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육체가 아니라 믿음으로 태어나는 약속의 아들(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6. 23. 10:30

제목; “육체가 아니라 믿음으로 태어나는 약속의 아들”(4:28-31)

설교일; 주후 2021627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623일 작성)

 

바울이 작성한 13개의 서신서의 하나인 갈라디아서는 교리서신으로 분류가 되고 있습니다(1:1-2). 그 이유는 유명한 로마서, 고린도전서 및 후서와 더불어 기독교의 교리에 대하여 중요한 사실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오늘의 본문 첫머리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4:28)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약속의 자녀가 되는 이유 3가지를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4:29-31). 그 점을 심도 있게 살펴보면 갈라디아서가 교리서로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본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갈라디아서가 작성된 배경설명부터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갈라디아는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로마제국의 시대에 오늘날의 터키로 볼 수 있는 소아시아 지역에 존재하던 7개의 속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위치는 소아시아 지역의 중앙입니다. 참고로 7개의 속주의 위치와 명칭을 말씀드리자면, 사도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 주의 북쪽에 왼쪽부터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가 있으며, 그 북쪽에 역시 왼쪽부터 비두니아와 본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길리기아의 왼쪽인 서쪽에 루기아 밤빌리아가 있고 그 북서쪽에 커다란 아시아 주가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시아 주를 좁은 의미에서 소아시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둘째로, 로마의 속주인 갈라디아 지역에는 사도 바울이 선교한 주요 도시들 곧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드스라, 더베 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그 도시들에 들러 그의 제1차 선교와 제2차 선교를 한 후 유럽으로 건너간 것입니다(16:6-15).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그의 서신서인 갈라디아서를 바울이 제2차 선교 말엽에 그가 오래 머문 고린도에서 작성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18:11).

하지만 갈라디아서의 내용이 사도 바울의 선교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러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말하고 있기에 아무래도 이 서신서는 바울의 제3차 선교 기간에 작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합리적입니다(1:6-10).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그 당시 그가 오래 머문 에베소가 아니면 마케도니아 또는 헬라 지역에서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에 보내는 갈라디아서를 작성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19:8-10, 20:1-3);

 따라서, 그 시기는 주후 53년에서 56년 사이가 될 것입니다.

셋째로, 갈라디아 지역이 소아시아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올라온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현지의 교회들을 순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를 방문하고 있는 교계의 지도자들 가운데 이방선교사로 유명한 사도 바울에 대하여 비우호적인 인물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입니다(15:1-5).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크게 보아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의문입니다. 또 하나는, 바울이 유대인들의 전통인 율법과 할례를 경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에 대하여 그가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영적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으며 그때 이방인선교를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9:3-15, 22:6-21). 그가 비록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주님의 제자가 되고 사도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1:21-22) 영적으로는 분명히 그러하다는 것입니다(고전15:8);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한 12사도와는 그러한 기본적인 차이가 있기에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다음 2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를 비롯한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 주님의 말씀과 같이 육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보다 영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그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더욱 복이 있습니다. 요컨대 믿음이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사도 바울의 글은 자신의 영적 기독론에 충실하며 성도들의 영적인 삶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8:1-11).

또 하나는, 성도들이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고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1:4-8). 그것은 할례와 율법준수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선민구원사상만을 고집하고 있는 유대교의 주장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영적 체험이 그러합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유대교의 구속에서 벗어나 오로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믿음의 자유입니다(고전9:19, 4:31). 그 점을 지적하면서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감히 자신의 모범을 따라 주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고전4:16, 11:1, 3:17).

이상과 같은 사전지식을 가지고 이제는 본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형제들,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4:28); 이 글을 작성하고 있을 당시 사도 바울의 나이가 50대입니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50대의 남자는 노인으로 공경의 대상입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와 유럽지역을 선교한 교계의 저명한 인사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성도들을 구태여 형제들아라고 평등한 입장에서 부르지 아니하더라도 무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형제들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4:28a). 그 이유가 두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사도 바울 자신과 갈라디아 지역의 성도들이 하나같이 주님의 지체로서 동등한 자격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리적으로 동일한 신분이라는 사실을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동일한 신분이 바로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입니다(4:28b). 그렇다면 이삭이 보유하고 있는 약속의 아들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선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사도 바울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는 아브라함이(4:16)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활동을 한지 11년이 지나자 첩 하갈로부터 서장자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16:15-16). 86세의 노인 아브라함이 뜻하지 아니하게 아들을 얻게 되자 그는 이제 13살이 된 이스마엘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자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고 있습니다(17:18).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은 결코 믿음의 선지자인 그의 후사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17:19-21).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이스마엘에게는 여호와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모인 애굽 여인 하갈로부터 배운 것이 온통 세상적인 힘의 논리 뿐인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99세의 상노인 아브라함에게 89세의 안방마님 사라가 내년에 득남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아브라함은 도저히 그 예언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웃고 있습니다(17:17).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하자면 아브라함의 생각이 맞고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사라는 본래 불임 여성입니다(11:30). 더구나 여인의 생리가 끊어진 지 오래된 89세의 상늙은이 할멈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89세의 불임여성이 임신을 하고 90세에 득남을 한다고 하면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초유의 기적이 될 것입니다(2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진지하십니다. 그래서 재차 자신의 예언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주십니다. 하지만 그 말을 엿들은 사라마저 장막문에서 웃고 있습니다(18:12);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단을 치십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8:13-14).

셋째, 여호와의 선지자 아브라함의 대를 잇는 믿음의 아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 탄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창조의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미리 주시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도저히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의 말씀과 능력을 피조물인 인간의 경험과 능력에 비추어서 이해를 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세상적인 사고와 판단에 갇혀 있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그러한 자는 결코 믿음의 후사가 되지를 못하고 약속의 아들의 반열에 올라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의 탄생에 담기어 있는 여호와신앙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묵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이 이하의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4:29); 먼저 아브라함의 가정에 서장자 이스마엘과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난 배경을 창세기에서 다음과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아브라함 부부가 하란에서 남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원주민들에게 여호와신앙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준 지 벌써 10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언약 가운데 첫째가 되고 있는 자손의 번성이 실현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12:2). 그들 부부가 여전히 무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젊은 가신인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겠다고 결심하고서 여호와 하나님께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15:2). 그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몸에서 후계자가 태어날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15:4). 그 다음 아브라함을 장막 밖으로 이끌어 내고서 하늘의 총총한 별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다시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밤하늘의 별과 같은 비현실적인 말씀을 놀랍게도 아브라함이 믿고 있습니다(15:6);

 그 이유는 그것이 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의 능력으로 그 언약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요컨대,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세상적인 이치로 창조주의 약속의 성취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불신앙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안방마님 사라가 인간적인 방법과 꾀로써 실현하고자 합니다. 자신은 불임이며 75세의 늙은 여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현실적으로 이루어 드리는 방법은 자신의 체면을 내려놓고 씨받이 첩을 남편에게 주는 것입니다. 마침 자신의 시중을 들고 있는 젊은 애굽 여인 하갈이 있기에 그녀를 첩으로 남편에게 들이고 있습니다(16:1-2). 그 결과 서장자 이스마엘이 86세인 아브라함의 아들로 태어난 것입니다(16:15-16). 안방마님 사라는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을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고서 남편의 후사를 잇게 하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3)  그러나 아브라함 부부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신앙이 전혀 없는 이스마엘을 약속의 아들로 삼을 생각이 없습니다(17:18-19). 더구나 하나님의 선지자인 아브라함의 후사는 인간적인 꾀와 육신적인 결합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면에 영적인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창조주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아들은 믿음의 여인 사라와 하나님의 선지자 아브라함의 여호와신앙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배경설명을 가지고 이제는 본문말씀,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4:29)에 담겨 있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이스마엘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합방을 한 하갈의 몸에서 태어났기에 육체를 따라 난 자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이삭은 영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춘을 하고 치유함을 받은 아브라함 부부에게서 태어난 약속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젖먹이였을 때에 14살이나 많은 이복형 이스마엘이 동생을 놀리며 괴롭히고 있습니다(21:9).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육체의 힘을 숭상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6:4-5).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발생한 그 일이 사도 바울 당시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도 분명히 그러하다고 바울이 증언하고 있습니다(4:29).

셋째로,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4:30); 창세기 제21장의 말씀에 따르면, 안방마님 사라가 자신의 아들 이삭을 이스마엘이 놀리고 있는 것을 보고서 첩 하갈과 그녀의 소생인 서장자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어쫓으라고 남편 아브라함에게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21:10);

 고민에 싸인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합니다. 그때 주신 여호와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21:12-13).

위의 창세기 말씀을 원용하여 사도 바울이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4: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역사를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주신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현실적으로 성취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풀이를 하자면 초대교회를 탄압하고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들을 박해하고 있는 세상적인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철퇴를 맞을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주장입니다. 더구나 영적으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뜻으로 성령님 안에서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고 있는 바울 자신을 음해하고 있는 세상의 권력자들과 유대주의자들이 교회에서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바울의 믿음이 또한 그 속에 담기어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4:31);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갈라디아 지역의 성도들을 비롯하여 여러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은 세상의 노예로 살고 있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자유로운 여자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애굽 여자로서 안방마님 사라의 몸종으로 일하고 있던 하갈의 경우 안주인의 명령에 따라 바깥 주인 아브라함의 씨받이 첩이 되어 아들 이스마엘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육체적으로 합방이 되어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례를 가지고 사도 바울은 다음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모르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는 세상사람들은 자신들이 종의 자녀임을 알고서 빨리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구원함과 자유함을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모르고 아직도 율법과 할례를 구원의 방법론으로 강조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은 부디 그 틀에서 벗어나서 영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은 그 옛날 이삭이 그러한 것처럼 하나같이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 곧 약속의 자녀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4:28).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세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이 마치 그 옛날 예수님처럼 이 세상의 정치적 종교적 권력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4:29).

둘째,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장차 하나님 자녀의 유업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4:30).

셋째, 성도들은 하갈과 같이 이 세상 주인에게 묶여 있는 종의 신세가 아니라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4:31).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아버지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부활과 영생이라는 깨달음과 영적인 자유가 언제나 함께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므로 이 세상의 죄와 율법 그리고 사망의 권세에 억눌려서 더 이상 종 노릇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8:1-2).

끝으로 한가지 말씀을 더 드리고 싶습니다; 창세기 제3장의 말씀을 참조하면 사실 여자의 후손은 그리스도이며 주님이십니다(3:15).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처녀 마리아에게서 사람으로 태어난 유일한 존재입니다(1:34-38, 1:31-34);

그와 같은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의 의미를 생각할 때에 사도 바울의 말,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4:31)는 구절은 새로운 뜻을 지니게 됩니다. ,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남은 인생을 그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1:12-13).

달리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피조물인 사람들을 옥죄고 있던 죄와 사망의 권세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그 사실을 내주하신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증거하고 계십니다(8:1-2). 그러므로 이제는 그 사실을 믿고 주님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자 결단하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유함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더 이상 세상의 종으로 그리고 권력자들의 박해 아래 숨을 죽이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해방을 얻게 되었으므로 영적인 자유함을 누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로 주님처럼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