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아담 에노쉬와 엘 샤다이(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6. 17. 09:31

제목; “아담 에노쉬와 엘 샤다이”(1:31, 2:1-3, 7-8, 18-25, 4:25-26, 17:1)

설교일; 주후 2021620일 주일

설교자; 손진길 목사(617일 작성)

 

성경말씀의 시작은 창세기입니다. 특히 창세기 제1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경영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셔서 그들에게 맡기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6-30). 그렇게 6일 동안의 창조를 끝내시고 남자와 여자가 이 세상을 선하게 관리하는 모습을 보시고서는 심히 좋았더라고 스스로 평가하시고 계십니다(1:31);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여호와의 뜻대로 이 세상을 계속 선하게 관리하였을까요? 그렇다고 하면 창세기 제2장과 그 이후의 말씀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하지가 못하기에 창세기 제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날을 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라”(2:1-3).

잠시 설명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첫째, 천지와 만물의 창조를 6일만에 마치신 것은 사실입니다(2:1). 그러나 아직 창조의 역사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경영하여 나가는 일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6일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여 그들에게 선한 청지기의 직분을 맡겼지만 처음과 나중이 다릅니다. 처음에는 심히 좋았지만나중에는 그러하지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청지기의 창조가 다시 필요합니다. 그 일이 창세기 제2장에서 제7일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2:2).   

둘째, 사람이 선한 청지기가 될 수 있는 조건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그 말씀의 뜻을 차질없이 시행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경영하기에 앞서서 여호와와 함께 살아가면서 필요한 교육과 훈련을 받는 기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기간은 이 세상의 일을 잠시 내려놓고 여호와 앞에서 영생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날이므로 심히 복되고 거룩한 날입니다. 그 칠일의 개념을 창세기 제2장에서는 안식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2:3a).

셋째, 사람들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그 시간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때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안식을 통하여 창조주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 교육이 제7일에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의 창조와 경영이 제7일에 마무리되고 있다고 창세기 제2장에서 기록되고 있습니다(2:3b).

또한 창세기 제2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한 청지기를 교육시키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은 아담(אָדָ֔ם)을 에덴동산에 두고서 창조주와 동거하는 삶을 시작하고 있습니다(2:7-9). 청지기 교육의 기본이 하나님 앞에서(לְ פָנַ֖י, 라 페네) 종의 분수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청지기의 주인이 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법도를 에덴동산 중앙에서 자라고 있는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실과가 보여주고 있습니다(2:9). 동산의 모든 실과를 따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탐을 내거나 따먹어서는 결코 아니되는 것입니다(2:17). 그럴 경우에는 선한 청지기가 아니라 악한 죄인이 되고 맙니다. 그 대가는 참혹합니다. 여호와의 생명의 기운이 풍성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마는 것입니다(3:23).

범죄한 아담 부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실락원에서 살게 됩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있는 아담의 가정에 비극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장남 카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그만 쳐죽이고 마는 형제간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4:8).

여호와께서는 사전에 카인에게 마음속의 악한 충동을 다스리라고 경고하셨지만 소용이 없습니다(4:6-8). 카인이 창조주 여호와의 눈도 속일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서 그만 동생을 살해하는 한편 완전범죄를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4:9-11);

하나님께서는 아담부부의 슬픔을 생각하셨는지 살인자 카인을 죽이는 대신에 동방 땅으로 유배를 보내고 마십니다(4:12). 그곳에서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여러 족속들이 제멋대로 살고 있습니다(4:14). 절망에 빠진 카인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부디 살려 달라고 여호와께 매어 달립니다(4:13-14). 여호와께서는 불쌍하게 보시고 카인에게 장차 무법천지 놋 땅에서 나름대로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야인의 능력을 주고 계십니다(4:13-15, 21:20-21).

카인이 놋 땅에서 자신을 보전하면서 나중에는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자신의 성채를 마련하게 됩니다(4:16-17). 그러나 영생에서 멀어진 카인과 그의 자손들의 삶은 창세기 제4장에서 끝나며(4:18-24) 더 이상 생명의 책인 성경에서 기록이 되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편, 아담 부부가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된 두 아들 카인과 아벨을 모두 잃어버리고 슬픔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소망을 주십니다. 그것이 아담처럼 여호와의 형상을 더 많이 닮아 있는 아들 (Seth)을 그 가정에 주신 것입니다(2:7-8, 4:25, 5:3).

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의인의 가계의 특징을 창세기 제4장 제2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26).

오늘 강해설교의 제목이 아담 에노쉬와 엘 샤다이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아담 에노쉬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지만(1:26-27) 그들의 성품이 창조주의 내적인 성품인 형상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을 창세기 제5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5:1-2).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형상을 많이 보전하고 있는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고서 선한 청지기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십니다. 여호와의 생명의 기운을 받으면서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담이기에 에덴동산에서의 그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과 육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람이란 영이신 하나님만으로는 역시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을 아시고 여호와께서 애완동물을 만들어 아담에게 주지만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와를 창조하여 아담에게 배필로 주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11처제의 아름다운 가정이 에덴동산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2:20-25).

셋째로, 아담 부부마저 여호와의 말씀보다 육적인 탐욕을 쫓아 선악과 열매를 따먹는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죄 가운데 영생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고 있습니다(3:22-23). 그러자 실락원에서 아담 부부의 장남인 카인이 동생을 쳐서 죽이는 형제간 살인의 죄악을 범하고 맙니다. 이제 온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이 사라질 형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아담에게 여호와의 형상을 보전할 수 있는 새로운 아들을 주십니다. 그 이름이 (Seth)입니다.

넷째로, 셋이 의인의 족보를 만들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아들 에노스를 낳고서 함께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신앙을 대물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4:26). 여기서 에노스는 히브리어 에노쉬’(אֱנֹ֑ושׁ) 음역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의 죄인이 자신의 한계를 알고서 창조주 하나님께 감히 영생을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것이 여호와신앙의 본질입니다. 그 핵심이 아담 에노쉬라고 하는 말 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이 모든 성도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4:16). 그 이유는 하나님 보시기에 여호와신앙의 모범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보다도 창세기 제17장 제1절에 기록이 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정확하게 실천한 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라 페네, לְ פָנַ֖י, 얼굴을 향하여)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 אֵ֣ל שַׁדַּ֔י)께서 그 청지기의 인생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요컨대, 여호와 앞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하나님 자녀 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바로 창조주 여호와의 전능하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와 같은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하고서 자신의 생애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장 특징적인 사건 세가지가 창세기에 다음과 같이 인상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손의 번성을 주시겠다고 하는 여호와의 약속이 무려 10년 동안이나 실현되고 있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2:1-2, 16:3). 그래도 그 약속을 다시 확인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기하게도 아브라함이 또 한번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이 창세기 제15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5-6).

이미 85세의 노인 아브라함입니다. 그의 아내는 75세의 불임 여성입니다(11:30, 16:1). 그래서 자신의 청지기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한 아브라함입니다(15:2). 하지만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이 다시 나타나고 있기에 또 한번 창조주의 말씀과 그 능력을 믿고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자 결심하고 있는 아브라함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모습인 것입니다(롬4:16-22);

둘째로, 자손의 번성은 아브라함이 첩 하갈로부터 서장자 이스마엘을 얻고 14년후에는 아브라함 부부가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기초가 마련되고 있습니다(16:15-16, 21:1-7). 그렇지만 여호와의 또다른 약속인 아브라함의 이름의 창대함은 아직 그 모습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2:2). 그 약속이 언제 성취가 되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브엘세바에서 실현이 되고 있습니다(21:22-34).

아브라함 가족이 가나안 땅의 가뭄을 피하여 비옥한 그랄 평야 곧 블레셋의 땅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습니다(20:1). 그곳 들판에서 아브라함이 우물을 파면 하나님의 은혜로 샘물이 솟아납니다. 그것을 보고서 원주민 블레셋 족속이 힘으로 뺏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동쪽 변경으로 이동하면서 계속 들판에서 가축을 먹일 우물을 파지만 그때마다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기고 맙니다(21:25).

드디어 가나안에 인접한 마지막 블레셋의 땅 브엘세바 골짜기에서 다시 우물을 파고 있습니다. 그때 블레셋의 왕중왕인 아비멜렉이 은밀하게 군대장관 비골만 데리고 멀리서 아브라함을 찾아오고 있습니다(21:22). 그 이유는 여호와의 선지자인 아브라함이 블레셋의 국경을 벗어나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블레셋 땅에 벌을 내리게 되면 그것이 정말 큰일이기 때문입니다(20:7, 17-18).

블레셋의 최고통치자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맺자고 간청하고 있습니다(21:23). 차제에 아브라함은 블레셋 땅에서 당한 억울한 사정을 말하고 그 시정을 요구합니다. 아비멜렉이 이제부터는 그러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약하고 있습니다(21:26-30). 평화조약이 성립되자 안심을 한 아비멜렉과 비골이 다음날 일찍 그랄로 돌아갑니다(21:32).

그때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기념으로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찬양을 올려드립니다(21:33);

 그 이유는 자신의 이름이 블레셋의 왕중왕인 아비멜렉 만큼이나 창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헤세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제는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11:16).

셋째로, 아브라함이 영생의 하나님께 자신의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고 하는 그 결심이 과연 진실한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한 여호와의 시험이 곧이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무려 85km나 북쪽에 있는 모리아 산으로 가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는 여호와의 시험입니다(22:1-2).

인신제사를 좋아하는 신이 이방인들의 우상인 밀곰이나 바알입니다(왕하3:27, 21:6).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피조물 인간을 결코 제물로 삼지 아니하십니다(18:21). 그런데 어째서 그러한 이상한 요구를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순전히 사무엘상 제2장 제30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한번 시험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당시 대제사장 엘리가 자신의 아들들을 여호와보다 더 중히 여김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불경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삼상2:29).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아들 이삭을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바치고자 합니다. 그 속사정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때 벌써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부활의 은혜를 주실 줄 믿은 것입니다. 그 결과 감히 그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11:17-19 의역).

그 모습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급히 천사를 보내어 아브라함의 번제 행위를 멈추게 하고 대신 여호와 이레의 양을 번제물로 주십니다(22:13-14). 그리고 진실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아브라함이라고 칭찬하십니다(22:12). 그것으로 아브라함은 명실공히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에덴동산에서 선한 청지기의 교육을 받고 있는 자가 아담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인 하와와 함께 실족하여 그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실락원에서 살게 됩니다. 그후 형제간 살인이 발생하여 아담 부부는 슬픔에 빠집니다. 그것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새로운 소망의 아들 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보전하고 있는 셋이 아담에 이어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아들 에노스를 낳고 영생하시는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합니다. 죄가 많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불쌍하게 보시고 부디 영생의 구원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일평생 그의 집안은 선한 청지기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창세기에 등장하고 있는 의인의 족보입니다.

훗날 아브라함이 또한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는 여호와의 말씀을 철저하게 믿고서 살아갑니다.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그 앞에서 살아가는 종을 반드시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그가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눈 앞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오늘날에도 주님처럼 부활하여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22:28-30, 5:27-29, 고전15:22-24). 그러므로 아무쪼록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완전한 청지기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고서 한평생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