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03강(사23: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9월 21일(월)
지중해 해상무역을 지배하고 있는 페니키아의 영광과 두로와 시돈의 멸망에 대하여 (사23:1-6)
창세기를 참조하면, 구 인류는 노아 시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전면심판 곧 홍수심판으로 말미암아 편편한 땅과 함께 그 흔적이 사라지고 맙니다. 홍수심판이 끝나고 노아의 세 아들이 현대인류의 조상이 되고 있습니다. 셈과 함과 야벳이 각각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나누어 살게 되고 훗날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의 조상이 됩니다(창10:1-25). 그 가운데 하나님신앙을 대물림하고 있는 집안이 장자 셈의 가정입니다(창9:26). 모세오경에서부터 시작된 히브리사상은 셈의 집안의 정통성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창10:21-25, 11:10-12:5, 출2:23-25, 19:1-6). 그들이 소위 선민들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이사야는 제22장 ‘환상의 골짜기 예언’에서 선민들의 왕국이 완전히 망하고 나면 새로운 백성들의 사회가 형성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새로운 사회의 리더를 ‘힐기야의 아들 하나님의 종 엘리아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사22:20-21). 그들이 누구이기에 세상임금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있는 것일까요? 선민사회뿐만 아니라 이방인사회에서도 그들이 장차 활약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사22:22-25).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짧은 안목에서 바라보자면, 그 상징은 성군 요시야 왕 때 성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여 종교개혁의 발판을 제공한 대제사장 힐기야(왕하22:4-8) 그리고 제사장나라가 망한 후에도 유다의 백성들에게 소망을 두고서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 예레미야를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렘1:1-3). 그렇지만 긴 안목으로 볼 때에는,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이 땅에 이루어지는 복음의 시대를 이미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해양국가와 대륙의 국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들의 미래에 대하여 이사야는 제23장에서부터 총체적으로 예언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에서 이사야는 지중해 무역의 주역인 페니키아 인들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연안국가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구절을 따라가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사23:1); 이사야가 두로의 멸망에 관하여 경고형식의 강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사23:1a). 두로는 해변 길로 이스라엘 바로 위에 있는 도시이며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입니다. 두로는 본래 그 위에 있는 시돈의 사람들이 개척한 무역항입니다. 시돈 사람들은 두로에 해상왕국을 세움으로써 페니키아의 영광을 지중해에 떨친 족속입니다. 시돈은 창세기에 따르면 함의 넷째 아들인 가나안의 장자입니다(창10:6, 15). 따라서 흑인종이며 하나님신앙을 일찍 버린 민족입니다(삿10:6, 왕상16:31).
아버지 집 가나안을 떠나서 북쪽 해변으로 올라온 시돈은 처음에 어업을 영위했습니다. 하지만 어로작업이 고달프기만 했습니다. 따라서 큰돈을 벌기 위하여 남쪽에 무역항을 개발했습니다. 해변에서 800미터 떨어진 바위 섬 두로에 철통같이 성을 쌓고 큰 배가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항만을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지중해 무역에 나섰습니다. 셈족이 살고 있는 선진국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의 물건을 백인종 야벳 족이 살고 있는 미개한 지중해 연안국에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함족이 살고 있는 애굽의 나일 강에서 생산된 곡물을 큰 배로 실어서 지중해 여러 나라에 팔았습니다. 엄청난 수익이 발생했습니다. 그리하여 두로와 시돈 곧 고대 페니키아의 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정도에 만족을 했으면 좋았습니다. 하지만 두로의 상인들과 시돈의 뱃사람들에게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적인 방법이 크게 유혹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공예품과 예술품을 만들어서 비싼 값에 수출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여신 아스다롯을 새긴 공예품이 인기였습니다. 특히 농사의 신이며 주신인 바알과 미의 여신 아스다롯이 함께 조각이 되어 지중해 여러 나라로 수출이 되었습니다. 예술품과 더불어 우상문화가 널리 전파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알 신과 여신과의 잦은 정사로 풍년과 다산이 찾아온다는 미신이 전파되자 성의 문란과 향락사치문화가 지중해 연안국에 만연되기를 시작했습니다.
한 마디로, 우상문화와 퇴폐문화의 전파의 주범이 바로 돈을 벌기 위하여 성을 종교화하고 상품화했던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철퇴를 내리실까요? 창세기 제2장과 제4장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범적인 청지기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부일처제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자손에게 하나님신앙을 대물림하도록 조치하고 계십니다(창2:20-25, 4:25-26). 그와 같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두로와 시돈의 멸망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훗날 갑작스러운 페니키아의 멸망소식에 가까운 섬 깃딤(창10:4, 예수님 당시에는 구브로, 오늘 날의 키프러스)에서부터 지중해 서쪽 끝 스페인의 항구도시 다시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놀라며 같은 운명을 당하게 될 것임을 알고서 통곡하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사23:1b).
둘째로,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주민들아 잠잠하라”(사23:2); 노아의 셋째 아들인 야벳이 유럽 백인종의 조상이 되고 있습니다(창10:2-5). 그리고 야벳의 4남인 야완(오늘날의 ‘에게’)이 지중해 연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페니키아 인들에 의하여 지중해 무역이 활성화되자 그 덕분에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두로와 시돈의 페니키아 인들이 지중해 무역에 나서서 큰 이익을 얻으면서 연안국에도 소득이 분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사23:2a).
페니키아 왕국이 완전히 망한 다음에는 에게의 그리스인들이, 그 다음에는 카르타고(오늘날의 ‘튀니지’) 인들이, 또 그 다음에는 이태리의 로마인들이 지중해 무역의 주역이 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지중해 연안의 백인들은 무역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경고하시고 있습니다. 페니키아인들처럼 우상을 섬기면서 향락문화에 빠지게 되면 그들도 망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사23:2b).
셋째로,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사23:3); 애굽 제국은 나일강 유역 삼각주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애굽과 시나이 반도 사이에 시홀의 시내가 있는데(수13:3) 애굽은 강을 따라 그곳으로 일단 농산물을 운반합니다. 그리하면 가나안과 아라비아의 여러 족속들이 그 양식을 사갑니다. 그리고 두로의 선박이 와서 그 농산물을 사서 지중해 연안국에 팔고 있습니다(사23:3). 그러므로 애굽의 입장에서는 두로의 선단이 큰 규모의 농산물 수출의 창구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사23:4); 어업을 영위했던 시돈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지중해무역의 이익에 눈을 떠서 남하하여 개발한 항구가 두로입니다. 당시에는 해적들이 약탈식 해상생활을 영위했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두로 항에 적재해놓은 수출물량을 지키기 위해서는 육지에서 떨어진 섬이 보다 안전합니다. 그것도 섬을 요새화하기 위해서는 바위섬이 좋습니다. 그와 같은 적지로서의 조건을 두로 항이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다의 요새’는 바위섬에 개발한 두로 항을 가리키고 있는 말입니다(사23:4).
그런데 왜 두로가 자식이 없다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 한탄에 대하여 시돈이 어째서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하는 것일까요? 간단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두로 항은 단지 철옹성인 무역항에 불과합니다. 발치를 육지에 뻗고서 더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선박을 정박시키고 물량을 선적하며 상인들을 머물게 하는 기능만 수행하고 있습니다.
(2) 그렇지만 시돈은 다릅니다. 그들이 인력을 관리하고 두로의 선박을 실무적으로 운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될만한 물건을 탐색하여 사전에 매점매석(買占賣惜)합니다. 더구나 우상이라고 하더라도 예술품으로 만들어 팔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시돈 사람들은 수출 공예품과 예술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까지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두로를 무역항으로 거느리고 있는 시돈 사람들이 지중해 연안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세운 페니키아 왕국이 지속적으로 식민지를 경영하여 큰 이익을 남기고 있습니다.
(4) 따라서 두로의 항구와 선박을 이용하여 실제로 큰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은 고향이 시돈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두로를 끼고서 이익을 빼먹은 시돈이 더 부끄러운 결말을 당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섯째로,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사23:5): 애굽 제국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수륙양쪽에서 족쇄를 채워야만 합니다. 그래서 애굽의 수출창구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페니키아 왕국을 먼저 멸망시키게 됩니다. 앗수르 제국의 에살핫돈 황제가 나일강 유역의 하 이집트를 정복할 때에 페니키아를 크게 무찌르게 됩니다. 그 후 신바벨론 제국이 등장하여 유다 왕국과 모압 그리고 페니키아를 멸망시킵니다. 그 다음 페르시아 제국은 애굽 제국과 페니키아 왕국을 모두 점령하여 속주로 삼고 맙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페니키아의 운명은 유다 왕국 및 애굽 제국의 운명과 닮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섯째로, “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 해변주민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사23:6); 해상왕국 페니키아가 망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식민지와 무역상대국이었던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은 남아 있습니다. 특히 지중해의 서쪽 끝 스페인에 개척해놓은 항구도시 다시스가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그곳으로 피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망국의 설움이 그들과 함께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제사장나라인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이 하나님의 진노로 망하고 나면 모든 이방나라들이 그 뒤를 잇게 될 것입니다. 똑같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신앙을 버렸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씩 역사적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렘25:29).
이사야는 ‘환상의 골짜기’에서 세상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유다 왕국이 망하고 나면 새로운 영적인 지도자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있습니다. 특히 메시아가 오셔서 복음으로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는 성도들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며 그의 제자들이 새로운 영적인 지도자들, 곧 왕 같은 제사장이요 선지자들이 되어서(벧전2:9) 메시아의 나라를 확장해나갈 것입니다.
그와 같은 변화의 와중에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해양국가와 대륙의 국가들이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그 점에 대하여 복음적인 시각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대한 예언을 계속해나가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지중해 연안국가들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본문은 해상왕국 페니키아의 주역인 두로와 시돈 사람들의 패망을 보고서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깨달으라고 이사야가 경고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이치가 동일하시며 오늘날 21세기 해상무역이 극성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옛날 해상왕국 페니키아에 대하여 이사야가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지 새삼 옷깃을 여미고 하나님 말씀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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