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84강(사17:1-1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9월 3일(목)
아람과 북조 이스라엘이 망하고 또 앗수르와 남조 유다와 모압이 망하며 종국에는 바벨론까지 망하게 되는 이유(사17:1-11)
본문에서 이사야는 여러 나라가 왜 역사 가운데 폐허가 되고 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하여 한 구절씩 검토하면서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예언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사17:1); 이사야가 이 예언을 행하고 있는 시점은 주전 728년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이 경고가 임하니라”(사14:28)고 먼저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본문의 서두에서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고 역시 같은 맥락의 경고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주전 728년에 행해진 것이라고 한다면, 아람왕국이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한 때 곧 주전 733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과거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예언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전 728년에 행한 이사야의 경고는 그 전에 사라진 아람왕국 다메섹의 비극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먼 훗날 종말의 때 곧 사람이 살지 못할 정도로 다메섹이 완전히 황폐화되어 버리는 그때를 말하고 있습니다(사17:1).
실제로 다메섹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주전 733년경 앗수르 제국이 아람왕국을 정복하고 다메섹에 군대를 주둔하였지만 그 도시를 크게 파괴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입니다(왕하16:9). 오히려 다메섹에 들린 앗수르의 황제가 그 도시를 더욱 개발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큰 제단을 그곳에 설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곳을 방문한 아하스 왕이 크게 놀라며 그 웅장한 제단을 부러워하고 있을 정도입니다(왕하16:10).
둘째로, “(2)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눕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3)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17:2-3); 아로엘은 모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압 사람들이 그모라 우상을 섬기기 위하여 디본 산당을 세웠는데 그 산자락에 아로엘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15:2, 17:2). 모압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종말로 사람이 살지 못할 정도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종말의 때에 다메섹 아람의 뒤를 아로엘 모압이 뒤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만 종말심판이 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이라고 자처하고 있던 이스라엘 열두 지파도 마찬가지라고 이사야가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선민의 영광은 사라지고 그들도 하나님을 버렸기에 이방인 아람이나 모압처럼 성읍이 황폐해지고 말 것이라는 예언입니다(사17:3).
셋째로, “(4) 그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 (5) 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의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사17:4-5); 이사야는 제3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이 에브라임 요새의 멸절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에브라임 지파 출신의 왕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이 된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패망과 그 때문에 역사 가운데 사라지는 이스라엘 열 지파의 최후에 관한 예언입니다.
이제 이사야는 제4절에서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의 최후와 선민이 완전히 사라질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5절에서는 그들이 베들레헴 가까운 르바임 골짜기에서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응이 임하고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르바임 골짜기 북쪽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는 아이들을 몰렉에게 인신제사로 바치는 가장 끔찍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왕하23:10).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우상을 섬긴 도시와 지역이 사람 살기에 가장 어려운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 먹거리가 거의 사라지고 맙니다. 따라서 배가 고픈 백성들이 손으로 이삭을 베어서 입에 풀칠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초근목피’(草根木皮, 풀 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는 기아상태)의 비참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17:6);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모두가 우상을 섬겼으며 심판의 대상입니다. 전부 심판을 받아 재앙 가운데 굶어 죽을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구원함을 얻는 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말씀은 그 옛날 선지자 엘리야의 판단까지 뛰어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자기 한 사람 외에는 북조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없다고 판단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7,000명의 의인을 남기시겠다고 언급을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왕상19:18).
다섯째로, “(7) 그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8)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신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사17:7-8); 마치 아합 왕 시대의 7천명의 의인들처럼 종말에도 하나님신앙을 파수하는 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나라를 건설하는 역군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2)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서 하나님의 뜻을 재발견할 것입니다.
(3)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일체의 우상을 배격할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구원만을 바라볼 것입니다.
여섯째로, “(9) 그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 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하리니, (10)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도다”(사17:9-10); 이사야는 사람이 사는 성읍들이 무너지고 역사적으로 버림을 받게 되는 이유를 한 마디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산당에서 우상을 섬기고 수풀 속에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알기 쉽게 풀이를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농사의 신 바알과 아름다운 여신 아세라가 합방을 통하여 이 세상에 풍년이 찾아온다고 믿으면서 백성들이 사제인 여자들과 음행을 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창조의 신 하나님을 버리고 풍요의 우상과 쾌락의 이방 신을 섬긴 것입니다.
(2) 우상이 풍요와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흉년과 몰락이 찾아오게 됩니다.
(3) 솔로몬 왕이 통치 후반기에 큰 잘못을 범하여 그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에 나라가 쪼개어지고 맙니다. 동일한 처벌이 종말에 임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방여인을 제 마음대로 후궁으로 삼고서 그들이 이방 신을 섬기는 것을 무조건 허용해주었습니다(왕상11:1-13). 그 여인들을 통하여 이방나라의 온갖 폐습이 제사장나라에 들어오고 만 것입니다.
(4) 마찬가지입니다. 선민들이 무분별하게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우상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이방신이라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풍요와 쾌락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 결과 선민 이방인 구별이 없이 모두에게 하나님의 종말심판이 임하고 있습니다.
일곱째로,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사17:11); 세상적으로 문물이 발달하고 있습니다. 풍요와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이 과학의 발전과 물질적인 번영 그리고 도시문명의 발달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입니다. 아무리 울타리를 두르고 씨앗을 잘 자라게 하면 무엇을 합니까? 그 결실을 함께 나누며 행복을 함께 맛보아야만 할 사람들이 병이 들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흔히 정신 없이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여 풍요를 누리며 잘 살게 되었다고 자랑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때문에 사라져버린 정신적이고 영적인 행복입니다. 인간관계도 물질적인 관계로 변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번영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노년에 근심과 슬픔 가운데 자신의 성취의 의미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경험할 따름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의 경고가 바로 종말예언이라는 사실을 본문이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선민의 나라뿐만 아니라 이웃하고 있는 이방인들의 나라도 모두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 가운데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동일합니다; “구원과 영생의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이라고 하더라도 르바임 골짜기 가까이 힌놈 골짜기에서 아이들을 몰렉에서 인신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산당에서 우상을 섬겼으며 수풀 속에서 여자 사제들과 음행을 일삼았습니다. 풍요와 쾌락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버렸습니다.
그 결과 물질적 풍요와 쾌락은 누렸는지 몰라도 정신적 영적으로는 큰 슬픔 가운데 빠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부지런히 살아온 인생의 결론이 하나님 보시기에 한갓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사야가 경고하고 있는 그 종말의 심판은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누구에게나 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이 시간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서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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