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93강(요약자; 예수사랑)

손진길 2021. 6. 26. 16:36

이사야 강해 제93(19:23-20: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912()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들려주시는 예언의 두려움과 보여주시는 예표의 두려움에 대하여(19:23-20:6)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를 선지자로 세우시고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위탁하셨습니다(1:1, 2:1, 6:1-12). 그런데 그 말씀은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가 예언’(豫言)의 말씀입니다. 둘째가 예표’(豫表)의 말씀입니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미래 곧 역사의 방향성을 미리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표는 그것을 선지자의 특이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6:9). 예언과 예표를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사실은 비극이라고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와 같은 시각에서 본문의 말씀을 들여다보면, 19장 말미의 말씀은 예언입니다. 그리고 제20장의 말씀은 예표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미리 듣고 보면서 무엇을 깨닫고 알아서 처신을 하라는 것일까요? 다음과 같이 묵상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먼저 제19장 말미의 내용입니다. 먼 훗날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대가 열리게 되면 기이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앗수르 제국이 애굽 제국을 더 이상 침략하지 아니하고 서로가 평화적으로 왕래를 하면서 손에 손잡고 세계 복음화에 크게 기여를 한다는 것입니다(19:23-25). 그와 같은 미래를 열기 위하여 이사야는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19:23)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로’(大路, 큰길)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이사야의 시대부터 그 후의 실제 역사를 보게 되면 항상 앗수르 제국이 서쪽으로 원정하여 가나안의 나라들과 애굽 제국을 침략한 역사입니다. 시리아의 아람 왕국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황제 디글랏빌레셀3세가 애굽의 보호를 받고 있는 가나안의 여러 나라를 압박했으며, 사르곤2세가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고 블레셋의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에살핫돈은 하이집트의 소안과 놉 땅 멤피스를 점령하고, 아슈르바니팔은 상이집트의 수도 곧 당시 애굽 제국 제25왕조의 왕도인 테베까지 정복하게 됩니다.

(2)  그런데 복음의 대로는 침략의 길과 정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동방 앗수르로 가는 대로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길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오직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 구축이 되고 있는 대로입니다. 그것도 역사적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애굽이 먼저 가해자 앗수르에게 화해와 용서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역설적이며 매우 아이로니칼한 사건입니다. 과연 그와 같은 이상론(理想論, idealism)에 불과한 예언이 약육강식의 인간세상에서 실현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3)  도저히 실현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선민들조차 이사야의 예언을 믿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예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6:10). 얼마나 백성들이 예언의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섭리의 방향성을 불신할 것 같으며 그와 같은 냉소적인 역설적 표현기법이 사용이 되고 있을까요?

(4)  그렇다면 만약에 이사야의 예언을 곧이 곧 대로 알아듣고서 그 말씀대로 애굽의 백성들이 앗수르의 백성들에게 먼저 그들 앗수르 제국의 과거의 만행을 용서하고 이제는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의 대로를 넓혀가자고 제의를 하게 된다면 그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까요? 그 해답이 바로 이사야의 예언 제19장 제24-25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모든 역량이 역사 가운데 동원이 되는 것입니다(28:18-20, 1:21-23).

둘째로, 똑 같은 맥락에서 제20장의 예표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기이한 행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 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20:2-3). 과연 무엇에 대한 예표이며 그 예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위와 같이 기이한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라고 말씀하신 때가 제20장 제1절에 명기되어 있습니다;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20:1). 이 구절은 한때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앗수르 제국의 역사 가운데 사르곤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대문서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앗수르의 조상으로 보이는 아카드 인들이 세운 통일왕조의 시작이 위대한 사르곤 왕(BC 2350-2294)입니다. 그러므로 문서비평론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선지서의 내용이 거짓이라고 말했습니다.

(2)  그러나 고대유적을 발굴하다가 앗수르 제국의 왕들과 그 위업을 증명해줄 수 있는 흔적들이 흙더미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을 종합해보면, 사르곤1세가 아니라 사르곤2(BC 722-705)라고 하는 앗수르 제국의 정복 왕이 즉위 초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패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앗수르 제국 변방으로 이주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전 713년에는 장수와 군대를 보내어 블레셋의 도시국가 아스돗을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블레셋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반항을 하자 2년후에는 사르곤2세가 친정(親征, 왕이 직접 원정에 나서는 것)을 하여 아스돗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것입니다.

(3)  그와 같이 사르곤2세가 아스돗을 중시하여 그곳을 완전히 확보하고자 노력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북에서 남으로 해변 길을 따라서 애굽으로 갈 수 있는 초입에 아스돗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앗수르 제국이 아스돗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으면 언제든지 애굽을 견제하고 필요하다면 남하하여 손쉽게 애굽 제국을 침략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그와 같은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면서 세상사람들에게 3년간 경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경고의 내용은 한 마디로, 애굽 제국의 백성들이 훗날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받아 포로가 되어 마치 이사야처럼 벌거벗은 몸과 맨발로 북송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20:4-5).

(5)  앗수르 제국은 무기체계가 발전해있고 군의 편제와 기강이 뛰어났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 제국입니다. 그리고 점령국의 백성을 다른 나라로 이주시키고 혼혈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반란을 사전에 잠재워버리는 악랄한 제국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혈이 되고 그 흔적이 사라지고 있습니다(왕하17:6, 24, 33-34). 이제 사르곤2세가 장수 다르단을 보내어(20:1) 아스돗을 점령한 후 똑 같은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곳 블레셋 백성들을 벌거벗겨서 북쪽의 다른 나라로 이주시키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이사야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재현하면서 애굽 제국에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20:4-5).

셋째로, 그렇다면 진짜 중요한 경고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 내용이 마지막 절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그날에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20:6). 요지는 세상의 제국 애굽이 의지할 바도 못되고 구원자가 되지를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힘센 사람 힘센 나라를 의지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 열매를 얻지를 못하고 부끄러움만을 당할 뿐이라는 사실을 이사야가 예표로써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를 비롯한 가나안의 나라들은 애굽 제국을 의지하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신앙의 회복이 없으면 민족들이 역사 가운데 수치를 당할 뿐이라는 이사야의 경고입니다. 과연 그러한 것일까요? 다시 중동의 역사를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이사야 당시 앗수르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가나안의 여러 나라가 애굽 제국을 중심으로 동맹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주전 733년에 아람 왕국이 망하고 11년 후에는 북조 이스라엘이 망하고 맙니다. 주전 713년에는 블레셋의 북쪽 해변 도시국가인 아스돗마저 점령을 당하고 맙니다.

(2)  아스돗을 되찾고자 하는 시도도 주전 711년에 좌절이 됩니다. 그리고 10년 후에는 남조 유다 왕국이 예루살렘 성만 남기고 한때 전부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군대에 짓밟히게 됩니다(왕하18:13, 17). 그런데 이적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원정군 185천명을 모조리 죽여버립니다(왕하19:34-37). 산헤립이 본국으로 도망을 치고 가나안 여러 나라가 겨우 숨을 돌립니다.

(3)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에살핫돈이 다시 쳐들어와서 가나안 여러 나라의 종주국인 애굽 제국의 정복에 나섭니다. 하 이집트를 점령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 이집트의 애굽 인들이 벌거벗은 포로가 되어 앗수르로 먼저 끌려가게 됩니다”(20:4a). 뒤를 이어 앗수르의 아슈르바니팔 황제가 쳐들어와서 애굽 제국을 통치하고 있는 구스 인들의 제25왕조를 끝장을 내고 맙니다. 그 결과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게 됩니다”(20:4b).

(4)  따라서 결론은 애굽 제국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백성들이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고 나라가 세상의 제국을 종주국으로 삼고서 그 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로 반드시 벌거벗게 되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알게 해주고자 친절하게도 선지자 이사야로 하여금 3년간 벌거벗은 몸으로 백성들에게 예표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넷째로, 또 하나의 교훈이 이사야의 예표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예표로 이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치 벌거벗은 사람처럼 독생자의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겨놓고서 이 땅에 피조물인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3년 이상 열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동거동락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가르치며 백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하나의 예표로서 깊이 묵상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의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깨달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주고 있는 삶의 모습을 바라보고서 자신의 삶을 바꾸어나가야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아가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벌거벗은 줄을 모르고 세상의 힘을 의존하여 곤경과 위기를 벗어나고자 계속 발버둥을 치게 되면 세상의 포로가 되며 크게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주전 7-8세기에 선지자 이사야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으로 그리고 삶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의 예표로써 전했다고 한다면, 700년 후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역시 예언과 예표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멸망의 대상인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예언으로 들려주고 또한 자신의 삶으로 하나의 예표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와 그 말씀대로 실천하시는 삶, 그것이 정확하게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하기에 어렵다고 한다면, 그것을 예표로서 보여주시고 있는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가운데 세상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는 믿음의 길이 정확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