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의 심령이 어떠한가?”(잠16:1-3)
설교일; 주후 2021년 6월 13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6월 11일 작성)
잠언은 솔로몬 왕이 노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솔로몬 왕은 60평생을 살아오면서 일찍이 3가지의 엄청난 행운을 누린 인물입니다;
첫째, 그는 다윗왕의 수많은 왕자 가운데 차기왕으로 점지가 됩니다. 그래서 약관의 나이에 부왕 다윗으로부터 이스라엘제국의 왕좌를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왕상1:29-35, 2:12);
둘째, 부친의 유언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고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하였더니 엄청난 상급을 받게 됩니다. 전례에 없는 지혜와 총명 뿐만 아니라 애써 구하지도 아니한 부귀와 영광 그리고 넓은 마음까지 보너스로 받게 된 것입니다(왕상3:12-13, 4:29).
셋째, 북쪽으로 영토를 더욱 넓혔으며 지역패권국으로 중동 땅을 계속 호령합니다. 그 결과 주변국의 왕들은 조공을 바치기에 바빴으며 공주와 미녀들까지 바쳐서 충성을 맹세하고 솔로몬 대왕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왕상4:20-21, 9:16-17, 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솔로몬은 후회가 막심합니다. 그 이유는 외형만 화려하지 그의 마음속이 허전하며 영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심히 부끄러운 인생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제국의 황제인 솔로몬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주변국의 왕가에서 바친 공주와 미녀들을 그가 모두 비빈으로 삼아 향락을 누렸는데 그 수가 무려 1,000명이나 되고 있습니다(왕상11:2-3);
더구나 그녀들의 종교적인 요청을 그대로 들어준 것입니다. 그 내용이 친정의 우상을 도입하여 마음대로 섬기고 싶다는 소청인데 그것을 물리치지 아니하고 허락하고 맙니다(왕상11:3-5). 그 결과 솔로몬왕은 물론 이스라엘제국의 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한 창조주로 섬긴 것이 아니라 그만 우상문화에 깊숙하게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왕상11:6-9);
솔로몬왕이 그와 같은 자신의 만용과 잘못을 깨닫고 영적인 성찰을 하였을 때에는 어느덧 너무 늦은 나이입니다(왕상11:4). 그 잘못을 되돌리기에는 자신이 심히 늙어버린 노인입니다. 그래서 방법이 없어진 그는 자손들과 동족들에게 자신과 같은 잘못된 인생을 살지 말도록 세권의 책을 저술하여 남기게 됩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잠언과 전도서 그리고 아가입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잠언의 백미로 손꼽히고 있는 제16장의 첫머리 제1절부터 제3절까지를 본문으로 삼아 그 깊은 내용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짧은 3구절에 성도들이 어떠한 신앙생활을 영위하여야 하는지 그 깊은 원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각 구절을 풀이하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16:1); 여기서 ‘경영’이라고 하는 히브리어가 ‘마아르’(מַֽעַרְכֵי)인데 그 의미는 ‘다스린다’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경영’이라고 하는 말은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잠16:1a). 그와 같은 사례를 창세기 제4장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여호와께서 카인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아우 아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그 마음을 엄중하게 다스리지 아니하게 되면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인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생을 미워하는 마음을 제어하고자 하는 그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완전범죄를 꿈꾸면서 카인은 동생 아벨을 넓은 들판으로 불러내어 암살하고 그 시신을 은밀하게 매장하고 마는 것입니다(창4:8);
카인은 주위에 인적이 없고 보는 눈만 없으면 아무도 자신이 동생 아벨을 쳐죽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예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리석게도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영적인 눈을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결코 속일 수가 없다고 하는 이치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창39:9, 히4:13). 창조주는 모든 피조물의 호소를 듣고 있습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땅도 하나님의 눈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과연 다스릴 수가 있는 존재인가?”. 그 대답은 아무래도 ‘No’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에서 자신의 육신에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련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법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게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놀랍게도 사도 바울보다 천년 가까운 옛날 사람인 솔로몬왕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16:1b).
요컨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고 헛되이 애를 쓰지 말고 온전히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서 정직하게 도우심을 구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의 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둘째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16:2); 여기서 ‘자기 보기에는’(잠16:2a)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베에나’(בְּ עֵינָ֑יו)인데 그 의미가 ‘자신의 눈 안에는’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왕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사람의 눈 안에 담기는 것과 여호와의 눈 안에 담기는 것은 그 대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먼저 피조물인 사람의 눈에는 무엇이 담기어 보이고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물질적인 것이며 육신적인 것입니다. 사람의 눈이 삼라만상을 바라보고 그 정보를 두뇌로 전달하면 인간의 머리는 그 정보가 피조세계의 현상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독하게 됩니다. 그것이 유식한 말로 ‘경험론적 인식론’입니다.
하지만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정체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요4:24).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에 갇혀서 피상적인 세계만 자신의 경험에 의지하여 인식하고 있는 인간과는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창조주는 피조세계의 바깥이 아니라 그 안을 투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그리고 선지자인 사무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
그와 같은 지적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23:25-26);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거의 천년 전의 인물인 솔로몬왕이 그 점을 본문에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16:2)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에 담기는 것과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눈에 담기는 것은 차이가 있음을 갈파하고 있는 문장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마치 사진기와 같이 현재 그가 보고 있는 대상의 모습만이 담기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시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통시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눈에는 그 대상인 인간의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이 투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지막날 창조가 된 인간들이 피조세계를 여호와의 뜻대로 신실하게 관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평가하신 여호와의 마음이 그 눈 속에 함께 담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창1:31).
그와 같은 맥락에서 솔로몬왕의 아가 한 구절도 쉽게 이해가 됩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아4:1). 그것은 의인을 사랑하시는 여호와의 마음을 솔로몬왕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로 지어서 부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심령은 히브리어로 ‘루아흐’(רוּחֹ֣ות)인데 그 의미는 행위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인간의 깊은 내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인간의 그 루아흐를 먼저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공의(righteousness)의 정신’에 입각하여 공평하게 판정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깊은 의미가 ‘감찰하다’라고 하는 히브리어 ‘타칸’(תֹכֵ֖ן)에 벌써 들어 있는 것이 신기합니다(히4:12).
셋째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16:3); 여호와 신앙이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의 인생을 그 종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는 아브라함의 경우에는(롬4:16)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 약속의 아들을 바치려고 했을 때에 비로소 인류 최초로 ‘여호와 경외자’라고 하는 이름을 얻고 있습니다(창22:12);
그와 같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창조주의 명령에 따라 바칠 수 있는 자가 여호와의 신실한 종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입니다. 그렇게 성도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육신의 탐욕과 죄의 소욕을 능히 다스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되면 한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지키는 척 할 수가 있지만 내 심령을 투시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도저히 온전히 지킬 수가 없다”.
따라서 성도는 정직하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주님의 이름으로 도우심을 간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부디 성령님의 능력으로 저를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한평생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와 같은 기도가 놀랍게도 주전 10세기의 사람인 솔로몬왕의 잠언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16:3).
결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긴다고 하는 신앙생활은 그 비결이 스스로 주님의 종이 되어 자신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이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자신의 뜻을 고집하게 되면 그만 죄인의 길에 들어서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라고 하더라도 때로는 자신의 아집과 유익을 쫓아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어기게 됩니다. 그때에는 주님의 일생과 교훈에 비추어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 깨닫고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회개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용서와 성령님의 도우심이 임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의 눈에 벌써 그리스도의 피로 산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이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담기어 있는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영적으로 발견하고서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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