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8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6. 21. 22:40

이사야 강해 제85(17:12-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94()

 

이사야는 제각각 자국의 발전과 동족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열방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세상을 무엇에 비유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역사는 어떻게 끝장이 나고 있는가? 그 가운데 성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17:12-14).

 

참으로 짤막한 본문입니다. 단지 세 절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과 의미는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역사를 섭리하시고 종말적인 심판을 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력을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새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그 가운데 성도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도 엿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과연 그러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내용인지 지금부터 한 구절씩 검토하면서 함께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 파도가 치는 소리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열방이 충돌하였으되, 큰 물이 몰려옴같이 그들도 충돌하였도다”(17:12);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동족들에게 전하면서 여러 나라와 민족이 살기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 마치 바다의 파도가 치고 있는 것과 같아서 슬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바다의 파도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대목은 욥기 제38장입니다;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때에 내(여호와)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바다의 파도)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38:8-11). 그 뜻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육지와 바다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물이 땅 위로 솟구치려고 할 때에 마치 문을 만들어 닫고 빗장을 채우듯이 하나님께서 중력을 만드셔서 그것을 땅 아래에 가두어버렸습니다(1:9-10).

(2)  그러나 문제는 땅 위 바다에서 파도가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세가 큰 바람을 맞아 사나워지면 온 땅을 집어삼킬 것만 같습니다. 오늘날 일명 쓰나미로 알려지고 있는 바다 해일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파도가 침범할 수 없는 땅의 경계를 일찍이 엄격하게 정해 놓으셨기에 오늘날에도 지면에서의 인류의 삶이 가능합니다.

(3)  여러 나라와 민족 사이의 다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다의 파도와 같이 계속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큰 전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찍이 바다의 경계를 정하고 계시듯이 국지전(局地戰)이 모두를 학살하는 전면전쟁(全面戰爭)으로 전개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 계속 제어를 하고 계십니다. 만약 그 제어장치가 깨어져버린다면 상호보복적인 핵폭발로 오늘날 인류의 삶의 터전인 지구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입니다. 

(4)  흔히들 지구를 열 번 가까이 태워버릴 수 있는 핵무기가 강대국들 사이에 비치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만약 어느 통치자가 실수로 핵 공격을 명령하고 잘못 핵 단추를 눌러버린다고 한다면 순식간에 상호연쇄적인 핵 공격으로 인류의 삶은 끝장이 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시대를 20세기후반부터 살아오고 있는 인류입니다.

(5)  그런데 과연 정치지도자들이 현명하고 지혜스러워서 아직 핵 단추를 누르지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은 때로 실수를 범할 수 있으며 최고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를 맞이하여 아직도 인류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욥기에 비추어보면 명백하게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6)  하나님께서 바다의 파도를 가두고 경계를 정하고 계시듯이 그렇게 열방의 전쟁을 제어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본문에서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이 모르고서 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지 아니하시면 바닷물이 온 땅을 덮어버리듯이 그렇게 끝장이 나고 말 텐데도 그러합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그 점을 모르고서 서로 이익을 챙기려고 다투며 전쟁을 일삼고 있는 여러 족속들의 행태가 한없이 슬프다는 것입니다.

둘째로,열방이 충돌하기를 많은 물이 몰려옴과 같이 하나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그들이 멀리 도망함이 산에서 겨가 바람 앞에 흩어짐 같겠고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 같을 것이라”(17:13); 온 세상을 섭리하시고 제어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를 못하고 감히 여러 족속들이 서로 전쟁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전쟁의 양상이 상호보복적이며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한꺼번에 모두가 망하게 되는 양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한 파국을 누가 어떻게 막고 계시는지 본문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이해하기 쉽게 마태복음 제8장의 일부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8:23-27).

사람들은 파괴를 향하여 달려나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네가 죽고 내가 살겠다고 하는 약육강식의 철칙으로 싸우고 있지만 나중에는 원한에 사무쳐서 이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나 죽고 너 죽자는 식으로 일종의 치킨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1960년대 초 미국과 큐바 사이의 바다에서 벌어졌던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과 같습니다. 한 쪽이 크게 양보하지 아니하면 세계 제3차대전으로 그리고 핵전쟁으로 이어지고 말 상황인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젊고 대담한 미국 대통령의 승리라고 혹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것일까요? 본문에서는 분명히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신 것입니다. 어리석은 충돌을 하고 있는 그들을 꾸짖어 상황을 정리하신 것입니다. 창조주의 역사섭리 안에서 그들은 마치 바람에 나는 겨처럼 그리고 폭풍에 날리는 티끌처럼 모두들 물러간 것입니다”(17:13 의역). 그 옛날 바다와 파도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위력이 오늘날에도 은밀하게 역사하고 있기에 상호공멸의 역사가 다시금 뒤로 물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이는 우리를 노략한 자들의 몫이요, 우리를 강탈한 자들의 보응이니라”(17:14);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수없이 막막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은 작은데 몰려오는 어려움은 월등히 큰 것들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인 지식과 지혜를 동원해도 극복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아직도 너나없이 숨을 쉬면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와 같은 결과를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하여 본문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1)  하루를 끝내면서 저녁까지 이어지는 두려움이 엄습을 해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명예나 성취 또는 건강함이 일순간에 약탈을 당하고 강탈을 당할 것만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두려움의 실체는 자신의 능력과 상상을 넘어서는 문제가 발생해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해결을 할 수가 없으며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창세기 제2장에서 그 해결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2:2-3).

(2)  사실상의 천지창조는 창세기 제1장을 보면 이미 6일 동안에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2장에서는 제7일에 마무리를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인데 무엇을 했다는 것일까요? 그 비밀은 세 가지 용어 가운데 들어있다고 하겠습니다; 안식, , 그리고 거룩함입니다.

(3)  안식은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하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돌보고 관리하는 일입니다. 특히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막중한 청지기의 의무를 행하고 있습니다(6:39).

(4)  하지만 사람의 인생살이가 그러하듯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능력은 빤한데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는 어렵기만 합니다. 어찌하면 될까요? 비슷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서는 결코 해결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일과를 끝내면서 그 문제를 들고서 하나님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먼저 상세하게 설명을 드리면서 문제의 해결을 부탁 드립니다. 그와 같은 작업이 제7일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5)  하나님의 답변을 듣습니다; “내일 해가 뜨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놓을 테니 너는 안심하고 잠을 자라고 하십니다”. 그 말에 모든 문제를 맡겨드리고 편히 잠을 이룹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모든 문제가 너무나 멋지게 해결이 되어 있는 새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바로 안식의 의미하고 하겠습니다.

(6)  그렇다면 안식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첫째,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임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빨리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께 문제를 들고 나올 수 있도록 한 날이 바로 거룩한 안식일입니다. 둘째, 맡겨드리고 안심하고 주안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자가 행복한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다음 날 아침에 문제가 해결된 새 날을 마주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 가운데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의 의미입니다.

(7)  그렇게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때문에 이사야가 신이 나서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저녁에 하나님께 말씀 드린 그 문제가 밤 사이에 깨끗하게 해결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의 것을 강탈하고자 했던 적들을 물리쳐주셨으며 네가 약탈 당한 것을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해주셨기 때문이다”(17:14 의역). 참고로, 본문의 내용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메소포타미아 다국적군을 물리치고 조카 롯을 비롯한 인질을 구출하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약탈당한 재물을 되찾아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14:15-20).

결론적으로, 바다에 파도가 거세게 일어나지만 결코 사람이 살고 있는 땅덩어리를 완전히 휩쓸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경계를 정하시고 엄히 제어를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욥기의 내용을 참조할 때 본문의 이사야 예언은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이사야의 말 그대로 열방이 제 민족의 이익과 자국의 발전을 위하여 갈등과 투쟁의 역사를 되풀이 해오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전쟁의 양상이 모두를 멸망시킬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다의 파도와 같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섭리로 한계를 넘지 못하도록 설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마치 주님이 바다와 파도를 꾸짖어 잔잔하게 만드신 것과 같은 역사가 다시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예언을 통하여 호소하고 있습니다; “부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두려움에 떨면서 저녁을 맞이하지 마십시오. 그 문제를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말씀 드리고 그 해결을 맡겨드리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안에서 편히 잠을 이루고 있는 그 사이 밤 시간에 적들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17:14 의역).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주전 701년 앗수르 제국의 공격을 받아 예루살렘 성에 갇힌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찾아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합니다. 그러자 밤사이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군사 185천명을 죽여버리고 맙니다(왕하19:35). 이튿날 아침에 히스기야 왕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새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그 효력이 변함없이 나타나기에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이 되지 않음을 빨리 깨닫고 겸손하고 정직하게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문제를 맡겨드리고 그 대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튿날 아침에 주시는 그 새날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 새날이 자신의 상상이나 소원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서 돌이켜보면, 그 해답이 정확하고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공의로운 것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