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92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6. 26. 08:53

이사야 강해 제92(19:22-2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911()

 

이사야의 시대를 감안할 때 장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세 나라 이스라엘, 앗수르, 애굽의 의미는 무엇인가?(19:22-25)

 

사람은 한 평생 세상을 보고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각자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평생 동안 볼 수 있는 것과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요? 그 점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3:14-18).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그 의미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은 평생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만을 머리에 기억시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당사자의 세계관을 형성합니다. 그 세계관으로부터 경험적인 지식체계가 형성이 되고 그것을 자손에게 대물림을 하게 됩니다.

(2)  그런데 사람이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은 자신의 세계관보다 훨씬 작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발로 직접 디딜 수 있는 영역만큼 관리하거나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일부를 소유할 수 있을 뿐입니다.

(3)  그런데 장조카 롯이 자신을 떠나버리자 홀로 이방 땅 가나안에 남겨진 노년의 아브람 부부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임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밟게 되는 지역을 모두 그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13:17). 장차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면 그가 밟는 땅이 모두 자신에게 귀속이 되는 엄청난 축복이 임한다는 내용입니다.

(4)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받기 위해서 헤브론에 이르러 아브람이 그 옛날 노아처럼 제단을 쌓고 언약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8:20, 13:18). 그것으로 헤브론 지역에 아브람의 아성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는 훗날 헤브론의 호족이며 하나님의 방백으로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14:13-16, 23:6).

위와 같은 관점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인생관과 세계관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가 보고 있는 그것이 그의 세계관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발로 다녀본 그것이 그의 인생관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사야의 인생관은 다윗 왕조 유다 왕국에서 형성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두 강대국,  곧 동방의 강대국 앗수르 제국과 서방의 강대국 애굽 제국이 이사야가 볼 수 있고 머리 속에 그려볼 수 있는 그의 세계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21세기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성도들의 것과 비교할 때 매우 작고 제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담기어 있기에 작다고 하여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사야의 인생관과 세계관의 폭을 넓혀서 현대인의 시야와 시각에 맞게 다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그와 같은 입장에서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본문의 각 구절을 다음과 같이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19:23); 역사를 보면, 애굽 제국은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받아 제25왕조가 무너지는 비극을 맛보고 있습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신바벨론이 득세하여 앗수르 제국을 와해시켜주기 때문에 애굽이 독립을 얻고 제26왕조를 시작하게 됩니다. 어쨌든 양 제국 사이의 전쟁은 동방의 앗수르가 서방으로 진출하여 애굽을 침입하는 양상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대목에서 전쟁의 침입로가 아니라 정반대로 전개가 되고 있는 또 하나의 대로’(大路, 큰길)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앗수르가 서방에 있는 애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애굽이 동방에 있는 앗수르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전쟁으로 정복하는 길이 아니라 복음으로 평화를 구축하는 길입니다. 애굽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새 역사를 맞이하여 동방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역사에 비추어보면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이해볼 수 있습니다;

(1)  먼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의 철학과 학문에 비추어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아볼로의 선교도 그 일환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18:24-26).

(2)  그 결과를 시리아와 동방세계에 전하게 됩니다. 그 성과가 멀리 중국에서는 경교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3)  어쨌든 서방에서 동방으로 기독교가 전파된다는 방향성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실제로 동방선교가 서방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로,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19:24); 선지서를 저술하고 있는 이사야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의 세계는 이스라엘과 애굽 그리고 앗수르라는 세 개의 나라가 전부일 수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주전 8세기의 사람 이사야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넓은 세계관입니다.

이사야는 그의 세계관을 이루고 있는 세 나라를 이 대목에서 전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보고 있는 세계는 전부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시대가 온 세계에 다가오고 있음을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눈으로 그 시대를 미리 바라보면서 이 대목을 뚜렷이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애굽, 앗수르라고 하는 순서가 다음과 같이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스라엘에서 탄생을 하고 애굽에서 자라나서 동방으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앞으로 애굽의 곱틱교회에 대한 연구가 더욱 요청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19:25); 이 대목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시면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표현기법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애굽에 대하여 내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앗수르에 대하여 내가 지은 나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스라엘에 대하여 특별히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명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출애굽 당시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입니다(3:7, 5:1).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바로의 백성들입니다(8:29).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독하게도 듣지 아니하는 완악한 자입니다(8:15). 그의 백성들인 애굽인들도 그러합니다(9:34). 그런데 이사야는 그와 같은 바로의 시대가 이미 지나가고 있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멀지 아니하여 세상임금들이 쫓겨나고(12:31-32)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호세아의 글과 사도 바울의 글이 그러합니다;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1:10),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9:25).

(2)  창세기를 보면, 앗수르는 노아의 장자인 셈의 차남입니다(10:22). 셈은 아버지 노아로부터 하나님신앙을 대물림하고 있는 훌륭한 장자입니다. 노아의 축복이 다음과 같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9:26). 물론 앗수르의 자손들이 때로는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제멋대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의 역사를 보면 회개의 영이 그곳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를 파견하였을 때에 그들이 회개함으로 멸망을 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4-10). 이사야는 그와 같은 회개의 역사가 다시 앗수르에 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복이 있을지어다”(19:25).

(3)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스라엘이 가장 복이 있는 나라와 민족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업을 또 다시 상속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찍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 강을 건너가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나안 땅을 상속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11:23). 그리고 장차 그들 열두 지파가 다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천국의 기업을 얻을 것입니다. 그 대목을 계시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글이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21:10-12).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가르쳐주고자 한 축복의 조건이 무엇일까요? 본문 이사야의 예언으로 미루어서 생각을 해보면 그것은 첫째, 전쟁의 길이 아니라 복음의 길을 닦는 것입니다. 둘째, 선민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우월사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백성들이며 하나님의 기업을 함께 얻을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셋째, 선민 이방인 차별하지 아니하고 함께 손에 손잡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의 복이 이 땅 위에 충만할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아서 예언하고 있는 그와 같은 말씀이 나름대로 복음의 진수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선지자 이사야와 같은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남은 인생을 힘있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