벌합니다. 그리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자국민으로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합니다(사23:8a). 그 결과 두로의 무역상들과 선주들 그리고 시돈의 상인들은 전체 페니키아 왕국의 고관과 귀족들이 되고 있습니다(사23:8b). 그렇게 돈으로 세워진 페니키아 왕국의 영화가 지중해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중해 무역의 이익을 노리고 있는 강대국들이 이를 그냥 두고 보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로가 눈에 훤히 보이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시기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앞당겨지게 된다고 하겠습니다(사23:8c).
셋째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23:9); 돈을 자신의 능력보다 많이 벌게 된 자는 교만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특히 사람의 이기적인 탐욕을 인정하고 그 욕구를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으로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 결과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돈을 많이 번 자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신보다 똑똑하지만 세상적으로 돈을 많이 벌지 못한 자에 대해서는 자본가들이 멸시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 한둘이 아님)합니다. 그러한 풍토를 소위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 pariah capitalism)라고 합니다. 오늘날 급속하게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나라들 가운데 그와 같은 천박한 자본주의 행태가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건전한 자본주의 윤리와 의식 그리고 기독교 문화가 함께 발전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 옛날 페니키아가 주도하고 있는 지중해 연안의 문화권에서도 그러합니다. 황금만능주의와 세속주의가 고대사회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그냥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사23:9a). 하나님의 역사섭리는 그와 같은 거룩하지 못하고 천박한 문화를 일제히 청소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 있습니다(사23:9b).
넷째로, “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사23:10); 나일 강은 주기적으로 삼각주에 범람을 합니다. 그러면 상류와 중류의 흙이 양분과 함께 하류에 다시 퇴적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삼각주의 평야는 다시 비옥해집니다. 비록 나일 강의 범람으로 그 해의 농사는 큰 손해를 보지만 그 다음 해부터는 엄청난 풍년이 찾아오게 됩니다.
동일한 현상이 스페인에 있는 페니키아의 식민도시 다시스에 임하게 됩니다. 페니키아 왕국 곧 본국의 패망의 소식이 먼 곳 다시스에 있는 식민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이 처음에는 통곡을 합니다(사23:10a).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현실을 받아 들입니다. 밀려오는 본국의 피난민들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어차피 무역으로 황금의 나라를 이룩한 그들입니다. 다시스에서부터 새로운 독자적인 해상왕국을 출범시키고자 합니다(사23:10b). 다시스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카르타고 역시 그러합니다.
다섯째로,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여호와께서 가나안에 대하여 명령을 내려 그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게 하시고”(사23:11); 그러나 페니키아의 잘못된 해상문화를 그대로 상속하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역시 똑 같은 역사섭리를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고 퇴폐향락문화를 보급하는 해상왕국과 그들의 무역업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시돈의 우상문화에 물든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주전 722년에 일찍이 패망시켜버리신 하나님이십니다. 시돈의 영향을 그대로 물려받은 두로의 페니키아 왕국도 멸망하도록 하십니다(사23:11b). 나아가서 그들의 식민지 가운데 똑 같은 꿈을 꾸고 실천하는 왕국들은 모두 패망시키고 말 것입니다(사23:11a). 그 예언이 역사적으로, 훗날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 대군이 어이없게도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패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섯째로, “이르시되,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사23:12); 페니키아의 중심인 두로 항은 철저하게 적에게 섬멸이 되고 맙니다. 두로 사람들의 고향인 시돈의 사람들은 두 가지의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제국의 군대의 침입을 막다가 죽거나 아니면 멀리 배를 타고서 피난을 가는 것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많은 시돈 사람들이 난민이 되어 일단 깃딤(후에는 구브로로 불림) 섬으로 건너갑니다. 그곳까지 추적해오는 적을 피하여 아예 지중해 끝으로 가서 다시스에서 다시 새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사23:12a). 그와 같은 미래를 조망하면서 이사야가 한 마디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페니키아 왕국의 잘못을 다시 되풀이 한다면 용서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황금만능주의와 퇴폐향락문화를 모두 청산하고 부디 창조주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민족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사23:12b 의역).
결론적으로,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페니키아는 특별한 왕국입니다. 무사계급이 왕국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상인계급이 지배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시돈 사람들이 무역항으로 개척한 두로에서 지중해무역을 통하여 페니키아 왕국이 출범을 합니다. 그들은 원료생산지역과 시장을 찾아서 지중해 연안을 탐사합니다. 그 결과 지중해 연안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게 됩니다. 그들 모두가 페니키아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페니키아 왕국의 지배자가 된 두로의 선주와 시돈의 상인들은 식민지에 왕을 봉하고 그곳의 귀족을 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무역선을 안전하게 운행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호위무사단까지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페니키아의 영광이 쇠퇴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에 우상문화와 퇴폐향락문화를 전파한 페니키아를 멸망시키려고 결심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지중해 무역의 큰 이권을 노리고 있던 제국이 페니키아를 침략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천박한 자본주의를 고대사회에 꽃피웠던 두로와 시돈의 왕국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뜻을 새겨보자면,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청지기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마냥 황금만능주의를 추구하고 있는 나라와 사람들에게 다시 전해주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역사섭리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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