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83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6. 21. 02:01

이사야 강해 제83(16:6-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92()

 

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절하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교만한 모압의 최후와 하나님의 눈물에 대하여 이사야가 예언을 하다(16:6-14).

 

본문은 세 가지의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모압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되는 이유를 거론하고 있습니다(16:6, 12). 둘째, 그 때문에 모압 땅에 임하게 될 내우외환(內憂外患)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 미구에 모압이 당할 참혹한 심판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고 계심을 이사야가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16:9, 11). 이제부터 하나하나씩 검토하면서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6)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7) 그러므로 모압이 모압을 위하여 통곡하되, 다 통곡하며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그들이 슬퍼하며 심히 근심하리니”(16:6-7);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압의 잘못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교만, 거만, 분노, 자랑 등 네 가지 용어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교만은 남의 말을 들을 때에 상대방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나 뜻보다 자신이 세상살이에 있어서 더 똑똑하고 처세를 더 잘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동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판단과 생각을 앞세워서 대담하게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같습니다(3:5-6).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2)  모압의 조상이 아브라함의 장조카인 롯입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서 천사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의인입니다(19:16-22). 하지만 그의 자손들인 모압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무시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세상을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거만은 다른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사랑이 지나치게 되면 거만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항상 옳다고 과신하게 되면 상대방을 평가절하하게 됩니다. 여기서 모압 사람들이 거만해질 수 있는 이유는 물이 많고 풀이 잘 자라며 포도나무 농사가 잘 되어서 생활이 윤택해졌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좋아서 사는 데 지장이 없어지니 못살고 있는 이웃 백성들이 눈 아래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4)  분노는 자신의 교만하고 거만한 태도가 통하지를 아니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면, 스스로 생각하기에 똑똑하고 잘 살고 있는데 주위의 이웃 백성들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형편없는 이웃이 감히 그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 자존심이 상하고 화를 내게 됩니다. 한 마디로 무시를 당했다고 판단하여 상대방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노는 자신이 옳거나 그르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야만 하며 자신을 섬겨주어야만 하는데 그러하지를 아니하기 때문에 분노하며 전쟁도 불사하게 됩니다. 모압의 태도가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5)  자랑은 세상적인 영광과 성공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보고 싶어하시며 찾고자 하는 열매가 없습니다. 그 자랑에 걸맞게 하나님께 올려드려야만 하는 겸손과 온유와 생명살림의 역사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없이 세상적으로만 잘 나간다고 자랑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보호해줄 가치가 없습니다. 종내에는 세상적인 힘을 더 많이 가진 제국을 만나서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6)  위와 같은 모압의 잘못 때문에 내우외환(內憂外患)이 밀어닥칠 것입니다(16:7-14). 이사야는 장차 바깥에서 오는 전쟁이라는 외환(外患) 이전에 당장 국내적으로 어려움과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모압 농업의 중심지이면서 수도 과 가까운 지역이 길하레셋 일명 기르입니다(15:1). 그곳은 물이 풍부하여 농사가 잘 됩니다. 그래서 사사 시대에 가나안에서 가뭄을 만난 나오미의 남편이 그곳으로 이주를 하기도 했습니다(1:1-2). 뿐만 아니라 그곳은 포도농사도 잘됩니다. 일조량이 많아서 포도가 달고 건조를 하게 되면 양질의 건포도가 생산이 됩니다. 무게가 줄어 있으므로 수출품으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7)  그런데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밀 농사가 안되고 포도생산이 안됩니다. 더구나 일조량이 엄청 줄어들어서 건포도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랑스러운 길하레셋의 건포도 떡이 생산이 안되고 있습니다(16:7b). 살 길이 막막해지고 있습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재해를 당했지만 모압 백성들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심판인 줄을 모르고 그저 슬퍼하며 심히 근심하며 통곡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16:7ac). 끝까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있는 교만하고 거만한 모압 백성들의 말로가 눈에 선하게 보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둘째로, “(8) 이는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랐음이라. 전에는 그 가지가 야셀에 미쳐 광야에 이르고 그 싹이 자라서 바다를 건넜더니 이제 열국의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었도다. (9)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실과, 네 농작물에 즐거운 소리가 그쳤음이라”(16:8-9); 내우에 이어서 회환이 찾아들 것입니다. 이사야는 모압의 농업중심지 길하레셋에만 자연재해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1)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재해가 더 심합니다. 헤스본의 밀 농사와 십마의 포도농사가 모두 망조가 들게 됩니다(16:8a). 모압의 북쪽에는 아르논 강이 있어서 농사가 잘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국경을 넘어 더 북쪽으로 가게 되면 광야가 나타납니다. 농사가 잘 안 되는 북쪽 국가에 농산물수출을 하던 모압입니다. 그 무역의 전진기지가 야셀로 보입니다(16:8b). 그런데 자연재해의 발생으로 모압의 농업이 무너지자 수출기지 야셀에도 통곡이 찾아오고 있습니다(16:9a).

(2)  이사야는 북쪽의 농업지역 헤스본과 엘르알레의 지명을 또 거론하고 있습니다(16:9b). 그곳은 선지자 이사야가 15:4’ 절에서 적의 침공을 받게 되는 북쪽의 도시라고 이미 거론을 한 바가 있습니다. 모압의 비옥한 땅을 탐내어 이웃나라가 침입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모압에 재앙이 들어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힘센 제국의 군대가 북쪽 국경으로 내침을 하게 될 것입니다(16:8c, 9c). 이사야가 마치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상세하게 예언을 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아찔한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10)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들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11) 이러므로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같이 소리를 발하며 내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16:10-11); 기름진 밭에 흉년이 찾아오고 포도원에 생산이 크게 감소하는 것은 자연재해일 수가 있습니다(16:10a). 그러나 포도를 밟아서 포도주를 생산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장정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많이 전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16:10b). 그러므로 이사야는 전쟁의 발생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이 되고 말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하나님 앞에 교만하고 거만한 모압을 심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이사야가 말해주고 있습니다(16:10c). 그렇지만 그렇게 모압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다고 이사야는 전하고 있습니다(16:11a). 특히 수도인 을 지키기 위하여 요새지역 길하레셋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전사할 것을 생각하니 창자가 끊어지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 뒤따르고 있습니다(16:11b).

넷째로, “(12) 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없으리로다. (13) 이는 여호와께서 오래 전부터 모압을 들어 하신 말씀이거니와”(16:12-13);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군인들만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인들도 신에게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모압의 종교적 지도자들이 정성을 다하여 바알 신전과 그모라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16:12b). 그리고 일반백성들은 산당에 올라가서 우상들에게 한 마음 한 뜻으로 구원을 기원하고 있습니다(16:12a). 그러나 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16:12c).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우상들이 어찌할 수가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16:13, 40:18-19, 44:17-20).

다섯째로,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3년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그 남은 수가 심히 적어 보잘 것 없이 되리라 하시도다”(16:14); 이사야가 블레셋과 모압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을 위탁 받은 시점은 주전 728년 경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아하스 왕이 죽던 해 곧 히스기야 왕이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던 해라고 그때를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14:28). 그렇다면 위의 구절에서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시기 곧 삼 년 내에’(16:14a)라고 하는 해는 주전 725년경이 됩니다. 그 시기의 특수성과 더불어 본문의 말씀을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1)  앗수르 제국의 군대가 주전 733년에 시리아에 있는 아람 왕국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주전 722년에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주전 725년은 옛날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주둔하고 있는 앗수르의 군대가 틈틈이 가나안 일대의 왕국들을 침략하고 있던 시절입니다. 끈질기게 저항을 하고 있는 왕국들이 블레셋, 유다, 그리고 모압 등입니다. 그 가운데 다메섹에서 곧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모압이 가장 괴로움을 많이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 바로 이사야 예언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2)  모압 왕국이 완전히 멸망을 당하는 것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훗날 신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유다 왕국과 함께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앗수르 제국의 괴롭힘을 주전 725년경에 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라의 존망이 완전히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잦은 전투로 인하여 장정들이 많이 희생이 되고 있습니다; “그 남은 수가 심히 적어 보잘 것 없이 되리라 하시도다”(16:14c).

(3)  그 뿐만이 아닙니다. 주변국 아람과 이스라엘에 농산물을 수출하고 있던 모압에게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제국 앗수르가 오늘 날의 유럽공동체처럼 제국 내에서의 무역만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출길이 막힌 모압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앗수르 제국에 반항하고 있는 모압을 비방하는 제국의 선전이 날로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국가적인 어려움에 대하여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16:14b).

결론적으로, 오늘 날의 요르단 남부지방이 그 옛날 모압의 땅입니다. 그곳은 물이 많고 비가 많이 와서 풀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목축이 성행했으며 밀 농사도 풍작입니다. 그리고 산간지역에서는 포도농사가 잘되어 건포도 떡을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고 있던 나라입니다(16:7). 하지만 모압은 이웃나라를 깔보고 스스로 교만하고 거만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우상을 많이 섬기면서 세상자랑이 많은 백성들입니다. 그 때문에 그 나라에 내우외환이 크게 발생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당장 3년 내에 다메섹에 주둔하고 있는 앗수르 제국 군대의 잦은 침략으로 많은 희생이 있게 될 것이라고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제국의 경제봉쇄로 모압은 농산물 수출길이 막히게 되어 국력이 쇠하게 될 것이라고까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오늘날 국제정세에 비추어보더라도 크게 다르지 아니한 고대사회의 국제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에 비추어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말며 사람들 앞에 거만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영화를 너무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남을 탓하면서 매사 분노할 일도 아닙니다. 오로지 겸손하고 정직하게 다시 하나님을 찾고 그 말씀을 묵상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야 살 길이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민족이 소원하고 있는 통일의 길도 그 안에 해답이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