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90강(사19:11-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9월 9일(수)
애굽 제국을 치시는 여호와의 세 번째 징계의 내용(사19:11-15)
애굽 제국을 편의상 남북으로 갈라본다면, 대체로 남쪽이 ‘상 이집트’이고 북쪽이 ‘하 이집트’에 해당합니다; 애굽 제국의 젖줄인 나일 강이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려 북단 지중해로 들어가고 있으므로 자연히 나일강 상류와 중류가 상 이집트이고 하류와 삼각주 지역이 하 이집트입니다. 그리고 중심도시로 보면, 하 이집트의 수도가 ‘멤피스’이고 상 이집트의 수도가 ‘테베’입니다. 고대문명이 나일 강 하류 삼각주 지역에서 먼저 꽃이 피었으므로 애굽 문명의 시작이 북쪽이고 하 이집트에 자리잡고 있는 ‘멤피스’가 ‘고’(古, old) 이집트 제국의 수도입니다.
그런데 하 이집트의 원주민인 애굽 인들이 상 이집트에 속하는 구스 인과 누비아 인들에게 밀려서 제국의 지배권을 잃어버리는 역사가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시기가 묘하게도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활약을 하던 제12왕조 그리고 이사야의 시대인 제25왕조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그 수도가 테베이며 그 옛 이름이 ‘노’입니다(겔30:14-16). 참고로, 하 이집트의 옛날 수도인 멤피스는 그 옛 이름이 ‘놉’입니다(사19:13). 그리고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자신의 형제와 부친인 야곱을 애굽에 정착시킨 지역이 당시 수도인 테베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 국경지역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멤피스의 동북면인 ‘고센’ 땅인데(창46:34, 47:4, 11-12) 동쪽 국경이 가까워서 출애굽하기에 가장 용이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훗날 안보상 무지하게 중시가 됩니다. 왜냐하면, 힉소스 인들이 그 길로 쳐들어와서 오랜 세월 애굽 제국을 지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을 앞둔 시기에 애굽 제국을 통치했던 민족은 애굽 인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상 이집트로 쫓겨가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동쪽에서 쳐들어온 힉소스 인들에게 고향인 하 이집트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영웅 왕 아흐모세가 힉소스 인들을 몰아내고 통일왕조인 제18왕조를 창건했지만 여전히 수도는 상 이집트의 왕도인 테베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힉소스 인을 비롯한 동방족속들의 침입을 초기에 방어하기 위하여 고센 땅을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요새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 이름이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타나고 있는 ‘라암셋’입니다(창47:11, 출1:11).
본문에서 ‘소안’(Zoan)이라는 지명이 여러 번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의 ‘타니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그곳은 이사야 당시 애굽 제국을 통치하고 있던 상 이집트의 구스 왕 디르하가가(왕하19:9) 북부의 행정 및 군사도시로 중시했던 곳입니다. 그는 그 도시의 문신(文臣)과 무신(武臣)들이 지혜를 모아서 동쪽으로부터 오는 적의 침입과 위협을 조기에 격퇴시켜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성공적이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살고 있는 그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문신과 무신들의 머리를 한없이 어둡고 어리석게 만들어버리셨기 때문입니다(사19:11, 13). 그 사실을 적고 있는 본문의 구절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소안의 방백은 어리석었고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의 책략은 우둔하여졌으니 너희가 어떻게 바로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이라, 나는 옛 왕들의 후예라 할 수 있으랴?”(사19:11); 나일 강 하류에 고 이집트 제국이 성립이 되었을 때에 그들의 수도는 놉 지방 멤피스입니다. 그 도시는 나일 강 하류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날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는 강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왜 그와 같은 지정학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벨탑의 붕괴로 동방 메소포타미아에서 흩어져서 서쪽 애굽으로 들어오는 이주민들 곧 넓은 의미의 ‘히브리인’(창11:9, 31, 14:13)들의 문명을 받아들여서 고대 애굽 인들이 제국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계속 메소포타미아의 선진문물을 손쉽게 받아들이자면 나일 강 하류 삼각주의 동북면에 수도를 두고 있는 것이 가장 유리한 것입니다. 반면에 현대 이집트는 선진문물이 이제는 동방이 아니라 지중해 건너 북방과 서방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도 카이로를 유럽선진국을 바라보고 있는 위치에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훗날 동방에서 선진무기체계를 앞세우고 침략을 해온 힉소스 인들에게 제국을 빼앗긴 적이 있는 상 이집트 사람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다행히 영웅 왕 아흐모세가 그들을 몰아내고 제18왕조를 창건했지만 그들의 ‘국시’(國是)는 동방민족의 향방을 주시하며 사전에 침략의도를 분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국을 다스리고 있는 상 이집트의 수도는 비록 남쪽의 테베이지만 전략적 국경도시는 나일 강 하류 동북면 소안에 두고 있습니다. 그 위치는 멤피스와 라암셋의 중간인 타니스라고 하겠습니다.
애굽 제국의 바로인 구스 왕은 문신과 무신 가운데 똑똑하고 지략이 뛰어난 신하를 우선적으로 그곳에 발령을 내고 있습니다. 제국의 안보를 위하여 그들이 전략을 수립하고 외침에 대하여 철저하게 방어를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일 강 중류 테베에서 바로와 귀족들이 두 다리를 쭉 벋고서 잠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러하지를 못합니다. 지혜가 뛰어난 신하들을 우선적으로 소알에 발령을 냈는데 그들이 짜고 있는 전략은 어리석기 그지 없습니다. 왜 그와 같은 결과에 이르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실로 궁금합니다.
둘째로, “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뜻을 알 것이요, 곧 네게 말할 것이니라”(사19:12); 그 이유는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애굽 제국을 혼내겠다고 하는 정책이 발효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혼내기 위해서는 동방의 적들을 불러들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먼저 애굽 제국 내에서 동북면의 국방을 책임지고 있는 소안의 행정책임자와 군사책임자들의 머리를 아둔하게 만들어버리신 것입니다. 그 결과 이사야의 영적인 눈앞에 애굽 제국을 침입하고 있는 동방제국의 군대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장차 애굽을 점령하고자 달려오고 있는 제국이 앗수르(에살핫돈과 아슈르바니팔), 신바벨론(느부갓네살), 페르시아(캄비세스) 등입니다.
셋째로, “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도다. 그들은 애굽 종족들의 모퉁잇돌이거늘 애굽을 그릇가게 하였도다”(사19:13); 이사야가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던 당시 애굽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던 구스 왕가의 제25왕조가 끝장이 나고 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산헤립 황제의 뒤를 이은 에살핫돈이 군사도시 소안은 물론 놉 땅의 고도 멤피스를 점령하고(왕하19:37) 그 후 아슈르바니팔이 애굽 제국의 수도인 노 땅의 테베마저 정복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앗수르 제국이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신바벨론과의 전쟁에서 패하기 때문에 애굽이 다시 독립을 얻어 제26왕조가 시작이 되지만 그것은 수치스러운 역사입니다.
넷째로,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어지러운 마음을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애굽을 매사에 잘못 가게 함이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림 같게 하였으니”(사19:14); 어지러운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 애굽 제국의 수도는 나일 강 중 상류에 있는 테베입니다. 구스의 왕이 바로가 되어서 천하를 호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앙의 귀족들과 명문대가들은 안전한 후방인 테베에서 큰 소리를 치고서 잘 살고들 있습니다.
그 반면에, 똑똑하고 지혜가 뛰어난 유능한 신하들이 멀리 북쪽 국경도시 소안으로 발령을 받아가서 외지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동북면 국방과 안보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여 자신들을 배치하고 있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신하들인 중앙귀족들의 태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함께 지내기 어려운 똑똑한 인재를 황제의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만드는 방법으로 멀리 소안이나 놉 땅 멤피스로 발령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좌천이며 유배에 준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불평불만이 싹트고 있으며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제국이 비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애굽에서 머리나 꼬리며 종려나무 가지나 갈대가 아무 할 일이 없으리라”(사19:15); 아무리 인재가 많고 똑똑한 신하가 많으면 무엇을 합니까?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주고 지켜보아 주며 상급을 정확하게 베풀어줄 수 있는 통치자가 있어야만 합니다. 정치가 살아 있어야만 합니다. 최고통치자의 정신이 올바르게 날이 서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신하들이 신이 나서 그 좋은 머리로 국방을 튼튼히 하고 나라를 융성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애굽의 황제인 바로에게는 그와 같은 마음의 자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가 교만과 거만의 극치를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라고 하는 현인신의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주 앞에 옷깃을 여미는 경외심이 없으며 또한 생명을 사랑하고 긍휼을 베푸는 하나님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 결과 바로의 절대권력이 절대적으로 부패하고 있습니다. 그를 섬기고 있는 귀족이나 백성들도 바로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애굽 제국의 신민(臣民)들이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도도한지 모릅니다. 그들은 살아있다고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은 것과 같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인생들이며 제국입니다. 그러므로 그 멸망이 이사야의 눈 앞에 선명하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똑똑한 신하와 지혜로운 신하를 요충지에 배치를 하기만 하면 국가안보와 제국의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바로의 생각이 잘못이라고 이사야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정신이 바로 서있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를 경외하며 그 지혜와 생기를 받을 때에 사람의 지혜와 지식이 올바로 쓰임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 여호와를 우상의 하나로 우습게 여기고 있는 그들에게 그와 같은 겸손과 생명을 살리는 지혜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출세와 중앙권력의 장악만을 위해서 그 좋은 머리를 사용할 따름입니다. 따라서 국경의 요충지인 소안과 놉 땅의 멤피스가 적에게 점령을 당하게 되는 치욕을 오래지 아니하여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은 그 옛날 애굽 제국에만 국한되고 있는 경고가 아닙니다. 시간을 넘어 오늘날 현대국가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동일한 일을 행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은 사례가 같으면 동일한 원칙이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가며 아버지의 뜻을 전심으로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평생토록 함께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세상적인 지혜와 지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인 지혜의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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