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룡전40(작성자; 손진길)
아룡이 부부는 1273년 4월 제주도에서 데리고 온 500명의 삼별초 군사들을 오키나와의 고려촌에 무사히 정착시키는데 2년이 소요된다. 그 일이 얼추 끝나자 1275년 봄에 오키나와에서 무역선을 타고서 고려의 벽란도로 들어간다.
정기적으로 아룡이 부부가 2년에 한번씩 고려에 들린다. 따라서 그가 이끌고 오는 오키나와의 무역선에는 아시아 각국과 유럽에서 온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물건이 가득 실려 있다. 그것을 개경에서 팔아서 큰 이문을 얻는다. 그러므로 아룡이 부부는 오키나와에서 일종의 중개무역을 경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룡은 경하선과의 상단 운영에 관한 협의가 일단 끝나자 슬며시 재상 김보정을 다시 만나고자 한다. 이제는 김보정이 나이가 많아 조정에서 물러나 있다. 따라서 아룡이는 편하게 김보정의 개경 자택에서 그를 만난다. 아룡의 나이가 벌써 75세이다. 동갑인 재상 김보정도 같은 나이이다. 그는 머리와 수염이 온통 희다.
그것을 보고서 아룡이 은퇴한 재상인 김보정에게 말한다; “오랜 세월 국사를 돌보시느라 머리와 수염이 온통 희어져 버렸군요. 장사꾼으로 편하게 살고 있는 저는 대감과 동갑이지만 아직 검은 숱이 더 많습니다만… 하하하… “.
그 말을 듣자 김보정이 ‘허허’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내가 완전히 백발이 되더라도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만 있다고 하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현 시국이 그러하지가 않으니 그것이 걱정입니다… “.
‘무슨 고민이 있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아룡이 귀를 기울인다. 그러자 재상을 지낸 김대감의 신세 한탄이 들려온다; “재작년 4월에 제주도에서 마지막까지 대몽 항쟁을 하던 삼별초가 완전히 토벌되고 말았지요. 그때 제주도의 지세와 기후가 말을 키우기에 적당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원나라가 그만 탐라를 자신들의 목축장으로 만들고 말았어요. 게다가… “.
김보정이 한번 한숨을 길게 쉰 다음에 말을 잇는다; “쿠빌라이가 일본을 정복하겠다고 고려의 조정에 함정 900척을 1년내에 건조하라고 명령했어요.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다행히 부원파인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가 백성들을 닥달하여 겨우 배를 만들었지요. 그러자 그 다음에는 일본을 토벌할 군사를 대라고 하는 것이에요… “.
거년의 일을 생각하는지 김보정이 잠시 말을 끊더니 계속 말한다; “우리는 용감한 김방경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몽골군과 함께 1274년에 일본정벌에 나섰지요. 처음에는 승승장구했지만 불운하게도 태풍을 만나 해안에 정박중이던 함정과 수군들이 큰 피해를 당했기에 그만 철수하고 말았어요. 실로 그 피해가 막심합니다... 더더구나… “.
갑자기 김보정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그가 애통하는 심정으로 말한다; “제가 섬기던 국왕 원종이 작년에 그만 승하하고 말았어요. 지금은 태자가 즉위하여 고려를 다스리고 있는데 원나라의 눈치가 보여서 ‘충’자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충열왕이지요. 하지만 현 국왕은 쿠빌라이의 사위이기에 나름대로 원과의 관계는 좋은 편입니다… “.
아룡이 김보정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으면서 그의 눈치를 살핀다. 김보정은 제주도에서 삼별초가 모두 소탕된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의 조정에서 오키나와에 살고 있는 삼별초의 잔당을 수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거듭 확인하면서 아룡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 김보정의 말에 따르면 지금 원제국의 황제인 쿠빌라이는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남송을 손에 넣기 전에는 더 이상 일본 열도를 공격하지 아니할 것으로 보인다. 그와 같이 짐작한 아룡이 김보정과 작별인사를 하고서 그 집을 떠난다.
객주 경하선의 저택으로 돌아온 아룡이 아내인 최사월에게 말한다; “당신과 나는 벌써 75세가 되었어요. 옛 어른들은 70살 노인이 드물다고 하여 ‘고희’(古稀)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런데… “.
아룡이 잠시 말을 끊고 다정하게 아내의 얼굴을 한번 본 다음에 말한다; “우리는 내공술을 연마하였기에 아직 정정합니다. 능히 백수를 누릴 것만 같아요. 그런데 슬하의 세준과 세희가 모두 결혼하고 말았으니 남은 여생이 쓸쓸할 것 같아요.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
마침내 아룡이 결론을 말한다; “우리는 근골과 성격이 좋은 어린아이들을 선택하여 오키나와에 데리고 가서 제자로 양성하는 것이 어떠하겠어요?... 우리들이 일군 고려촌을 대대로 지키자면 젊은 무인들을 많이 길러내야 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때요?... “.
최사월이 적극 찬성한다. 따라서 아룡이 부부는 한달간 개경에 머무는 동안에 열심히 고아들과 걸인소년들을 살피고 다닌다. 아무래도 멀리 오키나와까지 데리고 가자면 그러한 출신이라야 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들의 조건에 맞는 남자 어린아이 3명과 여자 어린아이 3명을 발견한다. 아직 10살이 되지 아니한 나이인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에 총기가 있다. 그런 좋은 자질의 아이들이 그만 전란 중에 고아가 되고 만 모양이다.
아룡이 부부가 그들 6명의 아이들을 제자로 거두어 오키나와로 돌아간다. 고려촌의 사람들은 70대 중반의 촌장내외가 어린아이들을 제자라고 데리고 오니 신기한 모양이다. 하지만 며칠 후부터 어린 제자들에게 학문과 무예를 열심히 가르치는 것을 보고서는 모두들 고개를 끄떡이고 있다.
4년의 세월이 흘러 1279년이 되자 아룡이는 남송이 마침내 원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쿠빌라이는 남송의 수군과 패잔병들을 끌어 모아서 1281년에 다시 일본정벌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 원정군의 규모가 엄청나다. 원제국의 군사가 1만명, 고려의 군사가 1만명, 멸망한 남송의 강남군이 10만명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아룡이 속으로 생각한다; “원제국의 세조인 쿠빌라이는 영리한 인물이구나. 비록 남송이 망했지만 그 인구가 많고 군인출신이 상당하므로 그 힘을 빼기 위하여 10만명의 강남군을 일본원정에 동원하여 처리하고자 하는 것이야… “.
하지만 이번에도 원정군이 대마도와 이끼 섬은 정벌하였지만 태풍을 만나 대패를 당하고 만다. 특히 원제국의 장군들이 성급하게 철군하는 바람에 일본 열도에 남겨진 10만명의 강남군이 전부 일본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일본군은 잔혹하게도 장인으로서 쓸 만한 기술을 가진 자 4만명만 남기고 모조리 참수하고 만다. 그러한 처참한 전쟁의 역사를 전해 듣고서 81세의 아룡이 혀를 찬다. 그는 일본인들의 잔혹한 성품이 마치 몽골군과 같은 것을 보고서 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편 아룡이가 키운 고려촌의 젊은이들은 전부 학문과 무예를 할 줄 안다. 특히 아룡이가 그들에게 내공과 외공술을 두루 가르쳤기에 그들의 무예가 상당하다. 그들이 고려 촌장인 김재룡의 양딸 김세희의 부탁을 받고 오키나와의 3집안 가운데 중산(中山) 가문을 돕고 있다.
그 결과 오키나와의 중심부에서 중산의 가문이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 그 중심에 중산가문의 장자인 중산다로와 그 부인 김세희가 있는 것이다. 훗날 그들 부부의 아들인 중산호달과 손자인 중산찰도가 대를 이어가면서 국왕이 된다.
그들 중산국의 왕들은 모계가 고려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중개무역을 하면서 고려와 많이 친하다. 그 결과 1389년에는 일본의 왜구에 잡혀와서 고생하고 있는 고려사람들을 많이 구출하여 고려로 보내어 준다. 그것을 보고서 고려의 당시 국왕인 창왕이 문신 김윤후(金允厚)를 보내어 사의를 표한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하여 양국의 무역은 더욱 활발해진다.
한편 원제국의 세조인 쿠빌라이는 1294년에 별세한다. 그때 아룡이 부부의 나이가 94세이다. 그들은 살아서 쿠빌라이의 죽음의 소식까지 전해 듣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당대에 중원을 통일하고 천하를 호령하던 쿠빌라이도 죽고 마는구나!... 그와 마찬가지로 원제국도 생각보다 빠르게 멸망할지 모르겠다… “.
아룡의 짐작이 맞다. 원제국의 지배계급인 몽골인들은 빠르게 유목민의 전통에서 멀어지게 되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된다. 특히 황제와 귀족들이 티벳에서 들여온 밀교인 라마교를 지나치게 신봉하여 수많은 사찰을 짓고 잦은 종교행사에 재정을 거의 탕진하고 만다. 더구나 서로 대칸이 되고자 칼부림을 하는 등 내분이 그칠 날이 없다.
그때문에 무력해진 원제국의 군대가 주원장이 앞장선 한족의 반란을 막지 못한다. 그 결과 소수의 황족과 귀족들만이 겨우 피신하여 그 옛날 조상들이 살던 먼 북방 고비사막 너머로 들어가고 만다.
그들이 너무나 황급히 도망하고 있기에 남을 챙길 여유가 전혀 없다. 일설로는 고려 출신 마지막 황후 기씨가 별세하자 그대로 그 시신을 길에 버리고 계속 도망을 쳤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한 비극이 발생한 해가 바로 1368년이다.
만약 그때까지 아룡이 살아있었다고 한다면 그의 나이가 168세이다. 그러나 그는 130세를 넘기지 못하고 오키나와에서 죽고 만다. 아룡의 아내인 최사월은 100수를 누리고 남편의 품에서 먼저 별세했다.
아룡은 너무 장수하였기에 노년에 그의 주위에 친지가 거의 없다. 양아들과 양딸 내외도 벌써 타계하고 말았다. 오로지 그가 75세때 개경에서 데리고 온 6명의 고아 출신 제자들만이 오키나와의 고려촌에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의 어린 제자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김재룡의 놀라운 무예를 후인들에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고려가 낳은 또 한 명의 기재인 김재룡의 깨달음과 무예가 제자들을 통하여 후인들에게 전해지고 있지만 정작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대미).
'소설 아룡전(작성자; 손진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아룡전39(작성자; 손진길) (0) | 2020.06.09 |
---|---|
소설 아룡전38(작성자; 손진길) (0) | 2020.06.09 |
소설 아룡전37(작성자; 손진길) (0) | 2020.06.08 |
소설 아룡전36(작성자; 손진길) (0) | 2020.06.07 |
소설 아룡전35(작성자; 손진길) (0) | 2020.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