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34강(작성자; 손진길 작성)

손진길 2021. 5. 28. 21:00

이사야 강해 제34(6:9-1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715()

 

역설적인 표현 가운데 들어있는 따뜻한 창조주의 구원의 마음(6:9-11)

 

첫째로, 복음주의 성경해석의 방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가지고 성경말씀을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하만물과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구원주로 보내셨다고 하는 기쁜 소식으로부터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3:16-17).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그 반대의 말씀을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들려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6:9-11).

간단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분명히 그러합니다; (1)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세상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돌이키기 위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2)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삼으시고 동족들에게 전해주라고 하는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유다의 백성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있으니 아예 그렇게 살다가 역사적인 심판이나 당하는 것이 옳다고 그렇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전하라고 하시는 메시지의 전체 내용일까요?

둘째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말씀의 뜻이 아니기에 이사야의 글을 훗날 예수님이 자주 인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야단치면서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하시듯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사야를 보내어 선민들에게 가혹하고도 야속할 정도로 야단을 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민 유대인을 자식같이 여기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안타까운 마음을 역설적으로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1)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본문을 재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를 못하고 있구나. 그렇게 계속 제멋대로 행하면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가 없게 될 터인데 그것이 염려스럽기 그지 없구나. 마침내 역사적인 심판을 당하게 되어야 제 정신을 차리게 될 것으로 보이니 안타까운 심정을 이루 말로 다 전할 수가 없다고 하겠다”(6:9-11 의미적 재해석).

(2)  그와 같은 해석이 요구되고 있는 비근한 사례를 찾아보자면 애굽의 황제 바로의 경우입니다. 바로는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출애굽을 완강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도합 아홉 번의 재앙을 연이어 당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굳건히 하면서 버티고 있습니다(8:15, 19, 9:34-35). 그런데 그 대목에 대하여 때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달리 기록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9:12),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10:20).

(3)  풀이를 해보자면,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일종의 인과론적인 언급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피조물의 잘못에 대하여 창조주가 그 귀책사유를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어 있는 사람의 잘못에 대하여 더욱 그러합니다. 그 이유는 마치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자신의 허물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셋째로,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의 의미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독생자가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1:29). 창조주는 결코 피조물의 죄를 계속 또 다른 피조물을 제물로 삼아 속죄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7:27, 10:5). 창조주 스스로 피조물을 잘못 만든 허물을 죽음으로 감당하시고 있습니다. 이제 창조주가 조물주로서의 책임을 십자가에서 전부 감당을 하시고 났으니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다음이 실로 문제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자식이 자신을 잘못 낳았다고 부모를 더 이상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부모님께서 이 세상에 아니 계신다고 하면 남은 인생살이 가운데 그러합니다. 더구나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자리에 그 부모님이 대신 죽으셨다고 한다면 그 뒷감당을 어찌할 것입니까? 한 마디로, 그때부터는 부모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자식이 된 최소한의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이치로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그리고 예수님을 대속의 어린양으로 고백하고 있는 성도들은 나머지 인생을 달리 살아가야만 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28:18-20, 1:1).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살아가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제사장나라의 백성들이 도무지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인 표현이 본문에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렇게 곁길로 계속 나가다가는 역사적인 심판을 당하고 말 것이라고 이사야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안타깝게 부르짖고 계시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