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3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29. 04:15

이사야 강해 제35(6:11-13a)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716()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평생 동안 실천하는 사람들이 대거 이 세상에 나타날 때까지 어떠한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이 되고 있는가?(6:11-13a)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아 실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당당하게 입성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의 수가 참으로 적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 뒤를 따라다녔지만 그 가운데도 그러한 자가 적을 것임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0-21).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아 제대로 실천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상식과 통념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과 그 인도하시는 인생길이 사람들의 사고방식 및 살아가는 방법과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55:8-9). 실제로 사람들이 자신에게 익숙한 대로 세상적인 방법을 그대로 따르게 되면 적자생존의 법칙에 맞으며 자신에게 당장 이익을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방법을 그대로 따르게 되면 당사자에게 손해와 희생이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우선적으로 살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망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사자는 물론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공의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리판단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 모두가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 모두를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볼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나와 너와 우리가 한꺼번에 속하고 있는 집단만을 우선적으로 살리고자 하는 인간의 정의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계시하고 있는 말씀에 대하여 아예 외면을 하거나 선민의 경우에는 아전인수격으로 왜곡하여 적용하는 등 타락과 변질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6:9-10). 그렇다면, 언제 그와 같은 잘못된 역사가 종말을 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고 들으며 실천하게 되는 시대가 열리게 될까요? 선지자로 세움을 받고 있는 이사야는 그 점이 못내 궁금합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6:11a).  

그때 이사야에게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답변이 다음과 같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6:11b-13a). 쉽게 풀이를 해보자면, 이기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방법을 계속 고수하다가 결국에는 서로간에 전쟁을 하게 되고 멸망의 역사를 자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10분의 1정도가 남아서 하나님신앙을 회복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하겠지만 인간의 역사 가운데 그 결과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렇다면 그 후 선민의 역사가 과연 그러할까요? 구약과 신약 그리고 교회의 역사 가운데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지상 마지막 제사장나라였던 이사야의 조국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이 주전 586년에 신 바벨론 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왕하25:1-7). 유대인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그 땅이 황폐화되고 맙니다. 몇 십 년이 지나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역사로 페르샤의 황제 고레스에 의하여 신 바벨론이 멸망을 당하고 유대인들이 자유를 얻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44:28, 45:1-6) 자신에게 천하통일의 은혜를 베풀어준 여호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레스는 칙령을 내립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원하는 자는 고토(故土, 연고가 있는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 자금은 페르샤 제국에서 지원하겠다는 내용입니다”(1:1-4).

그런데 막상 고토 예루살렘과 유대 땅으로 돌아온 유대인의 수는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살기 좋고 넓은 제국 문명지역에 그대로 남아서 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그 귀환자의 수를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살펴보면 20만명이 조금 넘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왕국의 백성의 수가 200만명 이상으로 추정이 되고 있으므로 귀환자는 10분의 1 정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훗날 그들의 역사가 어떻게 될까요? 주후 70년에 로마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다시 멸망을 당하고 이방 땅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둘째로, 주후 27년경부터 예수님이 36개월 동안 제자들을 모아서 함께 공생애를 지내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부터 왔으며 자신의 아버지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신 유일한 사람입니다(2:16, 3:13, 17-18).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각종 병과 장애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하늘의 곳간을 열어서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있습니다(14:13-21, 15:32-38). 심지어는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죽은 자를 되살려내는 기적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11:38-44).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가 복음으로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은 자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병의 고침을 받고서도 대부분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교훈이 선민들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5:43-48, 10:30-33). 그 결과 처음부터 끝까지 공생애에 동참한 제자는 11명에 불과합니다(6:66-71, 1:21-22).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지켜본 제자가 500여명입니다(고전15:6). 그 가운데 오순절 성령강림 때까지 다락방에 남아서 끝까지 기도한 성도는 약 120명에 불과합니다(1:15, 2:4).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많이 베풀 때에는 유대인들 가운데 10분의 1정도가 그 주위에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황폐화되어 대부분이 떠나가버렸습니다. 그 결과 단지 120명의 성도들만이 끝까지 남아서 기도에 힘써다가 성령세례를 받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역사에 비추어볼 때 역시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응하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교회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주후 324년에 동서로 갈라져 있던 로마를 하나로 통일한 황제가 콘스탄티누스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가 꿈에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의 계시를 얻어 그대로 전투를 치른 결과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를 얻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정책의 이면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탁월한 정치적인 판단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기독교야 말로 세계적인 대제국인 로마에 사상적인 통일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훌륭한 종교이다. 만민평등과 구원을 주장하고 있으니 로마의 만민법체계와도 어울리는 것이다”. 그와 같은 그의 판단은 로마도 하나, 황제도 하나, 이제는 종교도 하나라고 하는 그의 주장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시에 칙령으로 모든 로마제국의 백성들에게 교회에 출석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갑자기 한꺼번에 들어오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로마의 교회는 대혼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기존 성도에 비해서 열 배 이상의 사람이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만이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가르침과 교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저마다 자신들의 종교와 사상을 가지고 교회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이 몸살을 앓게 됩니다. 이방인들의 종교와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 로마교회입니다. 로마제국 내에 10분의 1도 되지 아니하는 기존 기독교인들의 교회가 어떤 면에서는 로마의 국교가 됨으로써 혼란과 황폐함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문 이사야의 예언은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하신 예언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 마디로 집약한다면, 인위적인 노력이나 역사적인 개혁이 완전한 하나님신앙의 회복을 가져오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그 조치는 새로운 창조를 의미합니다. 완전한 새로운 역사의 창조가 하나님에 의해서 발현이 되어야만 합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님의 오심이라는 두 가지 사건으로 역사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바라보면서 이사야의 예언은 총66장에 이르기까지 그 길이와 넓이를 더하면서 도도하게 진행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